118화. 디비전 시리즈 (1)
퍼엉-
깨끗하고 명쾌한 포구음이다.
“스트라익.”
초구가 아주 잘 들어갔다. 오늘 게임은 나의 첫 포스트 시즌 등판이자 1선발의 자격을 만인으로부터 공인받아야 할 자리다. 마침내 꿈꾸던 에이스로서의 첫 장이 펼쳐졌다.
“좀 더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선수가 나가는 게 맞지. 특이나 이런 단기전에서는 가장 잘 던지는 투수가 가장 많은 등판기회를 받는 게 당연하잖아.”
소르카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다음 말도 있을 것 같았지만, 거기까지 하고 말을 아꼈다. 사실은 더 알고 싶지 않았다. 복잡한 감정은 사양이다. 심플한 것이 좋다.
하늘을 찌르는 내 의욕만큼이나 공에 들어가는 힘이 느껴진다. 상쾌한 출발이었다. 포수의 생각은 다른 것 같지만.
베그웰이 일어서 진정하라는 듯 손으로 아래를 누르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해 보인다.
‘아! 실수.’
난 파워피처가 아니다. 내 공은 힘 있게 날아가면 모양만 좋은 배팅볼이 될 확률이 높다. 내 공은 흐느적거리며 상대의 힘을 빼야 하는 공이다. 공 더럽네라는 말이 상대에게서 흘러나와야 한다. 얼핏 초구부터 실투성의 공을 던져 버렸다. 타자가 타격을 자제하고 지켜봐 줘서 다행이었다.
발끝을 모아 가볍게 몇 번 통통 뛰면서 경직된 몸과 마음을 풀었다.
‘릴렉스, 릴렉스… 음. 좀 낫네. 근데 그건 그렇고…’
몸에 힘이 좀 풀리려는 순간 가라앉았던 분노가 느닷없이 치밀어 올랐다.
‘이런… 또 생각나 버렸네.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 기어이…’
이건 상대 팀을 욕한 거다. 베그웰을 향한 약간의 개인적 감정이 포함되어 있긴 했지만 99%는 상대 선수가 대상이었다. 이건 100% 팩트다.
‘사실은 다저스 놈들이 제일 욕먹어야 해. 특히 투수들은 쌍욕을 처먹어도 할 말이 없지. 세상에… 어떻게 그걸 지냐?.’
단판 승부였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어떻게든 이해를 해보려 하겠는데 한 판도 못 이기고 2연패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신이 썩어빠져서 그렇지. 배에 기름기가… 음.’
내가 꼭 고 감독처럼 말하고 있었다. 말하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다.
‘그런 꼰대 아저씨가 빙의한 것 같은 말투라니…’
역시 사람을 잘 사귀어야 하는 건데 한창 커나가야 할 때 그런 꼰대 성향 아저씨와 함께 지내다 보니 내 팔자가 이렇게 꼬인 것 같다. 꽝만 뽑아대는 이 미숙한 예측력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잘 찍어 주는 1타 강사를 만났으면 좀 달라질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하필이면 고 감독을 만나서 이렇게 사연이 많아진 거라고.’
심플 라이프를 지향하는 내 삶에 이제부터라도 이런 어긋남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벌어지다니…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직접 어긋난 것을 바로 잡겠다는 결심으로 이 게임을 기다려 왔다.
어차피 동계훈련 비용은 계속 내가 내려고 했었다. TV 사주는 것쯤은 친구가 원한다면 10대라도 가능하다. 득실을 따져 생각해보면 내기에서 졌다고 현실적으로 내가 별로 손해 본 건 없다. 그런데도 몹시 짜증스럽다.
‘이런 식으로는 아니어야 하는 거지. 내가 원해서 내는 것과 내야만 하는 게 같을 수가 없잖아.’
어떻게 두 게임을 다 질 수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전문가들도 열이면 아홉은 나와 같은 예상을 했었다. 구기 종목 중 데이터를 가장 잘 수치화할 수 있는 야구라는 게임에서 이건 말이 안 된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결국 컵스와 말린스가 올라와 버렸다. 정신적 타격이 몹시 크다.
‘아! 흥분했네. 좀 가라앉혀야 해. 일단 저놈부터 잡고…’
다저스는 망설여서 졌다. 그 망설임의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아마 디비전 시리즈에서 부딪쳐야 하는 우리 팀 걱정을 먼저 한 것 같다. 당장 눈앞의 상대보다 다음 상대를 걱정하면서 지금 이기기를 바랐다. 거기서 균열이 발생했다.
1차전에 3선발을 내보냈다. 나름대로의 플랜에 의한 선택이었겠지만 누구나 처맞기 전까지는 계획이 있다. 1회 초부터 대량 실점을 하면서 미리 그려놓은 예쁜 그림은 엉망이 되었다.
포스트 시즌 같은 단기전에서 강력한 원투펀치의 존재는 절대적 힘을 발휘한다. 5명이 고르게 평균적으로 잘하는 선발진은 정규 시즌에 강점이 있다. 그러나 단기전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선 잡을 경기를 꼭 잡아주는 절대적 에이스가 꼭 필요하다.
다저스의 1선발과 2선발은 상당히 괜찮은 선수들이었다.
‘좋은 투수가 있으면 뭐 하냐고. 한 명은 써먹지도 못했는데… 1차전 대량 실점 이후에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최정예 선발을 투입해서… 이건 너무 결과론인가?’
냉정히 생각하면 6:0으로 뒤지고 있는 상태에서 승리카드로 생각했던 선수를 투입하긴 어려웠을 것 같다. 이미 기울어버린 1차전을 내주고 2, 3차전을 이기자 이런 식으로 머리가 돌아간 다저스는 결국 그 게임을 7:6으로 놓치고 어버버하다가 뒤늦게 에이스를 투입한 2차전에서도 져 버렸다.
안 되려면 다 그렇게 꼬꾸라진다. 예전에 판타스틱 4를 보유했던 필리스도 포스트 시즌에서의 성적은 별로였다.
‘다저스 놈들이 원투펀치를 소모하고 올라왔어야 좀 편해지는 건데… 아무튼 이래저래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야.’
틱-
슬라이더가 잘 휘어졌다. 2구에는 타자의 배트가 주저 없이 나왔지만, 아웃코스로 멀어지는 공을 쫓아가 타격해 봐야 대개는 파울이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어때? 좀 다르지?’
레퍼토리를 좀 바꿨다. 원래 패턴은 초구와 비슷한 코스에 구속을 달리하든지 꺾이는 각을 조금 더 키운 공을 던졌을 테지만 이번엔 아예 구종을 달리했다.
범타를 유도하기에는 원래의 패턴이 아주 좋았다. 사람의 눈은 익숙한 것을 아주 잘 쫓지만, 새로운 형태를 파악하기 위해선 시간이 좀 필요하다. 그래서 앞선 공의 익숙한 이미지에 가까운 공에 조금의 변화를 섞어 타격을 유도한다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계산이 들어 있었다.
인위적으로 일종의 착시효과를 만드는 거다. 착시를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건 눈보다는 뇌 쪽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타격이라는 건 투구가 피치터널을 빠져나오는 순간 눈을 통해 받아들인 자극을 뇌가 무의식적으로 추론하여 공의 위치를 파악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정확히 공을 보고 때리는 그런 타격은 없다. 실제로 히팅이 이루어지는 곳은 눈으로 본 데이터를 기반으로 계산된 가상의 지점이다. 타자는 오랜 훈련을 통해 그런 식으로 공을 쳐낼 수 있는 스킬을 몸에 새긴다.
난 그 허점을 파고들었다. 초구로 타자에게 기본 데이터를 제공하고 동일한 움직임인 것 같은 시각적 느낌을 주는 2구를 던진다. 그렇게 실제와 다른 물리적 착시를 일으켰다. 그걸 실행할 수 있는 제구와 구질이 날 일반 투수와 다른 존재로 만들었다.
그건 대부분의 경우 아주 잘 먹혔었다. 하지만, 포스트 시즌 경기는 좀 다르다. 분석의 대상이 세밀화되고 타자들의 집중력이 달라진다. 아마 다저스의 에이스가 2차전에서 어이없이 털린 이유가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신중하게 생각하고 주위 사람들과 의논해 새로운 볼 배합의 패턴을 만들었다. 역시나 타자의 스윙궤도가 떨어지는 공을 노리듯이 나오다가 마지막 순간 억지로 배트를 비틀어 파울을 만들어냈다. 꽤 배트 컨트롤이 좋은 타자다.
타자가 타임을 요청하고 타석에서 벗어났다.
‘어? 당황하셨어요? 벌써 그러면 곤란한데…’
분석은 우리 팀도 한다. 전력분석팀이 다저스와의 지난 두 게임 데이터를 티끌 하나 빠짐없이 수집해서 나노 단위로 쪼개 살폈다. 게임을 계속 치러야 했던 컵스보다는 우리 팀의 여유시간이 월등하게 많았다.
‘자! 이제 궁금하지 않아? 이 다음에 내가 뭘 던질까?’
아마 컵스의 데이터에 의하면 3구는 60%의 확률로 몸쪽의 하이 패스트볼, 30%는 목적구 삼아 던지는 스트라이크 존을 완전히 벗어나는 브레이킹 볼, 10% 미만의 업슛쯤 될 거다. 이런 데이터가 타자에게 있다면 다음에 노려야 할 공은 당연히 패스트볼이다.
‘일단 업슛은 배제하겠지. 열 번에 한 번 던지는 공을 노릴 수는 없잖아. 그리고 느리면 대개는 빠지는 볼이니까 안 치고. 높은 공은 웬만하면 적극적으로 배팅.’
내가 타자라면 이렇게 판단할 것 같다. 배팅 범위를 최대한 좁혀서 한 방을 노리는 쪽으로 간다. 투 스트라이크이긴 하지만 날 상대할 때 볼카운트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건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그래서 오늘의 레퍼토리는 이것이다.
“스트라익. 배터아웃.”
느린 싱커를 마치 보통 투수의 커브처럼 스트라이크 존 상단에서 하단으로 떨어트렸다. 타자는 움찔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얼어붙은 채 공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10여 년 전부터 싱킹 패스트볼은 해마다 점점 던지는 투수와 빈도가 줄어가고 있었다. 이 추세는 멈출 기미가 없다. 현재 권장되는 것은 오버핸드의 팔 각도와 고회전 포심 패스트볼이다. 각 팀들은 이런 특징을 가진 유망주를 찾고, 팜에서는 어린 투수들에게 고회전 패스트볼을 더 자주 던지도록 훈련하고 있다.
한때 변형 패스트볼이 득세하던 시절이 있었다. 타자들의 스윙 메커니즘이 바뀌면서 뜬공이 아주 위험해졌다. 타구가 뜨면 홈런이 될 가능성은 해마다 높아져갔다. 그때는 땅볼 유도가 해결책이라 믿어졌다. 그런데 왜 요즘은 권장되지 않을까?
10년 전 통계에 의하면 임의로 설정한 100번의 타석에서 100개의 뜬공을 만들어냈다고 가정하면 리그 평균 선수는 7득점 정도의 손해를 보게 될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 시점에서 1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평균 대비 2점이었다. 이것을 타고투저 현상의 이유라 하기도 한다.
뜬공이 노다지가 되었다고 라인드라이브 타구와 땅볼의 가치가 변하지는 않는다. 다만 뜬공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달라졌을 뿐이다. 타자들의 스윙은 점점 더 변형 패스트볼을 띄워 내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뜬공이 홈런이 되는 확률은 높아졌고 그래서 안 던진다.
간단하다. 과거에 통했던 희소성이 현재에는 상대적으로 흔해졌다. 이 사이클은 주기적으로 교차된다. 그래서 나 같은 투수가 이 리그에서 대접받을 수 있게 된 거다. 지금은 이런 식의 싱커를 던지는 투수는 아주 드물다.
‘가위바위보 게임 같은 거지.’
상대 예측을 한 번 뛰어넘었다고 항상 그러리라고 예단할 수는 없다. 다만 상대의 계산을 복잡하게 만들 수는 있다. 단순한 하나의 가능성일지라도 늘어나면 타자의 머리는 더 어지러워진다.
‘아마 1번 타자가 전달을 잘했을 거야.’
1번 타자의 임무는 타격만이 아니다. 전초병의 역할이 더 크다고 할 수도 있다. 최대한 공을 많이 보고 투수의 컨디션이나 볼 배합 등의 자료를 업데이트한다. 지금쯤 내 볼 배합 패턴이 다르다는 건 상대 팀 벤치에 알려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