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갬블의 속성
“누가 올라오면 좋을까?”
“어느 팀이든 상관없지 않아?”
이번 시리즈 시청을 위해 TV를 새로 구입했다. 그리고 그걸 핑계 삼아 우리 팀 선수들 몇에게 같이 플레이오프 경기를 보지 않겠냐고 집으로 초청해 이 자리가 만들어졌다. 동계훈련 멤버들이 그대로 모였다. 확실히 기혼자들은 바쁘다.
맥주와 스낵 대신 천연 암반수가 테이블에 놓였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불만이 없다. 올 시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았다.
이제 불구경과 싸움구경을 할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이왕이면 정정당당한 승부보다는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진흙탕의 개싸움을 기대한다. 그들의 불행은 곧 우리의 행복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그것이라는 말은 어릴 적부터 드문드문 들어왔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남의 불행을 보고 즐긴다는 건 대개 부정적인 감정을 남기기 쉽다.
스포츠를 핑계 삼아 하는 이런 이벤트에서 은밀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건 그나마 긍정적인 쪽에 가깝지 않을까?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화면이 생동감 있게 그라운드의 곳곳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 불씨는 불이 되어 관중석에서부터 번져나가고 있었다.
“난 누가 되었든 세 게임 하고 올라오면 만족해.”
“만약에 컵스가 그 케이스면 좀 곤란하지 않겠어?”
“컵스가 다저스를 어떻게 이겨? 1, 2 선발 없이 역대 와일드카드 최고 승률팀을 이긴다고?”
“나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지.”
컵스는 3위와 승차 없는 와일드카드 2위를 했다. 잘못했으면 타이 브레이크게임까지 치러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지만 2, 3위 두 팀이 와일드카드 획득 조건을 충족했기 때문에 따로 원게임 플레이오프를 치르지 않고 정규 시즌 상대 성적에 따라 와일드카드 2위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컵스는 정규 시즌 막판까지의 순위 다툼으로 전혀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정규 시즌 마지막 두 경기에서 1, 2 선발을 모두 소모해버렸다.
“다저스가 절대 우세이긴 한데 걔네들도 고민 좀 될걸. 선발을 덜 소모하고 이겨야 디비전 시리즈에서 그래도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지지.”
다저스가 만약 이긴다면 디비전 시리즈에서 우리 팀을 상대해야 한다.
“난 다저스에 한 표. 다저스가 올라왔으면 좋겠어. 걔네들이 편해. 작년에 우리가 만약 메츠를 이겼다면 디비전 시리즈에서 우리를 만난 팀은 머리 좀 아팠을 거야. 올해 우리 팀은 그런 경우가 없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꾸역꾸역 이기고 올라온 팀은 골칫덩어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다저스 애들도 어떻게 생각하면 좀 불쌍해. 그 승률을 하고도 플레이오프부터 올라와야 하잖아. 이겨도 바로 우리와 붙어야 하고…”
내셔널 리그 승률 2위를 놓고 메츠와 카디널스가 엎치락뒤치락하다 결국 시즌 107승 한 메츠가 한 게임 차이로 디비전 시리즈 직행권을 손에 넣었다. 이 일은 꽤 심각한 논란을 만들어냈다.
“다저스가 한 게임 더 이겼으면 진짜 말 많았을 것 같네. 지금도 제도를 바꿔야 하니 뭐니 말 많은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디비전 시리즈에 직행한 팀보다 와일드카드 팀이 승률이 높아지는 상황이 된다. 리그 전체 승률 2위가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하는 묘한 장면이 나올 뻔했다.
사실 다저스가 마음만 먹었으면 한두 게임 더 이길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에 106승만 한 거다. 지구 우승은 일찍 물 건너갔고 와일드카드 순위도 거의 확정적이었다. 그래서 그들도 주전들에게 휴식을 줘 가면서 포스트 시즌 준비한 결과였다.
“어떤 제도든 다 장단점은 있어. 제도가 잘못된 게 아니라 사람이 문제인 경우가 대부분이야. 올 시즌 상황이 특별했을 뿐이라고.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사람들의 머리가 이상한 거라고 생각해. 그런 논리로 지금 룰을 바꾼다면 바꿔서 또 좀 이상한 일이 생기면 다시 바꿔야 하는데 그게 말이 돼? 그래 가지고 전통 같은 것이 어떻게 생기겠어. 기존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제도 운용에 융통성을 주는 것이 맞다고.”
“아이고, 이 사람. 자네 야구 할 사람이 아니었구만. 아무래도 자네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지금이라도…”
“푸하하. 그래? 은퇴하면 천천히 한번 생각해 보지.”
오늘부터 다저스가 홈에서 컵스와 2연전을 가지게 되고 중부지구 우승팀 카디널스와 와일드카드 3위 말린스가 맞붙는다. 아메리칸 리그 경기도 있지만, 아직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다저스와 컵스전의 승자가 디비전 시리즈에서 지구우승팀 중 승률이 가장 높은 우리 팀과 카디널스와 말린스전의 승자가 2위인 메츠와 맞붙게 일정이 잡혀 있었다.
“자! 이제 걸어야지. 그냥 보면 재미없잖아.”
‘로저스 이놈은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냐? 타짜의 말로는 비참한 것 모르나?’
도박 좋아하면 패가망신한다. 우리 어머님 말씀이다. 그리고 세상에 부모 말 듣는 자식은 희귀하다.
‘아닌 것 같아? 이건 증명이 쉬워. 왜냐하면 만일 그랬다면 우리 사회 직업인의 대부분이 의사나 변호사였을 테니까.’
“좋지 좋아. 난 무조건 So 반대편에 걸 거야. 쟤는 자기 야구는 잘하는데 남의 야구는 잘 모르더라구. 내가 예전 메츠하고 레인저스가 월드시리즈에서 붙었을 때…”
‘아니, 그게 언제 적인데… 그걸 또 우려먹어?’
베그웰이 2년 된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그래? So. 먼저 찍어. 선택의 기회를 줄게.”
“아니, 로저스. 베그웰의 그 말이 믿어진다는 거야?”
이건 말이 안 된다. 베그웰은 그렇다 쳐도 왜 다른 애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동조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기분이 싸하다.
“니들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나중에 어디 가고 싶었는데 내가 먼저 선택해서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말 하기 없기다.”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겠어?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뭘 걸지? 현금은 좀 그렇고 만약에 내가 이기면 저 TV를 날 줘. 같은 거 사 달라는 거 아니야. 저걸 줘야 해. 난 뭐가 좋을까? 적당한 게… 이러면 되겠네. 내가 지면 이번 해 동계훈련 비용 내가 다 낼게.”
“뭐?”
로저스가 뭘 착각한 것 같다. 이건 조건이 너무 기운다. 초대형 TV가 상당히 비싸기는 하지만 전지훈련비용과는 단위가 다르다.
“그건…”
“너무 깊게 생각할 거 없어. 작년에 So가 다 썼잖아. 올해는 내가 내려고 했었어.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 져도 어차피 쓰려고 했던 돈 쓰는 게 되는 거고 이기면 TV가 거저 생기게 되잖아.”
뭔가 굉장히 독특한 계산법이다. 순간 이게 득인지 실인지도 구분이 안 간다. 동계 훈련비용은 올해도 내가 내려고 했었다. 연봉도 내가 제일 많이 받고 그런 것을 떠나 베그웰만 빼면 다 동생들인데 그런 건 형이 내주는 게 모양새가 좋다. 알버트 같은 애는 아직도 최저연봉을 받는데 나눠 내자는 말은 못한다.
‘지면 TV 하나 날리는 거고 이기면 올겨울 지출이 없어지는 거네. 이게 맞나? 아! 뭘 복잡하게 생각해. 이 정도면 일단 지르고 보는 거지. 승부에서 쫄면 지게 되는 거야.’
“콜.”
“고마워. So. TV 잘 쓸게.”
말이 너무 빠르다. 내가 100% 이긴단 보장은 없지만 이길 확률이 적어도 50%는 된다.
“너나 지고 나서 울지 마. 그래도 안 물러 줄 거야.”
“이제 선택해야지. 어디에 걸 거야?”
“두 게임 중 어디라도 상관없는 거야? 한쪽은 답이 너무 빤히 보이잖아.”
“난 상관없다니까. 어디든 빨리 찍어. 아니면, 선택권을 넘기든지.”
특정 팀을 선택하기엔 양심이 너무 찔린다.
‘흠. 가오가 있지… 내가 어떻게…’
“그럼, 다저스.”
난 객관적 데이터를 중시하는 실리파다. 현찰이 좋다. 훗날의 기약하는 세력 따위는 있으면 좋지만, 꼭 필요하지 않다. 난 싸움 구경하는 게 좋은 거지. 싸움하는 걸 싫어한다. 내 영역을 지킬 수 있으면 만족한다. 남의 것을 뺏고 싶지는 않다.
다저스는 내 성향에 맞는 선택이었다. 실제로는 리그 전체 2위의 승률을 가진 팀이며 상대 컵스의 원투펀치가 못 나오고 이런 건 살짝 참고만 했을 뿐이다.
‘말이 자꾸 길어지는 걸 보니 좀 찔리는 구석이 있긴 있나 보네.’
“좋아. 난 컵스야.”
로저스는 전혀 불안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 녀석이 진짜 돈을 내고 싶어서 일을 이렇게 꾸민 건가? 그냥 낸다고 하면 안 받을 것 같아서? 설마 뺀질이 로저스가 그럴 리 없는데…’
“하핫. 둘이 재미있게 노네. 두 게임이니까 한 게임 남았잖아. 그 게임은 나하고 해볼 생각 있어? 아니면 엎어서 한 번에…”
베그웰이 도발을 한다.
“조건이 뭐야?”
“나도 TV가 가지고 싶은데…”
베그웰이 악당 같은 눈빛으로 느끼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이것들이… 돈도 많은 녀석들이 하나 사면 돼지. 남의 테레비를 왜 이렇게 탐내는 거야.’
“베그웰. 저건 안 돼. 내가 먼저 찜했어. So. 베그웰과 내기에 걸 물건 중에 저건 좀 빼줘.”
정말 이상한 일이다. 왜 별것도 아닌 물건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야! 무슨 일이야. 별것도 아닌 물건 가지고… 저게 내가 모르는 뭐라도 되는 거야?”
사실 내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베그웰은 물질적 탐욕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한창 어려웠던 시절 나에게 가장 많이 베풀었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그도 별로 넉넉하지 않았었다. 나보다는 나았지만, 그도 메이저리그 최저연봉을 받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럴 때 나누는 건 쉽지 않다.
“음. 별 이유는 없는데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남의 사과가 더 맛있다 쯤 되겠네.”
“뭐? 하! 로저스 너도 그런 거야?”
로저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것들이… 사람을 놀려. 정말 킹 받네.’
얘네들은 자신들이 무조건 이긴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약 오를만한 조건을 건 거다. 그냥 꼬마들이 죄의식 없이 잠자리의 날개를 떼거나 가만히 있는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는 심리 같은…
‘깊은 뜻은 개뿔. 내가 진짜 열 받는 걸 보고 싶은 거냐?’
“하핫. 그래? 어차피 반반인 승부를 가지고 너무 자신 있는 거 아냐? 그럼 내가 이기면 넌 뭘 해주려는 거야?”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깊은 빡침을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약올라 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먼저 열내면 지는 거다.
“네가 로저스에게 지면 동계훈련 비용을 낼 사람이 없잖아. 그러면 그거 내가 다 낼게.”
‘헐!’
정말 모욕적인 발언이다. 내가 다 이기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나 참! 그래 니들이 나눠 내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일 것 같네. 난 카디널즈.”
내 인생에는 오직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좋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 다 네가 좀 져봐야 아예 이런 일을 안 벌일 것 같아 미리 예방 차원에서 하는 일이니까. 예방주사 같은 거라고 생각해. 이 순간에는 조금 서운해도 뒷날 아주 감사하게 될 거야.”
그런 입에 발린 말 안 해도 된다. 카디널즈에는 현존하는 최고투구라고 하던 잭 플래티니가 있다.
‘물론 지금은 나지만.’
그는 2차전이나 3차전에 무조건 나올 수 있다. 다저스만큼 확실하진 않지만, 카디널스가 올라갈 확률이 훨씬 더 높다.
‘통계의 스포츠인 야구 예측을 감으로 하려고 하다니 이건 니들이 스스로 무덤 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