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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16화 (116/200)

116화. 끝이 좋으면 다 좋다 (2)

“그래?”

그의 챔피언십 시리즈 등판은 조금 뜻밖의 대답이었다. 시리즈별로 선발 투수를 나눠서 출전시킨다는 계획은 생각조차 못해봤다.

‘고참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건가? 하긴 이런 큰 경기를 경험이 모자란 존슨에게 전적으로 맡기기는 좀…’

“거기까지만 들었어. 월드시리즈 계획은 말 안 하더라구.”

따로 정해진 계획이 있을 수 있고 아직 미정일 가능성도 있지만, 아마도 누구라도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에서 부진하다면 월드시리즈에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리라는 건 확실하다.

“그런 계획이 있었다면 너도 등판 스케줄을 조절해서 포스트 시즌 준비에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야?”

“디비전 시리즈에 출전하지 않는다면 쉴 시간이야 충분하잖아. 너희들이 연승해주면 등판 간격도 딱 적당하고…”

나와 드로이넨 사이에 오고 가던 대화를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소르카가 이제야 끼어들었다.

‘무거운 주제는 피하더니 이런 이야기는 할 만하다 이건가?’

조금 얄미운 생각이 든다.

‘아니야. 이게 현명한 처신일 수도 있어. 책임질 수 없는 일에는 침묵이 답이겠지.’

역시 빅리그에서 자기 자리를 확실히 지키는 선수들에게는 이런 일상적인 부분에서도 배울 게 있다.

“그런 부분을 감독에게 물어보기도 했었는데 등판 스케줄 조정은 프런트의 계획이었다고 하더라고. 팀의 컨디션 사이클이 어쩌니 하면서 장황하게 설명을 하는데 사실은 감독도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그냥 알았다고 동의하고 말았어.”

프런트에서 경기에 이 정도까지 관여할 줄은 몰랐는데 꽤 깊은 부분까지 관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게 무슨 말이야? 팀 컨디션? 자세히 좀 말해봐. 도대체 프런트의 그 머리 좋은 양반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주 궁금하네. 그 사람들 생각은 어떨 때는 알다가도 모르겠어.”

소르카도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도 이해가 잘 안 되는 이야기인데 내가 이해한 건 한 달 정도 기간 동안 일정한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쉽지가 않으니까. 투수들의 생체 리듬을 다르게 해서 팀의 평균 전력을 일정하게 유지하겠다는 거야.”

모든 선수의 컨디션이 좋으면 아주 최상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반대의 시기가 있을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를 막아보자라는 발상이라고 한다.

“우리 팀 전력 평균치의 90% 수준의 팀과 보통의 컨디션으로 맞붙는다면 지는 확률은 희박하겠지만, 혹시 그런 최악의 상태로 붙는다면 질 수 있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잖아. 그래서 이렇게 투수들마다 미리 신체 사이클을 조절하는 거라고 들었어. 전에 강의 들었던 피에트로 코치가 그것 때문에 고용된 사람이라고 하더라고.”

“그래?”

솔직히 별걱정을 다 했네란 생각밖에 안 든다. 변수를 없애고 싶어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냥 지금 전력으로 또박또박 밀어붙여도 단판 승부가 아닌데 도저히 질 것 같지가 않다.

‘괜한 걱정으로 팀의 최다승 기록 달성만 어려워졌잖아. 지금 이게 무슨 꼴이야.’

이제 현재 상황 파악이 좀 된다. 프런트는 기록이니 뭐니 별 관심 없는데 감독 생각은 좀 달라서 어떻게든 오늘 게임을 이겨보려고 하는 것 같다.

“이틀 치 불펜을 내일 하루에 다 붓고 싶은가 보네. 마지막 게임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드로이넨에게 맡기고.”

소르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을 것 같아. 내 생각도 그래. 오늘 왜 이렇게 무리한 투수 운용을 하나 했더니… 감독이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은 아니었나 보네.”

머릿속에 전체 그림이 좀 그려진다.

“만약에 오늘 경기를 져버리면 상황 참 웃기게 되겠네.”

이해보다는 짜증이 났다. 얄궂은 생각이 든다.

“그거야 어쩌겠어.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건 아니잖아. 주어진 여건에서 나름 노력했지만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만약 그렇게 되면 마지막 경기 긴장감은 좀 떨어지겠지만, 그것 나름대로 맞춰서 던지면 되겠지.”

어쩌면 그편이 드로이넨의 컨디션 조절에는 도움이 더 많이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 팀의 8회말 공격은 점수 차를 더 벌리지 못하고 잔루 둘을 남긴 채 끝났다. 16대 14의 스코어는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다.

타악-

다시 안타를 맞았다. 파드리스의 2루 주가가 홈을 밟았다. 이제 스코어는 16:15이다.

“이거 오늘 게임 이길 수는 있는 거야? 어제 우리처럼 9회에…”

“입 닥쳐. 재수 없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선수들이 웅성이고 있었다.

“투수를 바꿔야 할 것 같은데…”

“누굴 올려?”

“불펜 투수들 중에 한두 명은 써도 괜찮지 않을까?”

확장 로스터로 올라온 선수들만 썼을 뿐 원래 우리 불펜 투수들은 그대로 다 남아 있었다. 아무도 몸을 풀고 있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감독이 알아서 하겠지. 우리가 떠들어 댈 일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답답하긴 한데 여기서 내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나라도 올라가서… 내가 몸은 좀 빨리 풀리잖아. 이럴 때… 어이구, 컨디션 조절 때문에 주전들 쉬게 하는 팀에서 허락해줄 리가 없잖아.’

“어?”

현재 메이저리그 30개 구장 중에서 불펜 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인플레이 구역(in-play area)에 위치한 구장이 딱 세 개 있다.

애슬레틱스의 링센트럴 콜리세움, 레이스의 트로피카나 필드 그리고 우리 홈인 오라클 파크다. 파울 구역 내에 있는 불펜으로 인한 사고가 몇 건 있었고 그 때문에 비난의 목소리가 많다고 들었다.

오늘은 불펜의 위치가 너무 마음에 든다. 거기 많이 익숙한 선수의 모습이 보인다. 그곳에 우리 스윙맨 보우덴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독이 칼을 뽑아 들었다. 이 경기 꼭 잡고 싶나 보다.

“됐어. 이제 시간만 좀 끌면…”

“어휴! 이렇게 낼 거 같으면 진작 좀 올리지. 정말…”

선수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다 들린다.

“좀 돌아왔지만, 지금이라도 바른길을…”

타악-

‘헐!’

장타를 맞아 버렸다. 파드리스의 1루 주자가 사력을 다해 뛰고 있다. 홈에 여유 있게 들어올 것 같다.

‘투수 뭐 하는 거야! 베그웰 이 자식아. 너라도 투구 템포를 조절했었어야지. 아! 오늘 포수가 베그웰이 아니지.’

오늘 베그웰은 지명타자로 출전했다. 오늘 얼마나 정신없는 게임이었는지 경기 중에 말 한 번 못 나눠봤다.

‘빌어먹을… 안 되는 날은 이래저래…’

동점에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가 갔다. 아직 원아웃이다. 경기는 아직도 끝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바로 투수가 바뀌었다. 교체 타이밍이 한 템포 늦어 버렸다.

보우덴은 몸이 덜 풀린 듯 바로 상대한 타자를 볼넷으로 출루시켰지만, 다음 타자에게 곧바로 땅볼 타구를 유도해 더블플레이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 냈다.

“진짜 9회 말까지 와버렸네.”

마지막에 주전 스윙맨까지 올리고서도 이 모양이라니 할 말이 없다. 한 템포만 미리 올렸으면 9회 말까지 올 것 없이 그냥 끝낼 수 있었는데 교체를 주저하고 끌다가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인가!.

지나가 버린 순간은 어쩔 수 없고 이제 한 점만 내면 이긴다는 걸 위안 삼으려 하지만 입맛이 몹시 쓰다.

“이제 타자들이 해줄 수밖에 없네.”

“그나마 9회 초를 동점으로 막아서 다행이야.”

모두 포도는 시다라는 말만 하고 있다.

‘요샌 종자 개량해서 단 포도도 많다고. 이솝이 살던 때와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타악-

“어?”

멍해졌다. 미처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과거와의 단절이 필요한데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9회말 첫 타자 크리스가 투수의 초구를 그대로 통타해 스플래시 히트(Splash Hits)로 만들어 버렸다.

“이거 뭐야?”

“뭐긴… 이긴 거지.”

바로 점수를 내버렸다. 한 시즌 홈런이 한 자릿수인 크리스가 낮 경기에 그렇게 넘기기 힘들다는 우측 담장을 넘겨버렸다. 실감이 안 난다.

“너무 허무한…”

“한 게임에서 17점을 냈는데 허무할 게 뭐가 있어.”

이미 그라운드에선 끝내기 홈런을 친 크리스와 선수들 간의 술래잡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 참! 이렇게도 이기는구나.’

시즌 115승째를 해냈다.

***

새로운 날이 밝았다.

정말 해낼 수 있을 줄은 스스로도 믿지 못했는데 어제 116승의 고지를 넘었다.

파드리스는 전날의 17점을 준 패배에 충격받았는지 주전급의 선발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우리 감독의 책략도 상당했다. 아껴둔 투수들을 총동원한 벌떼 작전으로 실점을 최소화하고 9회에는 애덤을 클로저로 출격시켜 게임을 끝내버렸다.

“좋다. 좋아”

불펜 포수는 연신 기합을 넣어가며 소리 내어 연습구를 받아 냈다.

“자! 마무리.”

펑-

깔끔한 소리가 났다. 드로이넨의 컨디션은 좋아 보였다.

“오늘 길게 던져야 할 텐데 괜찮겠어?”

물병을 건네며 슬쩍 길게 던지라는 압력 섞인 말을 함께 보냈다. 어제 우리 팀이 사용한 투수가 9명이었다. 오늘 드로이넨이 길게 던지지 않으면 경기 후반에는 무조건 밀린다.

“꼭 그렇지도 않을걸. 어제 우리 감독 하는 걸로 봐서는 확장 로스터 애들 연투고 뭐고 안 가릴 거야. 마지막 경기인데 이길 것 같으면 체이스라도 올리려고 들 것 같은데…”

“어제 애덤 쓴 것 때문에 프런트에서 뭐라고 했다는 말이 있더라고. 두 번이나 프런트 지침을 뭉갤 수 있겠어? 우리 감독도 따지고 보면 샐러리맨이나 다름없잖아. 그러기 어려울 거야.”

드로이넨이 슬며시 웃는다.

“니가 감독 성격을 잘 몰라서 그래. 라드 감독이 요즘은 얌전하지만, 현역 때는 성깔 깨나 있었다구. 그리고 최다승 감독이 되면 여기서 잘린다고 갈 팀이 없을 것 같아?”

‘응?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건가?’

“하핫. 너무 걱정하지 마. 오늘 게임 다른 사람 힘을 빌리고 싶은 생각은 없어. 파드리스 라인업이 확장 로스터로 콜업된 AA, AAA 선수들 중심인데 그런 애들에게 당하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어. 내가 이번 시즌 팀에서 조금 밀렸지만, 아직 괜찮다고.”

농담처럼 말하는데 내용이 의미심장하다.

“그래? 완봉이라도 해서 뭔가 보여주고 싶은 거야?”

“완봉까지는 잘 모르겠고, 완투 정도는 해내야겠지. 내일 신문에 신기록 관련 사진 자료로 내 얼굴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하핫. 잘해 봐. 응원할게.”

농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드로이넨을 알고 나서부터 그가 가장 길게 던지는 걸 본 것이 7이닝이었다.

‘정말, 이 동네 인간들은 감을 못 잡겠네.’

드로이넨은 자신의 장담처럼 9이닝 3피안타 1실점 완투를 해냈다.

‘우리 팀이 세긴 센 건가?’

좀 의문이 생긴다.

지난 일주일 이상을 펄펄 날았던 우리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주전 투수가 나오는 걸 의식했는지 귀신같이 게임당 4득점 하던 평균에 수렴하는 원래의 타선으로 복귀했다.

아주 좋은 시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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