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끝이 좋으면 다 좋다 (1)
타악-
“하아! 또 갔네. 대충 이쯤에서 좀 바꿔주지. 도대체 감독은 무슨 생각인 거야? 승리 투수 때문에 그러는 건가?”
이런 식으로 맞아 나가면 트라우마가 생길 수도 있다. 흘깃 돌아본 감독은 미동조차 없다. 팔짱 끼고 묵묵히 그냥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안 내리는 거야?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찬가지란 건가? 그래도 애를 잡으려고 들면 안 되지.’
“글쎄, 미구엘 쟤도 멘탈 하나는 죽이네. 지금 홈런 몇 개 맞은 거지?”
“다섯 개.”
소르카의 질문에 대한 답은 드로이넨에게서 나왔다.
‘이제 5회인데… 많이도 맞았네.’
작년 초에 한 게임에서 홈런 3개 맞고 그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생했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특정 코스의 공이 자꾸 맞으면 그쪽으로 공을 던지기가 아주 힘들다.
“한 게임 최다 피홈런 이런 기록도 있어?”
“그런 건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기록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투수의 공이 날리면 적당한 시점에서 교체를 하지 않겠어? 오늘 같은 경우는 아주 특별한… 음.”
드로이넨이 말을 이어나가다 멈췄다. 만약 좀 더 했으면 감독과 코치 스텝을 까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역시 드로이넨은 점잖은 사람이다.
“한 게임 팀 최다 피홈런 그런 건 있지. 2019년 시즌 백스와 필리스가 총 13개의 홈런을 주고받는 게임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100년 만에 나온 기록인가 그랬었어. 그때 백스가 8개를 쳤지. 그게 한 팀 최다 홈런이야. 그 게임이 양 팀 합해 최다 홈런이 나온 경기였고 그전엔 12개와 7개였었지.”
드로이넨이 억지로 말을 돌렸다.
“멘탈은 이미 탑클래스야. 공만 좀 받쳐주면 되는데… 이제 또 정면승부를 할 수 있을까?”
소르카도 짐짓 모르는 척 그에 대해선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미구엘의 투구 내용으로 화제를 돌렸다.
하비에르 미구엘. 탄탄한 체구의 우완투수다. 중남미 선수 특유의 유연성을 바탕으로 긴 익스텐션이 돋보인다. 공은 제법 빠른 편이다. 평속 93~4마일 정도.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커맨드. 문제는 빅리그에 콜업된 투수들은 개나 소나 다 이렇다. 이 정도가 기본이다.
“아무튼 저 동네 애들은 채프먼이 다 버려놨지. 웬만하면 스트라이드(stride, 보폭)를 다 저렇게 딛는다니까. 저러고 스트라이크를 넣은 게 신기할 지경이야.”
‘이젠 미구엘 투구 분석이야?’
2000년대 초반 통계에 의하면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평균 신장은 193cm 정도였고, 패스트볼을 던질 때의 릴리스 익스텐션 평균은 185~188cm. 신장 대비 익스텐션 비율은 96% 정도였다고 한다. 통상적으로 변화구를 던질 때 익스텐션이 조금 더 짧다.
2010년 쿠바산 미사일이 메이저리그에 나타나면서 선수마다 다양하던 익스텐션의 길이가 계속 길어지고 있는 추세다. 특히나 중남미 출신들은 하나같이 긴 익스텐션을 자랑한다.
“길면 좋은 점이 있긴 하지. 하지만 투구라는 게 종합적인 건데 스피드가 늘어난다고 커맨드가 떨어지면 그게 과연 좋아진 걸까? 미구엘 쟤만 해도 별거 없잖아. 100마일을 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채프먼을 따라 한다고 누구나 다 채프먼 같아지지 않는다는 걸 몰라.”
채프먼의 익스텐션은 226cm였다고 한다. 신장대비 120%에 가까운 말도 안 되는 수치다. 물론 그의 구속 비밀이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특별히 빨랐던 딜리버리 타임(Delivery time, 투구 때 팔을 휘두르는 시간)과 트위스트 앵글(Twist angle, 어깨의 회전각도) 등이 결합된 결과였지만 긴 익스텐션이 없었다면 110마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런 투구 메커니즘(mechanism)으로 저런 평속밖에 못 낸다면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어.”
소르카는 미구엘의 투구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 입장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었겠지. 중남미 유망주들이 메이저로 오려면 일단 스카우터 눈에 띄어야 할 거 아니야.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가장 좋은 게 구속이잖아. 그래서 보통 어릴 적부터 저런 투구폼을 선호하지. 내가 마이너에 있을 때…”
드로이넨이 나쁘지 않은 말로 좋게 표현은 하는데 그 역시 현재 미구엘의 투구가 X같다는 내용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참 냉정한 사람들이다.
‘애가 불쌍하지도 않아? 저렇게 애쓰고 있는데… 음. 감독이 미구엘에게 한계를 알려주려고 하는 건가? 야구 그만하라는 건가? 어쩌면 그게 맞는 길일지도…’
투구폼이 몸에 익고 나면 다시 고치기는 어렵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20살 때 고 감독을 만나 언더스로우로 변신한 건 큰 행운이었다. 선녀보살의 말처럼 조상의 음덕일지도 모른다.
미구엘은 5회 2사까지 5개의 홈런을 포함해서 도합 10개의 안타를 맞았다. 총 8실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넷이 없다. 그건 이렇게 맞아 나가면서도 진짜 꾸역꾸역 존에 공을 밀어 넣었다는 거다. 정말 대단한 멘탈이었다. 그 부분은 인정한다.
투수도 대단하고 그 투수를 안 내리는 감독은 독해서 더 대단하다. 정말 대단한 우리 팀이다.
‘이 와중에 10:8로 이기고 있는 이 팀은 뭐냐고. 정말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네.’
스트라익-
다시 존 안으로 공을 꽂아 넣었다.
“미친…”
“정말 강철의 사나이로군.”
이젠 소르카마저 감탄을 했다.
마운드에 버티고 선 미구엘이 다시 보인다. 모자를 눌러써 표정은 잘 보이진 않지만 어떤 것은 보고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에겐 비명이 들려오고 있었다. 소리도 없고 눈물이 보이진 않지만, 투수라면 느낄 수 있다. 그래도 그는 공을 놓지 않았다. 그는 존중받을 자격을 증명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고 말았을까?’
안타까운 현실이다.
볼-
바깥쪽 존을 보고 던진 것 같은데 훨씬 더 바깥쪽으로 공이 빠지며 볼이 됐다. 볼카운트는 원 볼 원 스트라이크.
‘슬라이더를 존 안으로 던진 것 같은데… 이젠 힘이 떨어져 제구가 안 되나?’
한계에 이른 것 같다. 투 아웃에 주자도 없다. 어찌 되었든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만 더 잡아 줬으면이라는 마음과 더는 마음 졸이며 보고 싶지 않다는 상반된 감정이 일어나 나까지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간다.
‘감독 놈아! 그만두라고, 이미 충분히 잘 던졌잖아. 이렇게까지 해서 얻는 게…’
타악-
“아악!”
‘빌어먹을… 또 넘어가는 거야? 하아! 정말 이러다 애 잡겠네. 응? 바람이…’
우리 홈구장의 우측 담장 바로 뒤는 바다다. 벽돌로 만들어진 우측 담장의 높이는 7.62m이지만 우측 폴까지 거리는 94m밖에 안 된다. 힘 있는 좌타자들이 잡아당기면 담장을 쉽게 넘길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오라클 파크는 파크팩터 96의 대표적 투수친화구장이다.
타구가 우측 담장을 넘어 맥코비 만이라고 부르는 바다로 빠지는 경우 이것을 스플래시 히트(Splash Hits)라고 부른다. 우측 담장에는 스플래시 히트를 집계하는 전광판이 있다.
‘왜 그러겠어, 그건 우측 담장을 넘기기가 겁나게 어렵다는 얘기지. 개나 소나 다 넘길 수 있으면 그런 거 하겠냐고.’
낮에는 해풍의 방향이 바다에서 육지로 분다는 건 상식이다, 맥코비 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상당한 강풍이다.
7m가 넘는 담장을 넘기려면 라인 드라이브 성의 발사 각도가 낮은 타구는 홈런이 되기 어렵다. 즉, 홈런이 될 만한 오른쪽으로 뜨는 타구는 낮 경기에서 해풍으로 인해 타구의 비거리가 줄어든다.
다른 구장에선 담장을 넘길 만한 타구가 오라클 파크에선 평범한 플라이가 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지금처럼.
오늘 우익수로 출전한 카스트로가 담장 바로 앞에서 플라이볼을 잡아냈다.
“우와! 잡혔네. 크크큭. 미구엘 애썼다.”
“야! 빨리 몇 점 더 내서 우리 루키 승리 투수라도 만들어줘야지.”
보통 투수가 들어온다고 해서 특별한 환영의식을 하지는 않지만, 오늘은 도저히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모두 비슷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이런 걸 감동이라고 하던가!
“미구엘 수고했다. 충분히 잘 던졌어.”
“So. 어… 다음 경기는 더 잘할 수…”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미구엘을 그냥 안아줬다. 포옹을 하는데 유니폼이 완전히 젖어 있었다.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네. 과연 다음 경기가 있을까? 응?’
이상한 생각이 떠올라 눈으로 감독을 찾았다. 내심을 알 수 없는 눈을 하고 서 있었다.
‘설마, 다음 회에 또 올리진 않겠지?’
다행히 미구엘은 5회를 끝으로 교체되었다.
‘또 올렸으면 감독이고 뭐고… 흠.’
그리고 다음 회인 6회에 바로 그의 승리 투수 조건은 날아갔다. 미친 타격전이었다. 8회 현재 16:14. 아직은 이기고 있다.
“팀 최다승 하려다 한 게임 최다 득점 기록을 세우겠네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왜? 그 기록이 한 100점 쯤 되나?”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30점이라서 거기 도달할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아.”
30점을 내려면 도대체 몇 명의 타자가 나서야 하는 건지 계산이 안 된다. 그러고 보니 야구 초창기에 그런 기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타이콥이 영구 출장 정지당해서 타이거스가 개판 친 경기 이야기 아니에요? 동네 사람을 선수 등록시켜서 시합을 하게 했다던데…”
“그건 24:2로 끝났었어. 역사상 한 게임 최다 실점 투수가 그 게임에서 나왔지. 앨런 트래버스라는 투수가 8이닝 26안타 7볼넷으로 24실점 했지. 30점 낸 건 2007년의 레인저스야. 상대는 오리올스. 내 생각엔 아마 탱킹에 관련된 경기였던 것 같아.”
“그래? 그런 일이 다 있었군.”
하긴 이런 게 정상적인 게임에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드로이넨. 정말 마지막 경기 등판 결정된 거야?”
“응.”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내 생각엔 마음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디비전 시리즈 등판 일정에 그의 이름은 빠져 있었다. 만약 5차전까지 가게 된다면 1차전 선발이 다시 등판하기로 되어 있다. 그건 아마 내가 될 것 같다.
‘로저스까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존슨에게까지 밀리다니…’
“하핫. 왜? 신경 쓰여?”
말 잘해야 한다는 건 아는데 이럴 때 어떤 말로 어떻게 대답해야 무리 없이 넘어갈 수 있는지를 모르겠다.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음. 솔직히 말하면 신경 안 쓰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괜히 말 돌리다가 더 이상해질 것 같아 그냥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다 내 잘못인데 어쩌겠어. 로저스보다 객관적 성적에서 뒤지니 이런 장면이 나온 거지. 거기에 대해서 난 불만 없어. 그리고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선발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디비전 시리즈를 3:0으로 이기면 1차전 선발을 맡기겠다고 감독이 그러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