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14화 (114/200)

114화. 차포 떼고 이기라니

올 시즌의 우리 팀은 전형적인 선발 야구를 하는 팀이었다. 부상 없이 5명의 선발투수 전원이 10승 이상의 승수를 기록했다. 존슨이 후반기에 조금만 더 승수를 추가했더라면 15승 이상도 가능할 뻔했었다. 4명이 15승 이상을 기록했지만, 존슨이 13승에 그쳤다. 선발 로테이션이 가장 이상적으로 돌아간 리그에서 거의 유일한 팀이었다.

“OK. 바로 이거지.”

“알버트. 작은 것도 상관없어. 살아나가기만 해도 된다고.”

아직 1회인데 모든 선수가 일어났다.

‘누가 보면 우리가 이기고 있는 팀인 줄 알겠네. 고작 안타 하나 쳐 놓고선…’

스코어는 3:0 우리가 지고 있다. 오늘 빅리그 선발 데뷔전을 하시는 우리 투수께서 1회부터 백투백(Back-to-Back) 홈런을 맞으며 3실점 했다.

“이제 시작이야. 별거 아니라고.”

“어제는 8점 차이도 뒤집었는데 겨우 3점이잖아.”

실점 당시 우리 팀 선수들에게서 나온 반응들이 이랬다. 며칠 사이 우리 팀컬러가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올 시즌 우리 팀의 승리공식은 역전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발투수의 안정적인 경기운영으로 초반 실점을 최소화하여 경기 시작부터 리드를 잡고, 그것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야구를 했었다. 그런데 지난 일주일은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았다.

대량실점과 역전, 재역전이 경기를 지배했다. 우리 팀의 시즌 평균 득점이 4점대인데 지난 7경기만을 따지면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 결과는 4승 3패. 아슬아슬 잘 버티고 있다. 아직도 기록 달성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다.

‘어휴! 기는 살아 있으니까 게임이 이대로 넘어가진 않겠네. 좀 불안한 면은 있지만.’

정규 시즌의 마지막 시리즈인 파드리스와의 홈 3연전의 시작이다.

“난 어제 8회에 이젠 끝이구나라고 생각했었거든. 이제 마음 비우고 진짜 신참들 경험이나 쌓을 수 있게 해주면 되겠다 싶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소르카의 말투와 얼굴만 보면 우리가 3:0으로 이기고 있는 것 같다.

‘다들 왜 이렇게 낙관적이 된 거야?’

어제는 3회까지 8:0으로 뒤져있었고, 8회에는 10:4였다. 그걸 9회 초 공격에서 타자일순하며 기어이 7점을 내고 역전했다. 어제는 완전히 광란의 도가니였다. 우리 팀이 마지막 회에 이 정도의 역전을 해낸 건 내가 있던 두 시즌 동안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정말 이러다가 마지막 시리즈 스윕이라도 해서 신기록 세우는 거 아니야?’

많이 어려울 거라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이 확 바뀌진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라는 마음이 조금은 생겨난 것 같다.

“베그웰이 오늘도 경기에 나간 걸 보면 안 빠질 모양이지? 이제 안정권인데 슬슬 좀 쉬어가면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야기 좀 안 해봤어?”

베그웰은 일주일 전만 해도 2리 차이로 뒤지고 있던 타율 선두 자리에 이틀 전 경기에서 올라섰다. 그리고 어제 경기에서 5안타를 터트려 0.343로 2위와의 격차를 3리 차이로 벌렸다.

시즌 종반 그 정도 차이라면 본인이 자살골을 넣는 상황만 만들지 않으면 뒤집히기는 아주 어렵다. 이제 시즌 종료까지 세 경기밖에 안 남았다. 무안타 경기를 한다든지 해서 자기 타율을 까먹지만 않으면 타율 1위는 99% 확정이다.

“왜 안 했겠어. 했지. 그런데 남은 경기 다 출전하겠다고 하더군. 이 시리즈 3연승 해서 구단 신기록도 세우고 본인도 200안타를 채우고 싶대…”

“뭐? 못 칠 걱정은 전혀 안 드나 보지? 하긴 지금 투수들이 좀… 음. 200안타는 많이 모자라는 것 아니었어? 지금 몇 개지?”

“195개.”

“많이도 쳤네. 하긴 요 일주일 미치긴 했었지.”

베그웰은 지난 7경기에서 20안타를 쳐냈다. 45타석 40타수 20안타다. 타율 5할이다. 사람의 기록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어제 전까지는 인간적이었다. 39타석 35타수 15안타였으니 고타율이긴 해도 사람 같아는 보였다. 그런데 어제 5안타 1볼넷 8타점 경기를 해버렸다.

타악-

“미친… 또 쳐?”

“크리스 달려.”

2번 알버트의 진루타로 1사 2루의 상황에서 3번 베그웰의 적시타가 터졌다. 넉넉한 2루타였다. 2루 주자였던 크리스가 느긋하게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이제 3:1이다. 그리고 다시 1사 2루다.

‘시작부터 이러는 거 보니까 오늘도 한두 점으로 승부가 나지는 않겠어.’

우리 팀과 상대 모두 요즘 시즌을 지탱하던 주전들로 경기를 치르지 않는다. 우리는 포스트 시즌을 대비해서 선발투수들을 쉬게 했지만, 파드리스는 탱킹(Tanking) 중이다.

이번 시즌 우리 지구의 순위는 일찍 가려져 버렸다. 역대급 승률의 우리 팀과 다저스에 눌려 다른 팀들이 힘을 못 썼다. 우승에서 멀어지고 와일드카드 경쟁에 낄 수도 없는 팀이 가야 할 길은 하나뿐이다.

우리는 팀 최다승 기록 때문에 지금 1승의 의미가 남다르지만, 파드리스는 이겨봐야 아무런 이익이 없다. 그럴 바에는 티 나지 않게 져서 내년 드래프트 앞 순위라도 받는 게 득이다. 확장 로스터로 신예들을 불러들인 지금이야말로 하위권 팀들의 탱킹이 성행하는 시기다. 신예들에게 경험을 주겠다는 명분을 가지고 훗날의 대박을 노리는…

포스트 시즌이 확정된 팀의 베그월과 같은 핵심주전이 마지막까지 이렇게 악착같이 뛰는 건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다.

‘와일드카드 시리즈 기간에 3일 정도는 쉴 수 있을 테니까 힘닿는 데까지 해 봐. 하고 싶은 건 해야지. 어쩌겠어.’

나도 벤치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2루를 딛고 선 베그웰의 모습이 즐거워 보인다.

“레블론. 동점 가자.”

4번 타자가 타석에 서자 다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고작 두 점 뒤졌을 뿐이다.

***

자이언츠의 웨이드 라드 감독은 오늘 경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있었다.

“하긴 오늘만 이런 건 아니지.”

그동안 얼마나 편한 야구를 해왔었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지금 선발이고 불펜이고 간에 답이 나오는 투수가 없었다. 선발 5이닝은 맡길 수 있겠다든지 계투로 한두 이닝 정도는 2점 미만으로 막아주겠다라는 믿음을 주는 투수가 없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4승 3패를 하긴 했지만 그건 앞 세 게임을 로저스, 존슨, 드로이넨이 차례로 잡아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경기 역시 그들이 물러난 후반에는 꽤나 고생을 했었다.

주전 선발들이 로테이션에서 빠지고 난 다음부터의 경기만 생각하면 실제로는 1승 3패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제의 대역전승이 아니었다면 전패를 당할 뻔했다. 역시 주전 선발과 핵심 불펜 자원 없이 경기를 이기긴 어렵다.

“오늘도 어떻게 앞이 좀 보이기는 하는 것 같은데…”

시작하자마자 몇 점 주긴 했지만, 다음 공격에서 바로 따라붙고 있는 중이다. 불펜을 믿을 수가 없으니 타선에 기대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에도 감독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었던 경기들이었다. 작전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전체 그림을 볼 수 있어야 세울 수 있다.

도대체 상대 타선을 저지할 수 있는 선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무슨 작전 야구를 할 수 있을까. 잘 모르는 건 안 건드리는 게 낫다는 마음으로 몇 경기 그냥 지켜보고만 있었다.

“오늘도 잘 치기는 하는군.”

포스트 시즌에서 계속 이렇게 치긴 어렵겠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안 되면 버틸 수 없는 비상 상황이었다. 지난 몇 게임을 오직 선수들의 개인 능력과 임기응변으로 임했다. 감독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게임들이 아니었다.

“경기 초반부터 투수들이 혼나는구만. 우리 유망주 풀이 많이 비긴 했어. 그래도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이야.”

라드 감독이 한탄하듯 리우드 투수코치에게 속삭였다.

“작년에 So와 베그웰을 데려오면서 콜업할 만할 투수 자원들을 소모했고, 올해 카스트로 건으로 프럿코에 AA 투수 둘까지 보내면서 다시 또 팜을 털었죠. 우리가 해마다 유망주를 주워 담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팜이 채워지려면 앞으로 몇 년은 필요할 겁니다. 인내의 시간이 되겠죠.”

리우드 코치의 대답은 무거웠다. 감독이 몰라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상대 투수를 보고 있자니 우리 사정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 답답했었다.

“음. 여기서 상대 투수를 더 흔들어야 할 텐데… 루키는 기세를 타기 전에 망가트려야 해.”

안타까운 마음은 마음이고 지금은 경기 중이다.

“레블론과 필로 이어지니까 알아서 잘할 겁니다.”

타격 코치가 슬쩍 끼어들었다.

“상대 투수의 패스트볼에 초점을 맞추라고 이야기를 해 줬습니다. 루키가 우리 팀 타선에 바싹 긴장해서 나왔을 텐데 변화구로 승부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겠지. 그게 되면 루키 레벨은 아닌 건데 그것까지 걱정하면서 이런 게임을 어떻게 치러내겠어.”

타악-

“크다.”

“갔어요.”

레블론이 투런으로 맞불을 놓았다. 순식간에 동정이 되었다.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돌발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라드 감독은 나오려던 한숨을 억지로 삼키며 투수 코치를 찾았다.

“미구엘은 괜찮나?”

미구엘은 오늘 자이언츠의 선발 투수였다.

“예? 그게 무슨…”

“1회 홈런 두 개에 의기소침해하는 그런 간 작은 놈은 아니겠지? 아까 보니까 패스트볼은 나름 괜찮아 보이던데…”

“마음이 좋지는 않겠지만, 그의 고향은 베네수엘라입니다. 그에게는 물러날 곳이 없어요. 용감하게 맞설 겁니다. 공은 보셔서 알지 않습니까. 아직은 그것만 괜찮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어서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콜업이 좀 일렀지요. 좀 더 묵혀야 하는 선수인데…”

라드 감독은 그 뒷이야기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헝그리 정신이 있다는 거로군. 어떻게 버텨내긴 하겠군. 음… 이렇게 하세나. 미구엘에게 오늘 80구까지는 내리지 않는다고 말해주게 10점을 주어도 안 내릴 거야.”

“그건 너무 무리한 말씀이십니다. 잘못하면 트라우마가 생길만한 일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특별한 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견딜만한 선수라고 한 건 뭐였지? 어려운 일이란 건 알아. 하지만 본의든 아니든 황야에 나왔으면 비바람을 견뎌내야 본인도 무엇이든 얻어갈 것 아니겠나. 견뎌보라고 해. 승부를 피하지만 말라고 하게.”

“그렇게 무리해서 뭘 얻으시려고 하는 거죠?”

“오늘 이겨도 내일 지면 아무 소용없잖아. 그 반대가 되어도 마찬가지이고. 오늘은 좀 어렵게 가자고. 이대로 그냥 가면 두 경기 다 어정쩡한 전력일 뿐이야. 오늘 최소 숫자의 투수로 이길 수 있다면 내일은 물량을 쏟을 수 있잖아. 어제 승리의 기세를 한번 이어 가보자고. 오늘도 타격감은 괜찮은 것 같아. 분위기 좋을 때 승부를 한번 걸어봐야 하지 않겠나?”

미구엘이 상대 타선을 감당하지 못해 투수를 바꾼다고 해도 바뀐 투수가 꼭 막아내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현재 공은 미구엘이 가장 좋았다. 그래서 그가 오늘 선발이다.

오늘 미구엘이 많은 실점을 하더라도 이닝만 적당히 먹어주면 상대적으로 내일 투수 운용이 좀 수월해지긴 한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투수 코치는 내심 동의했다.

“오늘은 어제보다 시작이 더 좋군. 타자들이 충분히 점수를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라드 감독은 이어지는 자이언츠의 공격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타자들이 초반부터 정타를 맞춰내고 있다는 것은 상대 투수도 별 볼 일 없다는 뜻이다. 라드 감독의 눈에는 타격전으로 맞서도 오늘 충분한 승산이 있을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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