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기우제의 이유
“선발 투수가 5이닝을 소화하는 것과 9회 이닝을 완투하는 것은 피로도가 다르겠지요.”
‘이건 뭐 하자는 거야?’
말해야 아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너무 지극히 당연한 상식의 범주에 들어간다. 선발투수들을 대상으로 트레이닝 관련 강의가 있다고 해서 몸 풀다 모였는데 이렇게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나 트레이너요라고 광고하듯 단단한 몸매를 소유한 내 또래로 보이는 젊은 친구 하나가 잘 알아듣기도 힘든 발음으로 한 이야기가 이런 거라니 억지로 귀를 기울이고 집중하던 내가 순간 바보가 된 것 같다.
“말을 좀 바꾸어보겠습니다. 5이닝을 던져 5실점 패전했고 9이닝 완봉승을 했습니다. 피로도는 어느 쪽이 높을까요?”
“응? 그건…”
이건 좀 애매하다. 나 같으면 5이닝 패전 쪽이 더 피곤할 것 같다. 육체적 피로도는 젖혀두고 마음이 불편해 하룻밤 정도는 잠을 설칠지도 모른다.
“제가 이런 예를 든 것은 피로라는 게 단순히 육체적 운동 강도로만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육체적 피로의 원인은 체내에 피로물질이 쌓이기 때문이라는 피로물질설, 외부에서 가해지는 스트레스에 의해 호르몬 대개는 부신피질(副腎皮質) 호르몬에 의한 조절기능이 이상을 일으킨다는 스트레스설, 장기나 조직 간의 유기적인 활동에 혼란이 일어나 생기게 된다는 기능실조설(機能失調說) 등 여러 주장이 있지만, 저는 이런 요소둘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리적 문제는 아드레날린의 분비에 영향을 미치고…”
‘제법 논리적으로 말을 잘하네. 역시 구단에서 아무나 섭외했을 리가 없지.’
“그래서 단순히 소화한 이닝 수를 기준으로 진행하는 회복훈련은 실제 몸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타당성 있는 말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럼 그 기준을 어떻게 정해야 된다는 겁니까?”
로저스다. 아무튼 저 녀석이 제일 참을성이 없다. 투구할 때 보면 그렇지 않은데 일상에선 행동이 천방지축이다.
‘인내를 가지라고. 어련히 알아서 답을 말해 주지 않겠어? 해답 없이 이런 강의를 할 리가 없잖아. 상식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어?’
상식이 씹혔다. 저 트레이너는 나와 다른 세상 사람인 것 같다. 아니라면 저쪽 세계의 상식이 다르거나…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개인차가 너무 커서 도식화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발투수가 3이닝 던지거나 4이닝을 던지는 것은 피로도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선발투수의 1이닝과 클로저의 1이닝은 분명히 차이가 있겠죠.”
답이 없다면 문제 제기를 왜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 될 수도 있는데….
“방어기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심리학 용어인데 자아가 불안을 해소하고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보통은 막대한 스트레스가 주어졌을 때 저절로 발동해 완충제 역할을 하죠. 급작스럽게 상처가 커지는 것을 막고 천천히 치유시키기도 하지요.”
이젠 심리학까지 와 버렸다. 이건 좀 안다. 한때 몸으로 직접 겪었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곳이 있다.
“현실에서 우린 미래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통은 어떤 상황에 대한 대비가 어렵습니다. 일상에서는 너무 광범위하고 도식화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나죠. 교통사고 같은 걸 예견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우린 야구라는 경기를 합니다. 도식화시킬 수 있는 상황이 주어집니다. 100%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 경기 내에서 대개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미리 알고 있습니다.”
그건 맞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느 경기나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
“그래서 예상되는 상황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루틴을 미리 만듭니다. 방어기제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치를 인위적으로 선택하는 겁니다. 만루 상황입니다. 홈런을 맞았어요. 이때는 어떻게 할까 이런 약속을 미리 정해 놓는 겁니다. 보통은 어떻게 하시죠?”
강사가 설명을 하다말고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개는 그런 상황에선 강판되죠. 뭘 하고 말고 할 게 있겠어요? 아주 열 받으면 벤치 의자나 걷어차겠죠.”
“크크큭. 로저스. 그동안은 왜 그러지 않았지?”
“그러면 드로이넨이 엉덩이를 걷어찰지도 모르니까 미리 조심한 거죠.”
“하핫. 그것도 일종의 방어기제인 건가?”
나는 만루홈런을 맞은 적이 없어서 아직 잘 모르겠다.
“그렇죠, 그런 게 방어기제인 겁니다. 의자를 걷어차는 것보다 좀 더 능동적 대처가 가능하도록 루틴을 만드는 겁니다. 이렇게 하면 스트레스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게 되죠. 피로도를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경험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득 되는 게 뭐죠?”
소르카였다. 역시 에이스의 무게감이 다르다. 질문으로 정확한 핵심을 짚어 낸다.
“소위 말하는 컨디션의 급작스런 하강을 막을 수 있죠. 신체 사이클이 있다는 건 누구나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 정확히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신체에 가해지는 스트레스의 강도나 빈도가 줄어들면 컨디션의 상승과 하강 곡선은 완만해집니다.”
뭔가 사짜 같은 느낌의 말인데 논리적으로는 뭐라고 딱히 흠을 잡기가 어렵다.
“자! 이제 구체적으로 그 루틴에 대해 설명하자면…”
강사의 말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저기… 소르카. 저 말이 믿어져?”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옆에 있던 소르카에게 소곤거렸다.
“해서 손해될 건 없을 것 같은데…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과 비슷한 것 같잖아.”
내 생각도 비슷한데 종류가 좀 다르다. 예전 엄마하고 선녀보살 아줌마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이라고나 할까.
***
“진짜 이렇게까지 밀어붙일 줄은 몰랐군요.”
해리스 사장은 거침없이 일을 진행시켰다. 피에트로를 인스트럭터로 구단에 합류시켰고 급기야 오늘 선발투수들을 불러 모으기까지 했다.
“시도해 보기로 했으면 하는 거지. 돌아보고 할 여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제 포스트 시즌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어요. 잘되지 않아도 최소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윌리스 단장도 동조했었다. 뭔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선에 위치한 이론 같은 느낌에 찜찜함은 있었지만,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좀 아쉽지는 않으세요?”
“뭐가요?”
“마지막에 등판 간격을 조절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우리 선발들 등판횟수를 줄이겠다는 말이나 같은 건데 그렇게 하면 팀 최다승 기록 수립이 어려워질 수도 있잖습니까.”
“거기 목을 맬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그건 하면 좋은 거지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전 2001년의 매리너스 꼴이 나고 싶지 않습니다.”
2001년 매니너스는 현 체제에서 오직 한 번뿐인 시즌 116승을 해냈지만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양키즈에 패배했다.
“그때 매리너스의 라인업은 화려했었지요. 이치로가 신인왕, 골든글러브, 실버슬러거 거기다 MVP까지 차지했었고, 에드가 마드티네스, 브렛 분으로 대표되는 막강 타선과 프레디 가르시아, 제이미 모이어, 애런 실리 등 선발진도 대단했죠. 사사키가 마무리로 버틴 불펜까지 어디 하나 빠질 게 없는 팀이었죠.”
“그해 올스타만 8명 나온 팀이었으니 더 말해 뭐 하겠습니까. 그때 사장님은 상당히 어렸을 텐데도 상당히 잘 기억하고 있군요.”
거의 30년 전 일이었다.
“10대였죠. 너무 충격적인 팀이었어요. 지지 않는 야구팀이라니… 열광했었죠. 음. 요즘 우리 팀과 그 팀을 자꾸 비교해 생각하게 됩니다.”
“혹시 우리 팀의 구성을 그 팀을 생각하고 계획했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요?”
단장의 농담에도 사장은 웃지 않고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죠. 아무튼 지금 우리 팀은 그 팀에 비교할 만한 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판단해보면 당장의 전력이 2001년의 매리너스를 뛰어넘었다라고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최소한 우리 선발진은 좀 낫지 않을까요?”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향후 한두 시즌만 지난다면 더 나을 거라는 확신은 있습니다. 우린 젊은 팀이니까요. 투수진뿐만 아니라 타선도 함께 성장할 거라고 믿습니다.”
충분히 공감이 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매니너스조차 월드시리즈에 올라가 보지도 못했었죠. 우리 팀의 최다승 기록, 물론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월드시리즈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힘을 집중해 준비해야 한다면 저의 선택은 당연히 월드시리즈를 바라봐야겠죠.”
메이저리그의 각 팀의 전력 차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특히나 와일드카드 경쟁을 뚫고 올라올 만한 팀이라면 다들 만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승률 6할이면 우승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걸 뒤집어 생각해보면 하위권의 팀도 4할의 승률을 가지는데 지구 우승을 하거나 와일드카드를 얻어낸 팀들을 얕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강팀과 약팀의 구별은 여전하지만 포스트 시즌 진출팀의 전력 격차는 많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약하다고 규정된 팀들은 뒷생각이 없지요. 오늘 한 게임 이길 수 있으면 다음 시리즈를 생각하지 않고 전력을 쏟아부어 버리죠. 저는 포스트 시즌에서 상대적 약팀이 가끔 강팀을 탈락시킬 수 있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지요. 각종 변수가 개입하기도 하지만 그게 무섭다고 이것저것 가리다간 결국엔 계속 이겨나가기가 힘들어지지요. 대개 승리하는 팀은 승리에 대한 갈망이 큰 팀입니다.”
사장은 옳은 방향을 잡고 있었다. 단장에게 희미하게나마 남아있던 한 줄기 의구심조차 남기지 않는 명쾌한 답변이었다.
“저도 컨디션 조절 어쩌고 하는 말에 허황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가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가 우승하기 위해서는 4번의 시리즈를 계속 이겨야 하는데 우리 선발투수들을 지쳐 빠진 상태로 포스트 시즌에 데려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건 애초에 우승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요.”
“원래도 휴식시간을 보장해 줄 생각이었다는 건가요?”
“예.”
건의를 해볼까 단장은 몇 번의 망설임을 가졌었다. 생각은 빗나갔지만, 단장은 흐뭇했다. 노인네의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해졌다.
“허헛. 이것 참! 한 방 먹은 느낌이군요, 그랬던 사람이 팀 최다승을 노래를 불러?”
“그걸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린 투수력만 강한 팀이 아닙니다. 우린 팀으로 강합니다. 몇몇 선수에 의존하는 팀이 되어서는 곤란하죠. 물론 막강한 우리 선발진이 계속 나와 준다면 계속 이길 가능성이 아주 높겠지만 대체선발을 쓴다고 꼭 지란 법은 없지 않겠습니까?”
사장은 두 마리의 토끼 중 어느 한 마리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기록 달성 가능성은 낮지 않다고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