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중요한 것
“패스트볼 계열은 레드닷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더군. 포심이 변형 패스트볼 계열보다 어둡게 보인다고 들었어. 투심이나 싱커나 다 패스트볼 계열인데 비슷하지 않겠어? 투수마다 그립 잡는 게 틀려서 좀 다르게 보이려나?”
‘참! 어지간히 구체적으로 말하네. 이젠 무늬 찾기를 넘어서 색감까지 구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그게 말이 돼?’
레블론의 말에서 신빙성이 대폭 떨어졌다. 이런 하나 마나 한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다. 어떻게라고 묻는 말에 잘하면 된다라는 급의 답이라니 귀 얇은 내가 미친놈이었다.
“아는 사람 중에 그렇게 구종 구별한다는 사람이 있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이제 레드닷 이야기를 끝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베그웰에게서 질문이 나왔다.
‘있을 리가 있겠어? 이건 사냥꾼의 예전에 잡은 곰 같은 이야기인데…’
그 곰은 죽고 나서도 해마다 계속 자란다. 난 환상을 벗어던졌는데 베그웰은 아직인 것 같았다.
“직접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조 마우어가 그렇게 했다 하더라고.”
이젠 레전드의 이름이 나온다. 유명한 이름을 앞세워 말의 신빙성을 높이려는 시도는 오래된 스타일이지만 언제나 잘 먹힌다.
‘하필이면 마우어라니… 내가 한 2년 전까지 그 팀에 있었다고.’
마우어는 메이저리그 15시즌이라는 커리어 내내 트윈스라는 하나의 팀에서만 뛰었다. 물론 내가 그 팀에 들어가기 10년 전에 은퇴했다. 내가 있을 때 그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은 오래 일한 구장 잔디 관리 직원밖에 없었다.
“그랬었군. 그래서 그가 그런 타율을…”
베그웰에게서 이상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마우어가 타격도 좋은 훌륭한 포수였다는 건 안다. 하지만 타율이라니 이게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타격은 포지가 더 낫지 않았나?”
어쭙잖게 아는 척하는 게 아니다. 즉시 나온 베그웰의 맹렬한 반발에 바로 후회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야? 2009년의 마우어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타자였어. 그 이전에 한 시즌 0.365를 친 포수는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어. 물론 커리어 내내 홈런 숫자는 적었지만, 그해에는 28개나 쳤다고. 사고만 없었어도…”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베그웰이 심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0.365에 홈런 28개? 겁나게 잘 치긴 했네.’
“어! 미안. 내가 잘 몰라서…”
10년도 전에 은퇴한 포수 때문에 사과를 해야 하다니 무슨 이런 일이 다 일어나나 싶다. 이건 다 레블론이 쓸데없는 이름을 꺼낸 탓이다.
“마우어는 포수로 타격왕을 세 차례 차지했던 유일한 선수였지. 1940년대 어니 롬바르디가 두 번 했던 적은 있었는데 그 이후로 포수 타격왕은 60년 이상 나오지 않았었어. 지금도 아메리칸 리그에서 타격왕을 했던 포수는 마우어가 유일해.”
레블론도 아는 척을 했다.
‘롬바르디는 또 누구야? 그런 포수도 있었나? 하긴 내가 백 년 전 사람을 어떻게 알겠어?’
“타격왕을 했던 포수는 1940년대 이후로 단둘뿐이야. 마우어가 세 번 포지가 한 번 했었지.”
베그웰에게는 마우어가 롤모델인 것 같았다.
“역대 최고 공격형 포수로는 마이크 피아자를 들지 않아?”
타격만 따지면 그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베그웰은 그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마우어는 2004년부터 2014년까지 포수를 했었는데 데뷔 시즌을 제외하면 딱 열 시즌이지. 그 기간 통산 타율이 0.323였다고. 그렇게 따지면 니가 말하는 피아자는 0.308이고 포지도 0.307밖에 안 돼. 홈런과 같은 종합적인 타격 능력을 보고 피아자를 최고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정확성이라는 기준에서 마우어에 범접할만한 포수는 아직 없었어.”
‘그래. 니 말이 무조건 다 맞아. 마우어가 최고야. 이 자식이 그렇게 마우어 빠였었나? 왜 전혀 몰랐지?’
그는 트윈스 시절에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가만, 타율은 높은데 홈런은 적고 수비는 잘해. 이거 완전히 올 시즌 베그웰이네.’
“너 타격왕을 하는 세 번째 포수가 되고 싶은 거야?”
말을 듣다 보니 감이 팍 온다. 예전에는 차마 마우어를 롤모델로 한다는 말을 못했을 것 같다. 그런 생각도 어느 정도 급이 되어야 하는 거다. 2할도 못 치는 포수가 통산 타율이 3할 2푼대인 포수를 입에 올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타격을 본받고 싶을 뿐이야. 그처럼만 칠 수 있으면 그런 타이틀은 자연스럽게 오겠지. 레드닷이라 오늘 좋은 이야기 들었네. 한번 해봐야겠어.”
‘아! 레드닷. 그 이야기하다가 여기까지 말이 흘러온 거였지. 레블론이 이상한 이야기를 해가지고 멀쩡한 놈 하나 병신 만드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지난 일을 생각해보면 베그웰은 대단한 저돌성과 고집이 있었다. 그런 게 없었다면 타격 문외한인 고 감독의 조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리라.
시즌 막판에 괜한 시도로 스스로 밸런스를 망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심하게 된다. 저 인간이 고집부리기 시작하면 앞뒤 안 가린다.
‘하려면 내년에 하자. 겨울에 합시다.’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이런 벽창호 같은 유형에게 괜히 하지 말라고 하면 더 악착같이 하는 수가 있다.
“베그웰. 넌 구종 예측을 이제껏 어떻게 했었는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회가 답이다.
“여러 가지인데… 투수 유형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투구폼에서 드러나지.”
“에이스급들은 그렇지도 않잖아. 난 그런 투수는 제일 처음 그립을 봐.”
레블론이 또 끼어들었다.
‘아! 좀…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고.’
“패스트볼과 스플리터 조합이 주무기인 투수는 그립을 보고 판단하는 수밖에 없어. 궤적이 너무 비슷해. 패스트볼에 비해서 스플리터는 더 벌려서 잡으니까 보기는 쉬운 편이야. 다만 와인드업에서 파워 포지션으로 넘어가는 동작이 빠른 투수들은 보기가 좀 힘들어서… 거기 묘하게 디셉션을 넣기도 하고 그런다고.”
“난 패스트볼 너클 커브 조합이 잘 보이더라구. 너클 커브 그립이 확 티가 많이 나잖아.”
“검지가 그렇게 들리면 못 보려야 못 볼 수가 없긴 하지.”
커브는 뜨는 느낌과 함께 궤적으로 너무 쉽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 단점을 보강한 너클 커브를 많이 던지는 게 요즘 추세이긴 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정상급 타자들은 쉽게 구별해 내는 것 같았다.
“난 고속 슬라이더가 치기 어렵더라고.”
“그게 쉬운 타자가 어디 있겠어? 좀 느리면 곡선에 가까운 느낌이 있는데 빠르면 그런 느낌도 안 와서… 레드닷을 볼 수 있으면 슬라이더는 쉽게 가려낼 수 있겠네.”
다시 레드닷 이야기로 돌아왔다.
‘에구, 몰라. 니 마음대로 하세요.’
“이제부터 포구하면서 레드닷 보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아. 아마 마우어가 그랬다는 건 평소 자연스럽게 공 보는 연습을 할 수 있는 포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 지금까지 그런 것을 의식하면서 공을 보지는 않았는데 좀 보다 보면 감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 그래도 안 보이면 난 안 되는 거겠지.”
그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말릴 생각이 없다. 게임을 하면서 연습도 하고 아주 좋은 플랜이다.
“그건 그렇고 로키스 선수들은 내 공을 보면서 성과가 있었을까?”
“내가 생각해 봤는데 구별이 되어도 별 상관없을 것 같아.”
“그게 무슨…”
“곧 내 차례네. 좀 이따 이야기하자고.”
중요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베그웰과 레블론의 타순이 돌아왔다. 우리 공격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다.
7회에 우리 타선이 대폭발을 해버렸다. 거의 타순이 한 바퀴 돌아갈 기세다. 이렇게 되면 상대가 내 구종 파악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승부에는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잘됐네. 오늘 좀 길게 가야겠어. 불펜도 좀 쉬어야지.’
오늘 나 혼자 게임을 끝낼 수 있다면 다음에 이어질 홈 3연전을 최상의 전력으로 맞이할 수 있게 된다.
“스트라익. 배터아웃.”
로키스 타자들의 스윙이 커졌다. 7회와 8회 로키스의 공격은 힘찬 스윙만 보였다. 스코어는 8:0. 이쯤 되면 타자들의 머릿속에 오늘 게임은 어렵겠구나라는 생각이 파고들었을 거다. 7회 초 우리 공격에서 타자일순하며 6점을 뽑아버렸다.
두 점 정도 차이는 한 번의 공격으로도 따라잡을 수 있다. 타자들의 의욕이 살아있는 스코어다. 하지만 7회에 8점 차이 정도가 되면 희망을 버리게 된다.
상대 타자들이 이제껏 유지했던 신중한 자세를 버리고 한 방을 노리는 영웅스윙을 계속해서 시도해 왔다. 그들도 괴로움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다. 6회까지 은연중에 긴장했던 것에 비하면 너무 쉽기만 했다.
9회 말 현재 나의 레퍼토리는 변하지 않았다.
‘홈런? 맞으면 맞는 거지. 저런 스윙에 걸려봐야 몇 개나 걸리겠어.’
그런 생각으로 밀어붙였다. 경기 후반 로키스는 무기력했다.
‘구속이 빨라지니까 좋긴 좋네.’
어쩌면 강속구의 좋은 점은 빠른 공 그 자체가 아니라 완급조절의 폭이 커지는 것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로키스 타자들이 내 공에서 무엇을 봤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본다고 다 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구속은 투수의 가장 기본적 능력이다. 신체 사이즈와 운동 능력처럼 타고나는 부분이 절대적이다. 신체 사이즈가 크고 운동 능력이 좋다고 다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개는 그 기본적인 능력이 모자라면 실패한다.
내가 예외가 된 이유는 그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서 된 것이 아니었다. 나만이 잘할 수 있는 부분의 능력을 키워서 그렇게 된 것이다. 굳이 타자의 반응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이 순간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150g에 못 미치는 원형의 가죽덩이가 오늘은 92마일의 빠르기로 18.44미터를 비행한다. 타자의 배트와 공이 만나 150g이 약 160kg의 하중으로 변하고 7mm의 공간에서 1000분의 1초간의 짧은 접촉을 가졌다. 공은 다시 그라운드로 향했다.
모처럼 만에 땅볼 타구가 나왔다. 타자는 공을 띄우고 싶었겠지만 모든 일이 의도대로 된다면 108번뇌라는 말이 생겼을 리가 없다. 투수는 야구공 108개의 붉은 매듭 속에 108개의 생각을 싣는다.
유격수 패터슨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공을 건져 올려 이상 없이 1루로 배달했다.
‘투 아웃.’
쿠어스필드의 태양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공을 잡았다가 교체를 요구했다. 너무 반짝거렸다. 야구공이 처음 만들어지면 진주라고 불릴 만큼 하얗고 매끈하다고 하는데 경기에서 사용하는 공은 표면이 거칠고 광택이 죽어있다. 레나 블랙번 야구용 진흙이라는 것을 게임 시작 전 볼보이들이 공에 문지른다.
‘손질이 잘 안된 공이 섞여 있어나 보네.’
바뀐 공의 가라앉은 질감이 손끝에 익숙함으로 다가왔다.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두 개의 파울 뒤 던져진 마지막 공은 내 최고 구속을 경신했다.
‘쿠어스필드 너무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