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빨간색이 싫다
느린 공과 더 느린 공 그리고 이어서 던져진 아주 빠른 볼. 내 구속이 90마일을 넘겼다.
‘와우!’
최고 구속. 말 그대로 최고는 단 한 번만 존재한다. 구단의 피칭 분석 리포터에 따르면 내 최고구속은 90마일이라고 되어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90마일을 언제 던져봤었지? 기억도 안 나네.’
시즌이 지날수록 내 평균 구속은 점점 줄어드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빠르게 던질 필요성을 점점 더 못 느끼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신세계다. 좀 세게 던졌더니 92마일이 찍혔다.
‘중독되겠네. 굳이 이렇게 던질 필요가 없긴 한데…’
등판 전 세운 피칭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점점 더 떠오르고 있었다. 원래 계획은 평소보다 크게 낼 수 있는 구속 차를 이용해 타자의 타격 타이밍을 어지럽힌다는 거였는데 완전히 예상을 빗나간 결과가 나와 버렸다.
예측을 벗어난 결과가 꼭 나쁜 건 아니지만, 오늘 이 상황은 좀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스스로 기네스 피처라고 생각한다. 주력 구종은 싱커이고, 그것으로 주로 땅볼을 유도하는 피칭을 해왔다.
삼진을 많이 잡은 경기도 있었지만 그건 좀 특별한 상황이었다. 컨디션이 아주 좋은 날이라 공의 무브먼트가 미쳤다든지 아니면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이 내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하던 날 같은 경우였다.
‘선발투수가 모든 공을 전력으로 던지는 건 무리지.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고.’
삼진을 노리는 원패턴으로는 언더투수인 내가 롱런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싱커의 무브먼트를 극대화하고 그것을 제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발전해 왔다. 그 테크닉으로 전력투구를 최소화하고 투구 수를 절약해 이닝이터로 자리를 굳혔다.
‘그런데 이건 뭐냐구. 왜 타자들이 아예 타이밍을 못 잡는 건지…’
오늘 게임에서 삼진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 싱커가 땅볼을 유도하는 원인은 독특한 움직임 때문이다. 다른 구종들도 던지지만, 그것은 싱커의 위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메이저리그 대부분의 피처는 오버 핸드 스로우다. 그 역시 세분하면 여러 유형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형태의 투구폼을 가진 투수가 리그의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오른손 오버 핸드 스로우 투수의 싱커는 보통 2시 방향으로 움직이는 스핀을 가진다. 그렇게 대각선 방향의 스핀이 생기면,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공의 기본적 움직임에 좌우의 움직임이 더해지게 된다. 즉, 오른손 타자의 몸쪽으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테일링이 생긴다. 이것이 이 리그에서 타자들이 주로 보게 되는 싱커다.
내 싱커는 공이 던져진 각도 때문에 회전축이 4시 방향에서 시작되는 스핀을 가지고 좌우 움직임보다는 상하의 움직임이 크다. 타자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궤적이다. 그런 특이성이 나의 리그 생존을 가능하게 해준다.
보통 오버핸드 투구폼에서 수직으로 내려지는 팔 동작 때문에 100%의 탑스핀을 가지게 되는 공을 6시 방향 공, 100% 백스핀을 가진 속구는 12시 방향 공이라고 한다. 탑스핀을 가진 대표 구종은 커브, 백스핀은 포심 패스트볼이다.
언더핸드와 사이드암의 중간 형태인 나의 패스트볼은 오버핸드 투수들이 던지는 싱커와 비슷한 2시 방향 회전축을 가진다. 그래서 내가 던지는 속구는 포심의 무브먼트가 아닌 투심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구속이 70마일 초중반에서 형성되는 싱커와 90마일 초반대의 투심. 오늘 나의 레퍼토리는 땅볼이 아닌 삼진을 양산하고 있었다. 구속 조절의 방향이 더 느리게로 진화한 싱커와 고지대라는 환경의 특성으로 더욱 빨리진 속구가 만나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투수와 타자가 처음 만나면 그 승부는 투수 쪽이 유리하다라고 하는 속설이 있다. 아마도 오늘 이 상황은 그런 부분에 힘입은 바가 큰 것 같다. 타자 입장에서는 전혀 생소한 유형의 투수를 만난 셈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머릿속에 체인지업의 존재는 없었을 테니까. 오늘은 싱커가 체인지업이 되어 버렸다.
‘예전에 이런 상황이 한 번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불펜투수 때였었나? 그때는 워낙 상황이 짧게 지나가 버려서…’
확실히 선발과 불펜은 다르다. 한두 이닝 동안 몇 명의 타자들을 상대하는 것과 타선을 상대해야 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이제 타선이 거의 두 바퀴 돌았다.
‘후반에는 어떤 변화를 줘야 하지? 일단 이 이닝 마무리부터 하고…’
“스트라익.”
아예 배트가 안 나온다.
‘포수이고 하위타선이라서 그런 거겠지. 우리 포수는 3번 친다고.’
쿠어스필드에서 잘 치는 방법은 컨택이 중요하다. 대세로 자리 잡은 당겨치기보다는 스프레이 히팅이 유리하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투수의 실투 빈도가 높아지고 투구된 공의 움직임이 단순화된다. 굳이 정확하고 강한 타격이 요구되지 않는다. 구장도 커 외야가 아주 넓다. 낮은 공기 밀도로 인해 타구 속도가 빨라진다. 땅볼 타구조차 빠르다.
‘이런데 왜 스윙을 안 하냐구. 일단 스윙을 해야 땅볼이든 플라이든 나올 거잖아.’
한 타순 돌면 타자들이 좀 더 적극적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스윙 빈도가 더 떨어졌다. 오늘 게임 예상은 맞는 게 없다.
타자가 스윙을 자제하는 경우는 대개 밸런스에 문제가 생겼을 때다.
‘한 타석 상대하고 밸런스가 붕괴돼? 오늘 내 공이 그 정돈가? 정말 모를 일이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와 억지로 가져다 붙인 이유가 더 말이 안 된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안 치겠다는데 사양할 이유가 없었다. 난 사람의 성의를 무시할 정도로 모질지 않다. 더 신중하게 구속 차이를 줘 가면서 삼진 처리를 했다. 가벼운 삼자 범퇴. 6회가 끝났다.
“베그웰. 오늘 내 공이 그렇게 끝내줘?”
“무슨 얘기야? 니 공? 평소보다 많이 밋밋하지. 구속 차이 주는 건 아주 좋아.”
덕아웃에서 베그웰에게 슬쩍 물었지만 냉정한 평가가 나왔다.
“혹시 쟤네들 밸런스를 내가 무너트린 거야? 아니면, 쿠어스 행오버(Coors Hangover)를 원정이 아닌 홈에서 하는 걸로 규칙이 바뀌었다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시즌 게임의 절반은 당연히 홈경기다. 로키스가 쿠어스필드용 타격 스킬에 몰두하다 원정경기에서 상대적으로 훨씬 예리해진 투수들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헛스윙을 남발하는 현상을 쿠어스 행오버라고 비꼬아 부른다.
우리가 쿠어스필드에 와서 힘든 것만큼 로키스 선수들도 원정을 가면 힘들어한다. 쿠어스필드용 타격을 타구장에서 하면 땅볼이 많아지고 타구질도 확 떨어진다. 배럴 타구 생산을 위해 의도적으로 잡아당기고 싶다 하더라도 몸이 바로 따라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하핫. 그거 그럴듯한 말이네.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아주 터무니없이 들리지는 않는데… 왜 그러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어. 뭐든 무슨 상관이야. 알아서 죽어주겠다는데 그 이유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다. 하지만 영 찜찜하다.
“그 이유 내가 알 것 같은데…”
레블론이 불쑥 끼어들었다. 이럴 때 이 아저씨는 신뢰가 안 된다. 꼭 쓸데없는 농담이나 하려고 한다.
“어휴! 알고 싶지 않아. 또 타자의 치질 어쩌고 하는 이야기 하고 싶은 거야?”
“아니야. 이번엔 진짜야. 내 느낌으로는 로키스 타자들이 레드닷(Red Dot)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레드닷?”
그런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걸 보고 타격을 한다는 타자를 만난 적은 없다.
타격은 타이밍이고 투구는 그 타이밍을 뺏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 타이밍 싸움에서 타자가 승리하기 위해 투수의 구종을 예측하는 많은 방법들이 있었다.
투수의 버릇을 파악한다든가 미세한 투구폼의 변화 혹은 릴리스의 차이를 통해 구종을 예상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사인 훔치기도 있지만 그건 비난받는다. 한때 큰 이슈가 되기도 했던 큰 사건도 있었다.
“레블론은 레드닷을 보고 타격을 하나요?”
“아니, 그런 걸 보고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눈이 좋았으면 이미 4할은 쳤겠지.”
레드닷을 본다는 건 공의 회전을 보고 구종을 판별한다는 것이다. 하얀 야구공에는 108개의 붉은 실밥이 8자를 이루면서 겉면을 둘러싸고 있다. 이 붉은 색이 공의 회전 방향에 따라 눈에 잔상을 남기게 되고, 그것이 구종에 따라 일정한 패턴으로 보인다고 한다.
대부분의 투수들이 던지는 슬라이더 같은 경우 회전축에 실밥이 걸리면서 빨간 점이 공에 찍힌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레드닷이라고 부른다. 나도 그냥 들은 이야기다.
135km(약 84마일)의 공이 투수의 손끝에서 홈플레이트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약 0.49초이다. 프로레벨 타자가 타격 시 필요한 전체반응시간이 0.368초라고 하는데, 느리다고 되어 있는 공조차 구종과 구질을 판단할 수 있는 여유시간이 0.122초라는 말이 된다.
그 짧은 시간에 실밥을 모양을 구분해서 볼 수 있는 그 정도의 동체 시력. 그런 걸 가진 특별한 사람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탑스핀을 가진 커브는 수평 가로줄이 보이고 백스핀 공인 패스트볼은 그냥 하얗대. 그것도 투심 포심이 다르다고 하던데…”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말 같지도 않은 말이다.
‘음. 재미는 있네. 하핫. 역시 레블론이 농담은 잘해.’
레블론은 나름 진지하게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만약 타율이 3할3푼이라면 10번 타석에서 볼넷 한 번, 안타 세 번을 친 거잖아. 타석당 평균 5개의 공을 봤다면 총 50개. 그중에 안타가 되는 공은 결국 3개일 뿐이야.”
“그건 그렇지.”
베그웰이 그 어이없는 말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타자가 구질을 예측하더라도 안타가 될 확률이 대략 6%라는 거야. 변수는 많이 있겠지만 그만큼 예측이 되어도 확률이 떨어진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라고.”
레블론의 말을 들을수록 뭔가 간질간질하다.
“So의 공은 느리잖아. 오늘 보니까 70마일 조금 넘는 공이 대부분이더라고. 그 정도라면 열심히 보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 로키스 애들이 허접하지만 그래도 메이저리거인데… 대부분이 정확하지 않아도 상관없잖아. 어차피 6%인데 몇 개만 걸리면…”
“그러니까 쟤네들이 한 타석을 버리고 공을 비교해가면서 보고 있었다는 거네요.”
베그웰의 정리가 왠지 맞을 것 같다.
‘헐! 하루 종일 내 예측은 하나도 안 맞더니 남의 말이 왜 이렇게 귀에 들어오는 거야.’
“내 생각은 그래. 자기들끼리 정보를 교환하면서 자료를 모으는 중일 테지. 나 같은 타자 눈에는 딱 파악이 된다고.”
‘어휴! 3할도 못 치는 아저씨가 바로 알아채는 걸 3할 3푼 치는 훌륭한 타자 베그웰은 왜 몰랐던 거야?’
“거기 레블론. 혹시 싱커는 레드닷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못 이길 전쟁이 없다고 손자가 그랬다. 비룡이가 그리워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