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오해가 오해를 부른다
“퇴장.”
캐빈 럭스와 가장 심하게 설치던 다저스 2루수가 함께 퇴장당했다. 멀어서 심판의 퇴장 선언 이후 뒷말이 잘 들리진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척하면 척이다. 양 팀 감독이 쏜살같이 달려가 선수들을 가리키며 뭐라고 소리친다. 답이 빤히 보이는데 모를 수가 없다.
‘오호! 주전 두 명을 보냈네. 카스트로 자식이 빠지는 건 좀 아쉽지만, 이 정도면 남는 장사했네..’
다저스 놈들은 좀 당해봐야 한다. 난 사실 별로 열 받지 않았었다. 화가 나기보다는 황당함과 부끄러움이 합쳐진 정도였었는데 활극이 벌어지던 현장에서 여러 발자국 물러나 편안하게 한 편의 드라마를 감상하다 보니 그마저도 덤덤해졌다.
나는 밀쳐졌지만, 그 행위의 당사자는 보기만 해도 섬뜩한 펀치를 안면에 맞았다. 럭스가 많이 다치지는 않았을지 걱정될 지경이다. 그 살벌했던 펀치를 눈앞에서 똑똑히 봤는데 불만이 생길 리가 없다.
‘내가 좀 넘어졌다고 그렇게 화를 내면 어떻게 하냐고.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무식한 주먹질을 하다니 좀 심했잖아. 짜식이 기특하게··· 흐흣. 그럼. 투수는 보호받아야 하는 거지.’
트레이드로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 아닌 신참이라 조금 오버한 면은 있는 것 같지만, 팀에 녹아들려 하는 성의가 보이는 것 같아 아주 만족스럽다. 우리 팀이라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건 아니다. 팀 케미를 위해서 노력하는 선수는 적아를 떠나 존중받아야 한다.
그게 우리 편이면 조금 가산점이 붙기는 하겠지만 그런 것은 인지상정 즉,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정서나 감정이다. 이제 대충 상황 정리가 되고 있었다. 슬슬 나가봐야 할 것 같았다. 벗어두었던 글러브를 찾아 들었다.
“너 뭐 하냐?”
애덤 아저씨다. 그는 베그웰이 끌고 온 나를 덕어웃에서 인계받아 밖으로 못 나가게 막고 있었다. 왕년에 성깔 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도 이젠 이런 활극에 애써 끼려고 하지 않았다.
“뭐 하긴. 아직 투아웃이잖아. 마무리해야지.”
“니가 왜 정리를 해? 퇴장당한 선수가···”
“퇴장이요? 내가? 내가 왜··· 이게 무슨 소리야?”
“심판이 너 쪽으로도 손짓을 했었잖아. 뭘 보고 있었던 거야? 좀 애매한 면이 있긴 하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 제공자가 넌데 퇴장 안 시키기도 이상하잖아.”
“내가 무슨 원인 제공을 해요? 밀려 넘어진 것밖에 없는데···”
“럭스를 태그하면서 씩 웃었잖아. 의도가 어떠했든지 간에 그에게는 비웃는 것처럼 보였겠지. 그건 도발이야. 우리도 다 봤어. 덕아웃에서도 아주 잘 보이더구만.”
잘 보이긴 했을 것 같다. 홈팀의 덕아웃은 1루 쪽에 있다.
정말 말이 안 된다. 좋으면 웃고 기분 나쁘면 인상 쓸 수도 있다. 럭스는 타석에서 내내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나를 흘겨봤었다. 그건 괜찮고 내가 파인 플레이에 아주 조금 기뻐한 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난 폭행을 당한 피해자인데 퇴장이라니···’
이건 심판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의 횡포다. 기존 질서에 반한 평소 꼴 보기 싫은 놈을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같이 날려버린 게 틀림없다.
“아! 정말 미치겠네. 내가 뭘 어쨌다고.”
다음부터 이런 일 벌어지면 앞뒤 가릴 것 없이 일단 선방부터 날리고 시작할 생각이다. 어차피 결과가 정해진 것이라면 이렇게 어이없이 당할 수는 없다. 아무리 내가 옳아도 여기서는 소수파이자 약자이다. 심판이라는 거대한 기존 질서에 대항하기에는 너무도 연약한··· 하지만 언젠가 정의는 승리할 것이다.
“저지(judge 재판관, 심판)나 저스티스(justice, 정의) 모두 공정한이란 뜻의 어원에서 나왔잖아. 지금 이 상황이 공정해?”
소리는 애덤에게 쳤지만, 답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지금 그런 말 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거 알잖아. 조용히 있다가 사무국에 가서 이야기를 다시 해보세나. 누가 So 좀 락커에 데려다주지.”
라드 감독이 고개를 흔들며 손짓을 했다. 베이스 코치가 벌떡 일어나 다가온다.
‘이거 말하기도 귀찮다. 이거야? 감독이 이러면 안 되지.’
정말 서운해지려고 한다.
나중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정식 징계 절차에 따라 소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지금 당장 내 경기에서 쫓겨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아무 소용없다. 사무국에서 내 주장이 받아들여진다 해도 재경기를 하는 경우는 생기지 않는다.
‘왜냐면 그랬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 이런 불합리한 관례 따위는···’
“So 가지.”
코치가 빨리 나가자고 재촉을 한다.
‘정말 오늘 왜 이러는 거야. 아까는 베그웰에게 끌려 그라운드에서 나오고 이젠 코치에게···’
나도 메이저리그에서 구른 지가 꽤 되었는데 누가 데려다줘야 락커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것도 홈구장에서··· 감독이 말은 데려다주라는 것이었지만 그건 끌어내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음. 감독도 이래저래 머리가 복잡할 수 있겠지. 지금은 반발할 때가 아닌 것 같네.’
일단은 현실에 따르기로 했다. 약한 자의 설움이다. 불만이 있어도 일단은 수긍하는 척해줘야 한다. 그것을 사람들은 질서라 부른다.
“저기··· 이제 괜찮으니까 혼자서 갈게요.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냥 좀 따라오라고.”
코치가 감독 쪽을 한 번 쳐다보다니 몸으로 그쪽의 시선을 가리고 요란한 손짓을 했다.
‘입 다물고 빨리 가자 이건가?’
이 양반도 감독 눈치 어지간히 보는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어슬렁어슬렁 그를 따라나섰다.
“이제 다 왔잖아요. 들어갈게요. 경기 다시 시작했을 텐데 가 보셔야죠. 1회부터 제가 이렇게 되어 버려서 이래저래 복잡해졌네요.”
“들어가서 편안하게 있어. 정 답답하면 먼저 가도 돼. 알지?”
팀에서 날 신경 써주는 건 알겠는데 이런 건 너무 부담스럽다.
코치를 돌려보내고 락커에 들어서자 돌아앉은 등판이 하나 보인다. 오늘의 퇴장 동지다.
“흠. 언제 왔어?”
“언제 오긴··· 니가 덕아웃에서 고함 지르면서 깽판 칠 때 먼저 왔지.”
카스트로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무슨 말을··· 그 정도는 아니었잖아.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이 자식은 말을 해도 꼭 이따위로···’
오늘 일을 생각해서 참아주기로 했다. 절대로 그 펀치 때문은 아니다. 팀 케미를 위해 몸을 날린 그 헌신 때문에 넘어가 주는 거다.
“너 좀 조심해. 아까 그게 뭐냐? 사실 보고 있는데 나도 짜증이 나려고 하더라.”
“내가 뭐?”
“럭스를 태그하고 나서 히죽거렸잖아. 그 자식이 쫄보라서 밀고 말았던 거지 나 같았으면 그냥···”
이제 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까 그 장면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것은 알겠는데 럭스를 시원하게 패 준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너도 짜증 날 정도였으면 럭스에게 펀치는 왜 날린 거였어?”
같은 팀원이라서 팔이 안으로 굽었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못마땅한 듯 말하다니 이 자식도 좀 귀여운 면이 있다.
‘이걸 뭐라더라? 아! 츤데레. 맞아 이런 걸 그렇게 부르던데··· 짜식. 쑥스러워하긴···’
“그 싸가지 없는 놈이 입 다물어. 바보야(shut up fool)라고 했었다고 그런 말을 듣고 참으면 진짜로 바보가 된다고.”
“야! 카스트로. 아무리 그래도 없던 일을 있다고 하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바로 앞에 있었는데 그런 말은 못 들었다. 정말 그렇게 말했다면 내게 안 들렸을 리가 없다.
“진짜 그랬다고. 그 비열한 자식이 널 밀고 나서 내 쪽을 바라보면서 금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어.”
‘그랬었나? 그런 말을··· 어?’
“사건은 내 잘못으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넌 말리려고 하다가 럭스가 네게 뭐라 하는데 격분해서 그를 응징했다. 이런 식의 스토리가 맞아?”
“바로 그거야.”
‘어째 느낌이 좀 찝찝하다 싶더니··· 어휴! 정말 미치겠네.’
내가 상당히 일방적으로 이 사건을 이해한 부분이 있었다. 카스트로는 역시 착한 놈이 아니었다. 오해를 했었다. 이놈은 모자라는 놈이었다.
‘그런 것만은 아닌가? 지식이 모자란다고 지혜가 없는 건 아니라고 엄마가 그랬었는데··· 하아! 어쩌자고. 이놈도 진짜 대책 없는 놈이었네.’
“내 생각에 니가 좀 잘못 생각한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뭘 잘못 생각해? 그런 단순한 일에 그럴만한 게 어디 있어? 럭스 그놈이 비열하게 날 멸시하는 말을 했고 그 대가를 받은 거야.”
카스트로가 돌아앉았다.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그는 게임 중이었다.
‘하핫. 얘가 정말 강철 멘탈이었어.’
카스트로는 도미니카인지 푸에르토리코인지 아무튼 그쪽 동네 출신이다. 그 동네는 스페인어 권이다. 그는 아마 성인이 되고 나서 야구 때문에 미국으로 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오해를···’
shut up을 강제나 비하의 의미라고 일방적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정색을 하거나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면서 그런 표현을 한다면 그런 의미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사용하는 shut up은 헛소리 마라. 조용히 좀 해 등 가벼운 평상어로 쓰인다.
그 뉘앙스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내가 아까 본 장면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넌 빠지게 친구 이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니가 그런 펀치를 꽂을 만한 뜻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카스트로가 아니었어도 벤치 클리어링은 일어났겠지만, 아까와 같은 대규모 활극이 펼쳐지지는 않았을 거다.
“그래? 니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니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건 아니야. 내 말은 오해가 있었을 수도 있었다는 거지.”
카스트로에게 내 생각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현자타임이 왔다.
‘지금 와서 이런 말 따위를 해서 뭐 하자는 거야. 다 부질없잖아. 오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이미 벌어진 일을 주워 담지도 못하는데··· 아까 내 감정도 정상은 아니었던 것 같네. 럭스가 타석에 있을 때부터 못마땅한 마음이···’
아마 난 인싸가 되고 싶은 아싸였던 것 같다.
“넌 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거야? 나도 어릴 때부터 들은 말이 있어. 개와 함께 다니는 사람은 짖는 법을 배운다. 이런 말 들어봤어?”
“아니, 처음 들어. 그렇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아.”
카스트로의 눈이 드디어 스마트폰에서 벗어났다. 날 바라보더니 씩 웃는다.
“그 럭스 놈은 다저스 선수야. 원래는 좋은 놈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다저스 선수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자이언츠 선수가 다저스 놈을 때리는 데 무슨 복잡한 이유가 필요해.”
‘헉!’
이런 단순한 해답이 있을 줄을 몰랐다.
“난 푸른 피 어쩌고 하는 말이 싫어. 마침 알맞게 자이언츠 선수가 되었어. 내년에 FA 계약을 시원하게 해주면 충성심이 더 생길 것 같아. 이거면 충분한 것 아냐? 아! 어쩌면 올해 반지를 하나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투사의 모습이다.
‘그래. 우승을 위해서는 이런 터프한 녀석이 필요할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