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05화 (105/200)

105화. 불문율

“1대4라고?”

“그거 너무한 거 아냐?”

“게임 끝나고 루터를 따로 부른 게 이것 때문이었나 보군.”

“헉!”

홈경기를 가뿐하게 이기고 상쾌한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락커에 먼저 나온 선수들이 웅성이고 있었다. 몇 마디만으로도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겠다. 진짜 트레이드라는 사건이 일어나 버렸다.

베그웰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샤워 중인 것 같다.

‘이럴 땐 꼭 느리더라.’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이고 내막을 가장 잘 알 것 같은 사람에게 사정을 물었다.

“애덤. 누가 온다는 거야?”

“흐흣. 너 좋겠네. 카스트로가 온댄다. 내일 팀에 합류한다고 하니까 만나면 싸우지는 마라. 잘해줘. 이제부터 카스트로에게 홈런만 맞을 일은 없잖아. 너 올 시즌 평균자책이 0.5는 떨어질걸.”

‘헐!’

기분이 더럽고도 좋다. 아주 오묘하다. 하지만 이런 티를 낼 분위기는 아니다.

“음. 4명이나 간다면서··· 누가···”

“응. 루터하고 에릭 프럿코라고 알지? 가끔 얼굴 봤을 텐데··· 지금은 AAA에 있었지. 그리고 AA 투수 둘이라는데 그건 누군지 나도 모르겠어.”

에릭 프럿코라면 안다. 그도 한때 선발 투수 유망주로 촉망받았다고 하는데 더 강력한 유망주들인 로저스와 존슨에게 밀렸다. 작년 선발 경쟁 이후로는 완전히 밀려났다. 어쩌다 투수 중에 부상 등으로 결원이 생기면 잠시 콜업되었다 바로 내려가곤 했었다.

로저스와 존슨 등에 치여 기를 못 펴고 있었는데 나까지 나타나면서 그의 입지는 완전히 무너졌었다. 그에게는 이 트레이드가 차라리 잘된 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휴! 이왕 이렇게 된 거 가서 잘해라. 루터도 잘 풀려야 할 텐데···’

그건 그렇고 카스트로가 좋은 타자이긴 해도 이렇게 넷이나 몰아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프런트가 이번에 마음을 단단히 먹었나 보다.

‘이러다가 내년에 FA 계약 못 하면 반년 쓰자고 멀쩡한 선수 넷을 준 꼴이 나는 거잖아.’

***

“스트라익.”

생각보다 아래로 좀 치우친 것 같아 타자가 휘두르지 않으면 볼이 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심판이 순순히 스트라이크 콜을 준다.

‘오호! 재수! 심봤다.’

이건 나 같은 유형의 투수에게 단순한 스트라이크 판정 하나가 아닐 수 있다.

‘일관성 있는 판정을 해 주세요. 기본에 충실한···’

심판의 머릿속에 스트라이크 판정을 한 존을 확실히 새겨 넣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싱커와 슬라이더를 빠르고 느리게··· 계속해서 스트라이크를 선언한 존의 언저리를 두들겼다. 한 구 한 구가 존에 꽂힐 때마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주심의 시선이 느껴진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간을 다 봤으면 최후의 일격이 필요하다. 내 위닝샷은 이미 살펴 놓은 존의 구석을 파고들었다. 아웃 콜과 동시에 타자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보인다. 그래도 그는 끝내 심판 쪽을 돌아보지 않고 조용히 타석에서 물러났다.

“잘 생각한 거야. 1회부터 뭐라고 하면 너만 손해지. 그런데 왜 나한테 인상을 쓰는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스트라이크를 잡아주니까 거기 던진 거잖아. 아! 괜히 열 받네. 다음 타석에 저놈을 그냥···”

투수에게 인상 쓰면 안 된다는 불문율도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확실치 않다. 이번 이닝을 마치면 애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뭐가 워낙 많아서··· 어지간해야 기억을 하지.’

1986년에 폴 딕슨이라는 아저씨가 야구의 불문율(The Unwritten rules of Baseball)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의 300페이지에 육박한다고 들었다. 아주 유명한데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다는 전설의 서적이다.

‘나도 읽진 않았지. 누가 그런 걸 보겠어.’

혹시 그 정도 분량이라면 타자가 투수를 자극할 만한 행동을 했을 때 어쩌구 하는 문장 한 줄 정도는 적혀있지 않을까? 불문율이라는 건 그만큼 귀에 걸면 귀걸이 목에 걸면 목걸이와 같은 속성이 있다.

‘애덤에게 물어보고 그 비슷한 거라도 있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보복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단순한 감정 분출이 아니라는 합리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다저스와의 4연전 중 1차전이다. 이 시리즈가 끝나면 짧은 상반기 휴식이 있다. 물론 나와는 상관없다. 올스타전에 나가야 하니까. 별로 새롭지는 않다. 작년에도 출전했었다.

‘나가 보니까 별거 없더라고. 1이닝 짧게 던지다가 여기저기 얼굴 보여야 할 일도 좀 생기고··· 정말 올해는 쉬고 싶었는데···'

팀으로서도 내가 안 나가면 좋다. 그 등판만 없으면 하반기 시작과 동시에 출전시킬 수가 있는데 올스타전에서 던지고 나면 컨디션 조절을 위해 텀을 좀 가져야 한다. 나도 가기 싫고 팀도 굳이 원하지 않는데 출전하게 되었다.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내셔널리그의 다승과 평균자책 1위다.

‘사무국에서 당연히 출전하는 걸로 알고 있더라고. 묻지도 않는데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너무 빤히 보이는 거짓말은 못한다. 있지도 않은 부상 핑계를 댈까 생각을 했었는데 티를 안 내려면 부상자 명단에도 올려야 하고 일이 더 복잡해진다.

‘팔자려니 해야지 어쩌겠어. 거기 나가기 싫다고 일부러 질 수는 없잖아. 시간 참 빠르네. 개막전을 다저스로 치렀는데 상반기 마지막도 함께 하다니···’

상대는 저 지겨운 놈이라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좋은 기억이 많은 팀이 다저스다.

‘어이구, 반가운 분이 나오셨네. 들리는 소문으로는 컨디션이 오락가락한다는데 오늘은 어느 쪽이신가요?’

캐빈 럭스다. 다저스의 2번 타자. 올 시즌 들어 노쇠화가 표면으로 드러났다.

‘컨디션이 일정치 않다고?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참신하게 하는 거야? 그렇게 가리려 한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에요. 기복이 있었던 건 당신이 아니라 상대 투수였겠지.’

각 타자의 기량에 고하가 있듯이 투수도 마찬가지다. 럭스는 이미 각 팀의 1, 2 선발급 투수를 감당할 수 없는 상태다. 그나마 하위 순번 투수들을 잡아먹으면서 버텨왔을 뿐이다.

‘클래스는 영원하다? 보통 그런 표현은 절정기에서 내려오고 맛이 가면 쓰더라고. 럭스 당신도 한때는 탑 클래스였었지.’

와인드업을 하지 않고 세트포지션으로 편안하게 던졌다. 배트가 시원하게 허공을 가른다. 스윙이 겉돌고 있었다.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눈으로는 보이는데 몸이 못 따라주는 건가요? 아님 그 반대?’

내 싱커는 일반적인 투수의 변화구보다 늦게 변한다. 피치 터널이 길다는 이야기다. 이걸 공략하기 위해서는 좋은 동체 시력으로 공을 쫓아 순간을 포착하고 빠른 배팅스피드로 일격을 가해야 한다. 타이밍이 안 맞는다는 건 어느 쪽이든 그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다.

‘그걸 제일 잘하는 놈이 저 자식이지. 좋은 눈과 탁월한 배팅스피드의 배드볼 히터.’

오늘 우리 팀의 1루수는 카스트로다. 본업인 외야수나 할 것이지 우리 팀에 와서는 1루를 필과 번갈아 가며 맡는다. 1루 수비를 안 하는 날은 지명타자 이런 식이다.

투구 동작의 마무리 단계에서는 자연스럽게 1루 쪽을 향해 몸이 돌아가게 되는데 그때마다 재수 없는 얼굴이 보여 처음엔 많이 거북했었다. 그래도 지금은 소 닭 보듯 하며 잘 지내고 있다. 나도 그 정도의 비즈니스 마인드는 있다.

‘캐빈 럭스. 당신도 끝물이네.’

눈이 갔든지 몸이 안 따라주든지 간에 어느 쪽이든 안타까운 일이다. 밀림에서 제대로 사냥을 해내지 못하는 포식자는 자연스럽게 도태된다.

‘즉, 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거지. 그때는 끝물이 퇴물이라 불리게 되고··· 참! 인생이나 야구나 잔인한 면이 있어.’

“스트라익.”

타자의 애쓰는 모습이 매우 안쓰럽긴 한데 이렇게 무사통과 되는 타자가 있어서 솔직히 편하고 좋다. 이런 더러운 꼴 안 당하려면 나도 은퇴 시기를 잘 선택해야 할 것 같다.

“스트라익.”

타이밍을 못 따라가니까 미리 코스와 구속을 정해 놓고 게스 히팅을 하는 것 같은데 그런 걸로 공략하기에는 내 구질이 몹시 지저분하다.

‘그런 단순한 걸로 공략이 가능했으면 내가 어떻게 리그 1위 투수가 되었겠어?’

험악한 눈이 날 쏘아본다. 몹시 언짢아하는 것이 바로 드러난다. 공 두 개로 상대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흐흣. 너무 그렇게 애정 어린 시선 주지 마요. 당신도 왕년에 투수들 많이 잡아먹었잖아. 이 동네가 다 이런 걸 알면서 새삼스럽게···’

지금 같은 눈빛 아주 좋다. 그런 식으로 공을 쏘아보면 움직임이 더 잘 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느린 공으로 허덕이게 만들어 놓고 하이 패스트볼로···’

틱-

‘응? 맞췄어? 그걸 기다리고 있었나?’

노렸고 그 예측대로 공이 들어갔는데도 이런 타격밖에 안 된다면 정말 많이 곤란하다.

“일단은 공부터···”

작은 바운드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타구는 느리게 2루수 쪽으로 구른다. 이건 내가 잡아야 한다. 2루수는 수비 위치가 깊었고 1루수가 나와 처리하기엔 타구가 너무 느렸다.

‘내가 수비도 좀 한다고···’

날듯이 뛰어 타구를 건져 올렸다. 그 탄력 그대로 1루 쪽으로 달려가 타자 주자를 터치했다.

‘히힛. 나이스 플레이.’

내가 좀 빠르다. 슬쩍 웃으며 홈 관중의 열렬한 환호를 받고 돌아서려는데 세상이 기우뚱한다.

‘어? 뭐지?’

순간적으로 몹시 당황했다. 갑자기 확 밀쳐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홈인데··· 이런 개망신을···’

화가 나기보다는 부끄러움이 먼저 밀려온다.

“이런··· 야! 투수를···”

퍽-

‘헐! 나이스 샷!’

카스트로의 깨끗한 라이트 훅이였다. 너무 돌발적인 상황의 연속이라 내 머리에 부하가 걸렸다.

‘어떻게 된 거야? 럭스가 날 밀었고 카스트로가 럭스를··· 그런데 럭스는 왜 날 밀었지?’

머리가 정리되기도 전에 베그웰이 달려와 날 감쌌고 그 뒤로는 혼란의 소용돌이가 주변에 펼쳐졌다. 양 팀 선수들이 들소처럼 서로를 들이받았다.

‘한동안 이상하게 조용하다 싶더니 터졌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놈들을···’

나도 한바탕 어울리고 싶은데 베그웰이 놔 주지를 않는다.

“넌 저리로 가자.”

“베그웰. 난 당사자라고.”

들은 척도 안 한다. 베그웰에게 질질 끌려 현장에서 우리 덕아웃으로 옮겨져 격리되었다. 졸지에 관중 모드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다.

선수들이 대치하는 큰 무리가 있고 그 옆에는 양 팀의 코칭 스탭들이 맞서는 작은 무리가 있다. 젊은 선수들이 활극을 찍는다면 역시 연장자들은 점잖게 말로 타이르려 하고 있었다.

“투수에게 위해를 가하다니 이건 불문율에 어긋나잖아. 어디서 그런 행패를···”

역시 논리적인 우리 감독이다. 저런 배워 먹지 못한 놈들이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당신네 투수가 먼저 불문율을 어긴 거야. 어디서 뒤집어씌워. 과도하게 셀레브레이션을 하면서 우리 선수를 조롱했잖아.”

‘헐! 내가 언제··· 난 피해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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