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트레이드
“트레이드 말이 있던데 들었어?”
모처럼 경기가 없는 날이라 오전에 가볍게 훈련을 마치고 오후에 사무실에 들렀더니 고 감독이 이상한 말을 한다. 당분간은 홈경기가 이어진다.
“뭐라고요? 나를? 왜?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그건 좀 표현이 그렇지 않니?”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너무 외설적인 표현을 해버렸다. 고 감독 같은 오래 묵은 아저씨와 10여 년을 함께하면 다 이렇게 된다.
‘다 사람을 잘 사귀어야 하는 건데···’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문제이지만 지금은 그게 포인트가 아니다.
“연장 계약도 해줬잖아요. 도대체 뭣 때문에···”
“말도 끝까지 안 들어보고 오버하지 마. 넌 아니야. 지금 1위로 잘 나가고 있는 팀이 주축 투수를 왜 보내겠어. 프런트가 미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그건 그렇고··· 그 홍두깨는 말이다. 너 홍두깨 본 적 있어?”
본 적은 없지만, 뭔지는 안다. 다 누구 때문에 알게 된 거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별안간 홍두깨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모르겠다.
“홍두깨가 말하기는 좀 민망하지만, 그 거시기의 은유적 표현인데··· 적당한 비교 대상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왜 나를 아래위로 훑는 것인지···.
“사이즈가··· 음. 비교하기가 좀 어렵겠네.”
‘뭐가 비교하기가 어렵다는 거야? 내가 뭐 어때서··· 정말 홍두깨로 패버리고 싶네. 아! 이 생각은 너무 심했어. 죄송해요.’
“아주 단단하고··· 집안에 가까이 있는 물건이지. 그 다듬잇돌 두드리는 방망이니까. 요즘 애들은 알 리가 없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누가 들으면 조선 시대에서 타임슬립이라도 한 줄 알겠다. 정말 리바이벌은 사양하고 싶다. 이 이야기를 한 열 번은 들은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다 내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밤도 아닌데 굵고 단단한···”
제자를 앞에 두고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다 하려고 한다.
“이런 게 중의적인 거야. 우리 조상의 개방된 성의식과···”
“그건 그만하시죠. 트레이드 이야기는 뭐예요? 나하고 관련이 없다면 왜 하신 겁니까?”
쓸데없는 이야기를 도저히 더 이상은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게 너하고 관련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말이다.”
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사실 트레이드 말만 들어도 두드러기가 솟는 것 같다. 자이언츠로 오게 된 트레이드가 지금으로서는 내게 좋게 작용한 면이 많지만, 처음엔 마음고생 엄청 했었다. 다시 또 트레이드의 당사자가 되어 그 짓을 하고 싶진 않다. 그냥 은퇴할 때까지 한 팀에서 쭉 있고 싶다.
말하는 걸로 봐서는 내가 대상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관련이 있다는 건 또 무슨 뜻인지 짐작이 안 간다.
“일반적으로 트레이드를 하는 기준이 있잖니.”
그 정도는 이제 나도 안다. 원래는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었지만, 그 당사자가 되어 한바탕 구르고 나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게 된다.
메이저리그에서 트레이드가 일어나는 이유를 크게 나누면 두 가지다. 윈나우(win-now)이든가 아니면 리빌딩울 위해서다. 그 바탕에는 철저한 비즈니스 마인드가 있다.
리빌딩을 위해서라면 고액 연봉을 받는 나이 든 선수가 그 첫 번째 대상이다. 팀의 페이롤을 낮추기에 유용하고 다수의 젊은 유망주 확보가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팀은 지금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달리고 있는데 리빌딩은 말이 안 된다.
‘프런트는 지금 이 성적도 불안한가?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1등을 하고 있어도··· 윈나우 쪽이라면 타자 보강이겠네. 데려오는 건 그렇다고 쳐도 누구를 빼겠다는 거야? 누가 오더라도 내야수는 절대 안 돼.’
베그웰은 걱정 없을 것 같고 외야의 레블론이나 알버트는 고정시켜야 한다.
‘크리스가 좀 위험하나?’‘
그렇지만 크리스도 탑은 아니어도 제 몫은 해내는 건실한 타자다. 그렇지 않았다면 1번을 맡길 리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밖에 생각이 안 된다. 누가 온다고 해도 뺄 선수가 없다.
‘결국 내야수 중에 누가 빠지게 되는 건가? 그건 아주 곤란한데···’
그라운드 볼러에게는 안정적 내야 수비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아! 그렇지. 지명타자가 있었네. 그렇다면야···’
확실한 타자가 온다면 좋을 것 같다.
“누가 이야기 되고 있는 건가요?”
“구리엘 카스트로.”
“뭐라고요? 누구?”
진짜로 놀랐다.
‘하아! 그 빌어먹을 놈. 재수가 없으려니 별놈이 다··· 음. 그렇지도 않나?’
듣기 싫은 이름이라서 듣는 순간 열이 확 올랐는데 가만 생각해보니까 그가 온다면 나에게 별로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고 감독이 그래서 나하고 관련이 있다고 한 건가?’
카스트로는 내게 천적과도 같은 타자였다. 나를 상대로 한 통산 타율이 4할에 가깝고 홈런만···
‘어휴!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나네.’
정말 상종하기 싫은 놈이었다. 예전에 벤치 클리어링으로 주먹다짐을 하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때 베그웰이 말리지만 않았어도 한 대 때려줄 수 있었는데··· 한 대 때리고 여러 대 맞았겠지만··· 피지컬 차이가 웬만해야지.’
기세로는 눌리지 않았었다. 어쨌든 그놈은 그냥 싫은 놈이었다.
하지만, 감정은 감정일 뿐이다. 이 세계는 비즈니스가 우선하는 사회생활이나 마찬가지다. 분명한 건 그가 온다면 직접적으로는 내 평균자책이 조금은 떨어질 거고 팀의 공격에는 무조건 플러스 요인이다.
‘외야수라는 게 좀 걸리긴 하는데 누가 지명타자 자리로 가면 되니까. 그럼 루터가 밀리게 되는 건가?’
우리 팀 지명타자는 현재 타순에서 7번을 친다. 장타력은 있지만, 타율이 낮다. 타격 전문 선수로서 경쟁력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동안 팀에 마땅한 대체 자원이 없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참! 팀이 잘나가서 잘리게 되는 셈이네.’
아이러니다. 이젠 프런트가 적당한 선수로는 만족을 못하는 것 같다. 냉정히 말하면 루터가 인간으로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것만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자리를 지킬 수는 없다. 만약 그가 트레이드가 된다면 새로운 기회를 받았다고 좋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카스트로가 진짜로 올 수는 있는 거야?’
“브레이브스가 그를 처분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올 성적이 별로이긴 해도 그만한 타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리빌딩을 준비한다고 해도 그는 브레이브스가 보호해야 할 자원 아닌가요? 그리고 그도 우리 팀은 별로라고 생각할 것 같은데···”
브레이브스도 빅마켓으로 분류할 수 있는 팀이다. 팀페이롤도 정확한 순위는 모르겠지만 상위권에 든다. 동부 지구 전통의 강팀이고 월드시리즈 우승도 여러 차례 했었다. 그런데 왜 그런 팀이 그런 유능한 타자를 넘긴단 말인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인 것 같다.
“선수 개인의 의견이야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 그는 아직 FA 전인데 트레이드 거부권이 있을 리가 없지. 너도 이제 이런 것쯤 알만한 연차인데 그런 말이나 하고 있고. 현실감 좀 가지고 살아.”
곱고 아름답게 말할 수 있는 걸 굳이 이렇게 비틀어서 말을 하니까 늘 잔소리처럼 들린다. 고 감독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이젠 의례히 그러려니 한다.
“그래도···”
“이번 시즌이 서비스 타임 마지막 해인데 브레이브스가 FA로 잡을 생각이 없으니까 시장에 내놓은 거 아니겠어?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FA를 앞둔 선수를 트레이드시킬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일반적으로 구단은 드래프트 등을 통해서 유망주들을 선점해 기량을 키운다. 다수는 그 과정에서 버려지지만, 살아남은 소수를 서비스 타임 동안 열심히 써먹는다. 그러다 보면 옥석은 자연스럽게 가려지고 기량이 만개해 몸값이 상종가를 치면 팔아넘기는 수순을 밟는다. 그 대가로 유망주나 유망주를 얻을 수 있는 권리를 받아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
이게 보통 스몰마켓팀의 전략이다. 그들로서는 웬만해서 FA의 몸값을 감당할 수가 없으니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브레이브스는 결이 다른 빅마켓 구단이었다.
“지금 상황을 추측해 보면 대체 자원이 풍부해서라고 해석이 되긴 해. 선수를 파는 전제 조건은 대체 자원이 마련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 팀은 지금 치고 올라오는 외야 자원이 빵빵하지. 근래 몇 년간 윈나우 모드였으니 FA계약이 부담스러워진 것도 있을 거고···”
“어느 정도 확실한 건가요?”
“상당히 접근했다는 말이 들려오더구나.”
이건 정확하지 않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솔깃했는데 흥미가 갑작스럽게 식는다.
“우리가 FA 계약을 내년에 안겨 줄 수 있다고 쳐도 당장 데려오려면 바꿀 수 있는 선수가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저쪽에서 탐을 낼 만한 유망주를 우리가 가지고 있긴 해요?”
“없진 않지. 특히 투수 쪽 자원이 괜찮아. 요 2~3년 사이에 자체 팜에서 올라온 선수들이 빅리그에 안착한 실제 사례도 여럿 있었잖아. 로저스, 체이스 그리고 올 시즌 존슨도 있지. 그들을 넘기지는 않겠지만 그들과 같은 시기에 뛰었던 유망주라면 한번 걸어볼 만하다고 많이들 생각할 거다.”
내 생각엔 될 놈이 되었을 뿐이지만, 100의 능력치를 가진 유망주에게 99가 밀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니까 팜의 선수를 바라보는 나와는 다른 시선이 있을 것 같긴 하다.
트레이드는 양날의 칼이다. 잘하면 전력 상승에 확실한 도움이 되지만 삐끗하면 그 칼날에 내 손이 베이는 경우도 생긴다.
‘나하고 베그웰을 트레이드해 놓고 트윈스 프런트가 욕을 엄청 먹었다고 하더라고.’
상당히 흐뭇한 마음으로 그 소식을 기쁘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 트레이드의 관건은 브레이브스 쪽에서 원하는 유망주를 자이언츠에서 어디까지 줄 수 있느냐겠지. 조건이 맞춰지면 바로 발표가 날 거야. 프런트가 결심만 하면···”
그런 말은 나도 하겠다. 조건을 맞춰 결단을 내린다. 이런 말이 세상에 제일 못 믿을 말이다.
“아이고! 줄 거 다 주고 하는 거라면 무슨 득이 있겠어요? 미래를 팔아서 현재를 사는 것도 어느 정도라야지. 안 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겠네요.”
나름 정확한 현실 판단으로 내린 결론이었는데 이 말을 들은 고 감독이 슬쩍 웃는다. 동감한다는 건지 안 한다는 건지 반응이 애매하게 느껴진다.
“일리는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면 홍두깨를 휘두르는 쪽만 득이 있는 건 아니라서. 때론 맞아도 어떻게 맞느냐에 따라서 득이 생길 수도 있지. 잘 생각해 봐. 이런 단순한 놈 같으니라고. 넌 아직 멀었어.”
그놈의 홍두깨는 무슨 말에든 끼워 넣는다.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사람하고는 말을 말아야지.’
그런 놈 없이도 이번 시즌 우리 팀은 아주 잘 나갔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