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투수 참 어렵네
타자의 배트가 맹렬한 기세로 대기를 가른다. 순간적으로 목표물과의 가벼운 접촉이 일어났다. 접점을 확인할 틈도 없이 1루를 향해 줄달음질치는 타자. 빠르게 바운드 된 타구. 인플레이다.
3루수 테일러가 대시한다. 어려운 스텝이었지만 몸을 낮추며 유려하게 공을 건져 올렸다. 짧은 디딤발에 이은 빠른 송구가 이어졌다.
‘우와! 저런 게 돼?’
투수를 해야 할 선수가 포지션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송구에 제대로 힘을 실을 수 없는 스텝이었다. 이건 90% 어깨 힘만으로 던진 거다.
조금 비켜나갈 듯했던 송구를 1루수 필이 팔과 다리를 쭉 펴 글러브 끝으로 잡아냈다. 둔중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함이다. 저절로 박수가 나온다.
‘우리 수비는 정말···’
거의 내야 안타가 될 것 같았던 타구가 그냥 평범한 땅볼로 끝나버렸다.
난 오늘 구속 차이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느리게 던지는 공은 평소처럼 조절이 가능했지만 좀 세게 던지면 공에 제대로 회전이 걸리지 않아 휘는 각이 제멋대로다.
다양한 로테이션과 구속 조절이 함께 어우러져야 제 위력을 발휘하는 내 투구가 오늘은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손끝 감각이 이상한가? 실밥을 제대로 채이질 않네.’
내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어 제구되지 않으면 빠른 볼은 나에게나 빠르지 타자에게는 리그에서 하급의 밋밋한 느린 공일 뿐이다. 그래서 초반부터 아예 봉인하고 던지질 않고 있다.
느리고 빠르게가 아니라 느린 공과 더 느린 공으로 구분해서 던지는 중이다. 그런데 어이없게 이런 상황인데도 실점이 없다. 지난 이닝까지 매회 안타를 맞고 1볼넷을 줬지만, 그럭저럭 버텨 나가고 있었다.
‘지금 같은 호수비가 없었다면 일찍 무너졌을지도 모르지.’
파드리스와의 원정 시리즈 3차전 5회 투아웃을 잡았다. 주자를 내보내지 않은 첫 이닝이다.
평소와 다르게 구위에 자신이 없으니 꼭 필요한 때 스트라이크를 넣기가 쉽지 않다. 주로 던지는 유인구도 내가 자유롭게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을 때 유인이 되는 거지 그게 안 되니까 유인구 위주의 피칭이란 게 애초부터 성립할 수가 없었다.
큰 걸 피하려고 낮게 던지다 보니 스트라이크 존의 다양한 활용도 제한받아 각 타자와의 승부가 길어졌다. 아직 5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85구나 던졌다
‘그런데 왜 회가 지날수록 느낌이 이상하지?’
악전고투를 거듭해 여기까지 왔는데 이번 회 들어 묘하게 투구가 좀 편해진 감이 있다.
‘될 대로 되라고 마음을 내려놓아서 그런가? 한 석 점 준다는 마음이었는데 무실점이면··· 한 타자만 더 잡고 오늘 등판은 마무리하면 되겠네. 이제 다 왔잖아.’
던지다 도저히 안 되면 스스로 내려갈 생각까지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승리 투수가 될 수 있는 5회까지 와 버렸다. 지금 스코어는 2:0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어떻게 매번 컨디션이 좋기만 하겠어. 아쉽지만 마무리 잘 하고···’
오늘 투심을 마음대로 던질 수가 없어 빠른 것의 용도로는 주로 슬라이더를 사용했고 느린 것은 싱커 조합으로 타자를 상대해 왔다. 오늘 내 구속 변화는 75~90마일의 범위가 아니라 75~80마일의 범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가만, 위력이 없는 공이 있을 수 있나? 위력이라는 게 상대적인 건데··· 의외성이 있다면···’
지금 상대 타선은 두 바퀴 이상 돌았다. 느린 슬라이더와 싱커를 계속 봐 왔었다. 엉성하지만 구속 차이를 주려고 노력은 했었다. 엉성했기에 상대의 타격 타이밍은 거기 맞춰져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원래 내가 충동적인 성격이 아닌데 지금 밋밋한 빠른 볼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호기심을 누르기가 어렵다.
‘하아! 뭐 한번 해보는 거지. 두 점 여유도 있고 주자도 없어. 게다가 투아웃이잖아.’
베그웰의 사인에 고개를 저었다. 저질러버렸다.
‘나라고 컨디션 좋은 날만 이어지는 게 아니잖아. 이럴 때 실전으로 시험도 해보고 그래야 어려울 때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거라구.’
필살기인 자기 합리화를 시전했지만 그것이 가슴 떨림까지 막아주진 못했다.
‘빌어먹을··· 홈런 맞아봐야 1점이야.’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되던 솔로 홈런이 오늘은 왜 이렇게 부담스러운지 모르겠다.
타석에 들어선 타자의 몸쪽으로 강하게 투심을 던졌다. 혹시 빠질까 봐 가운데를 향해. 여전히 손끝에 걸리는 실밥의 느낌이 어색하다.
틱-
‘어? 빗맞혔어. 이걸?’
제법 빠른 타구였지만 일단 구르면 우리 내야진의 수비 범위를 벗어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저놈은 왜 초구부터 치고 난리야.’
아웃 카운트를 쉽게 잡아 좋기는 하지만 이래 가지고서는 테스트의 의미가 없다. 저 타자 녀석이 실수하지 않았다고 누가 보장을 할 수 있을까? 스스로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데이터가 필요했다.
‘몇 번 더 해보는 수밖에 없나?’
삼자범퇴로 5회를 무사히 마쳤지만 내 관심은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뭐라고? 한 회 더 던지고 싶다고?”
감독의 눈이 너 제정신이냐고 묻고 있는 것 같다.
“예. 5회에 필이 팍 왔는데 한 이닝 정도는 더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헛. 그것참! 하고 싶다면 해야지. 지금 투구 수가···”
감독은 결국 말리지 못했다.
‘기죽이기 싫다는 것이겠지.’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다.
“86개입니다.”
“100개는 안 돼. 99구까지는 던져보게.”
“옙. 감사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제 되든 안 되든 해보는 수밖에 없다. 돌아갈 다리를 태워버렸다.
“하핫. 이거 왜 이러는 거야?”
내 마음속에서 오늘 게임은 끝났지만, 타자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6회 초 우리 팀 타선이 화려하게 폭발했다. 역시 각자의 입장 차이가 있다.
‘점수를 너무 많이 냈잖아.’
2:0이 8:0이 되어버렸다. 요즘 2점, 3점 찔끔찔금 점수를 내더니 8점이라니 이건 너무한다.
‘그냥 이걸 두 게임에 나눠서 4점씩 내면 안 되나? 한 점만 이겨도 이기는 경기에 8점 차이면 쓸데없는 낭비 아니냐구.’
메이저리그의 팀의 지난 시즌 게임당 평균 득점은 4점이 조금 넘는다.
‘퀄리티 스타트 3점이 아무렇게나 만든 기준이 아니라고.’
우리 팀은 4월에는 평균치를 월등하게 상회했지만 5월에는 평균에 상당한 차이로 미달했다. 그런데도 우리 팀의 5월 승률은 6할이 넘는다. 이유는 평균 실점이 리그 최하라 그렇다.
‘단순하게 말하면 이렇지. 좀 복잡하게 말해볼까?’
대부분의 스포츠 경기가 그렇지만 야구도 더 많은 득점과 더 적은 실점으로 승부가 결정된다. 팀의 승률에는 당연히 그 팀의 득점과 실점이 긴밀하게 관여될 수밖에 없다. 한 게임 한 게임을 단독으로 들여다보면 10점 차로 승부가 나는 게임이 있을 수도 있고 1점 차의 줄다리기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한 시즌에 100경기 이상의 많은 경기를 치러 표본이 늘어나면 팀의 전체 득점과 실점 기록은 승률과 거의 일치하게 된다. 이것을 이용한 계산법이 피타고리안 기대 승률이다.
‘겁나 복잡한 계산법이 있지.’
결론은 단순하게 말해도 그렇고 복잡하게 계산해도 우리 팀은 현재 잘 나간다 이거다. 그 잘 나감에 편승해서 내 개인적인 궁금증을 해결해 보려고 한다.
8점 차이라면 승패의 부담은 없어졌다. 설혹 여기서 내가 몇 점을 내어주더라도 승패가 뒤집힐 일은 없다. 물론 그때까지 감독이 그냥 내버려두지도 않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최고 투수들 중에서 구위로만 따진다면 최하급이라고 생각되는 투수가 글래빈이다. 통산 4,000이닝을 넘게 던졌고 305승이나 해낸 괴물 투수지만 투구 영상으로 확인한 그의 구위는 정말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이제 이번 회에 그의 흉내를 좀 내볼 생각이다.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거기서 뭔가를 얻어낼 수 있다면 제약을 한 꺼풀 벗어던지고 한 단계 나은 투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틱-
“파울.”
초구부터 타자의 배트를 이끌어 냈다. 글래빈은 이럴 때 한결같이 집요하게 아웃코스를 공략했었다. 패스트볼이라고 차마 부르기 민망한 구속의 속구와 체인지업을 번갈아 가며 존의 언저리에 꽂아 넣었다.
그와는 구질이 다르니까 난 그걸 투심과 싱커로 해볼 생각이다.
“볼.”
존 아래쪽을 노린 싱커였는데 타자가 참았다. 평소에는 배트가 거의 따라 나와 주던 공인데 빠른 싱커와 섞자 않으면 구별이 가능한 것 같다. 오늘 빠른 싱커는 안 된다. 그건 무늬만 싱커지 무브먼트가 밋밋하다.
‘한 번 정도 타순이 돌고 나서부터 골라내는 빈도가 높았던 것 같네. 내 공의 구위라는 게 콤비네이션이라는 건가? 그럼 이건···’
“스트라이크.”
투심이라고 던진 건데 예리하게 꺾이는 느낌이 없다. 오늘 같으면 그냥 밋밋한 작대기 속구다. 90마일이 채 안 되는 똥볼. 그런데 타자는 반응하지 않았다.
‘빠른 공을 머리에서 완전히 배제한 건가? 하나 더 던지면 반응할까?’
보통 빠른 볼을 던질 때 난 철저하게 인코스 승부를 택했다. 대각선 승부는 볼 배합의 기본이다. 타자 눈에서 먼 곳을 브레이킹 볼로 공략하고 가까운 곳은 빠른 공으로 찔러서 의외성을 만들어 냈었다.
반대로 던졌다. 아웃코스 존의 가운데로 밋밋한 속구를 꽂아버렸다.
“스트라이크. 배터아웃.”
‘어? 이걸 안 쳐? 설마 못 친 건가? 이럴 수가 있나.’
당황스럽다. 큰 거 한 방 맞을 각오를 하고 던진 건데 아예 배트가 나오지도 않는다.
‘우연일지도 모르잖아. 다음 타자에게···’
타악-
아웃코스에 빠른 볼 연속 두 개를 던져서 우중간을 완전히 가르는 2루타를 맞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배트가 나왔다. 역시 내 볼은 무브먼트가 약하면 그냥 똥볼이다.
‘벌써 의외성의 효과가 떨어져 버린 건가? 이걸 존에서 많이 빼면 티가 날 텐데··· 주메뉴를 패스트볼로 하는 건 무린가?’
투심을 아웃코스 존에 넣었다가 빼고 다시 싱커만 던지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별별 것을 실전에서 다 해봤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연속 안타를 맞고 2점을 내줬지만, 투아웃을 잡았다. 아직도 주자는 2루에 남아 있고.
구위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지표로는 헛스윙률을 보고 피안타율과 피장타율을 참고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탈삼진이 많아 인플레이 타구를 줄일 수 있고 피홈런과 같은 장타를 억제할 수 있으면 좋은 구위를 가졌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이닝을 던져본 느낌은 좀 다르다. 지금 내 구위는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최하수준이었다. 그런데 똑같은 구위로 경우에 따라 삼진을 잡았고 안타도 맞았다.
‘평소 내 구위가 멘탈과 관련이 있었나? 의외성이 동반되면 평범한 공도 마구가 되고 뻔뻔한 얼굴로 태연하고 자신 있게 던지면 위력이 상승하는 건가?’
정말 던지면 던질수록 답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