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상성이 좋아
견제구를 하나 던졌다, 길게 리드를 잡고 있던 1루 주자가 화들짝 놀라 기다시피 하면서 1루로 귀루했다.
4회 첫 타자에게 내야 안타를 맞았다. 묘하게 깎여 맞은 타구가 3루 쪽 라인을 타고 느리게 흘렀다. 3루수가 대시해 잡기엔 좀 짧았고 포수가 달려가기엔 지나치게 많이 굴렀다. 기분 나쁜 주자가 나갔다.
‘운만 좋은 놈이 겁도 없이···’
내가 주자 견제 같은 거 잘 안 해서 그렇지 상당히 잘하는 편이다.
어느 순간부터 주자 자체가 잘 안 생기니까 할 일이 없었고 타자 상대에 전념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인 것 같아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주자가 리드를 그렇게 길게 가져가면 안 하던 짓도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내가 대학에서 원 포인트 릴리프 생활을 할 때 고 감독이 별 훈련을 다 시켰다고. 만능형의 투수가 되어야 한다 어쩌고 그러면서···’
느닷없는 견제구 하나로 상대의 유니폼을 얼룩지게 만들었다. 흰색 홈 경기 유니폼이 붉은색 흙 범벅이 되어버렸다. 털어내도 저 얼룩은 경기 내내 지워지지 않는다.
주자의 리드가 아까보다 한 발짝 줄어들었다
‘일반 보폭의 세 개? 저놈이 그래도···’
주자를 다시 한 번 째려봤더니 슬그머니 두 개 반이 되었다.
‘음. 그래. 그 정도는 내가 참아주지. 너도 애쓰는구나.’
주자는 1루에 붙여 놓았고 이제 문제의 2번 타자를 상대하면 된다. 1회를 마치고 바로 자료를 찾아봤더니 지난 시즌 아메리칸 리그에 데뷔해 올 시즌을 앞두고 이적한 선수였다. 곧 FA가 다가온 타자와 맞바꾼 유망주.
보낸 선수보다 타격 능력은 좀 떨어지는 것 같지만 그는 나름 유능한 내야수였다. 타격이 되는 젊은 내야수는 귀한 존재다. 나 하고는 묘하게 길이 엇갈려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지난 1회가 나와 만난 첫 타석이었다.
‘어쩐지 전에 디-백스에 껄끄러운 타자가 하나 있었는데 왜 안 보이나 싶더니···’
자료상으로 판단하기엔 괜찮은 선수처럼 보였다. 소위 말하는 5툴 플레이어의 전형이었다.
‘너무 좋아.’
아주 고른 평균 능력치 이상을 갖춘 수준급의 선수. 하지만, 그 오각형이 좀 작았다. 각각의 능력이 평균치를 조금 상회하는 정도였다.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는 거야. 일용할 양식을 이렇게 내려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
저런 어정쩡한 능력은 탑 플레이어를 만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평균 수준 선수들끼리의 경쟁이라면 특출나 보일 수 있지만, 나에겐 그저 말랑말랑하고 만만한 타자일 뿐이다.
‘아! 잘하는 게 하나 있긴 하더군. 95마일 이상의 패스트볼 공략에 강점이 있더라고. 고맙게도 그런··· 음. 게스 히터의 반대 개념이 뭐지? 게스 에어컨은 아니겠고. 컨택터 정도가 맞을까?’
야구를 이십 년 가까이 하고 있는데 용어가 바로 떠오르지 않는다면 아마 그런 용어는 없는 게 틀림없다.
어쨌든 나는 95마일은 고사하고 90마일도 겨우 던진다. 저 타자가 잘 친다고 하는 그런 빠른 볼을 던질 수가 없다. 매우 유감스럽다. 저 친구는 리그를 옮겨서 더러운 상성을 만난 거다.
‘운명이라고 생각하려무나. 내가 의도한 일은 아니니까 너무 미워하진 말아 줘.’
보통 그런 패스트볼 킬러들은 특징이 있다. 투구 된 공에 대한 예측이 빠르고 배팅스피드가 탁월하다. 이게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지 않으면 빠른 볼을 효과적으로 공략할 수가 없다. 물론, 그 조건은 변화구를 칠 때도 도움이 되긴 한다. 충분히 볼을 보고 마지막 순간에 빠른 배팅스피드로 볼을 걷어내면 된다.
‘이론상으로는 그래. 저놈이 나름 잘나갔던 건 아직 임자를 못 만나서 그랬던 거지. 첫 타석 때 갈팡질팡하던 게 진짜 많이 곤란해서였어.’
던져진 공에 대한 예측은 궤도 예측이다. 패스트볼의 경우 미리 예측을 해도 그 정해진 궤도가 많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수준급 변화구는 다르다.
나는 그 오묘한 변화가 일어나는 공을 타자가 지겨워할 때까지 던져줄 수 있다. 그리고 익숙해진 타격 메커니즘을 타자가 인위적으로 매번 변화시키기는 아주 어렵다. 패스트볼 킬러가 되기 위해 연마한 기술을 아무 공에나 다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스트라익.”
일단 관찰하기로 한 것 같다. 배트를 낼 생각 자체가 없어 보였다.
‘연구하는 자세. 아주 좋네. 내가 특별히 좋은 것 하나 보여 줄게.’
“스트라익.”
2구는 모처럼 내가 낼 수 있는 최고 빠른 구속의 속구를 하나 보여줬다. 인코스를 정확하게 꿰뚫는 스트라이크였다. 상대적으로 변화가 적은 투심 패스트볼. 심판의 콜이 떨어지자 타자가 자기 헬멧을 한 손으로 툭 친다. 굉장히 아쉬워하는 듯 보인다.
‘그 정도는 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 있으면 다음 공 꼭 쳐야 돼.’
다음 공을 위한 나름대로의 목적구였다. 내 기대에 부응해 줄 수 있을 정도의 유능함을 가진 타자일 것이라 믿는다.
‘난 널 믿어. 믿는다구.’
틱-
믿음은 보답받았다. 2구와 비슷한 궤적을 가진 싱커에 타자의 배트는 여지없이 나와 주었다. 싱커를 세게 던졌다. 아마 타자가 2구와 구별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가 예측한 궤적과는 다른 움직임을 가진 공의 윗부분을 강하게 타격하면··· 아주 적당한 속도를 가진 내야 땅볼이 나온다.
‘이건 수학도 아니고 산수라고. 2루···’
“아웃.”
우리 내야 수비는 매우 안정적이다. 번개처럼 유격수에게서 2루수로 다시 1루수에게 그림 같은 더블플레이가 이루어졌다.
‘어쩌면 좋니? 니가 조금만 덜 유능했으면 공을 그렇게 맞히지는 못했을 텐데 정말 적당이라고밖에 표현이 안 되네. 적당한 타자 아디오스.’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헤드퍼스트 슬라이딩까지 시도했던 1루 주자의 흙으로 범벅이 된 몰골이 안타깝다.
‘너도 신에게로(A Dios: To God) 꺼져버려.’
***
“아! 병살입니다. 1사 후 안타를 쳐냈습니다만 디-백스 마치 공식처럼 다시 유격수 앞으로 타구를 보내고 맙니다. 6-4-3 이어지는 더블 플레이가 나왔습니다. 공수교대. 아직 스코어는 0:0입니다.”
“세 개째 병살이군요. 역시 리그 최고 수준의 땅볼 생산 능력을 가진 So답게 안타 뒤 병살로 이렇다 할 위기도 없이 7회까지 호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직 디-백스의 누구도 2루를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타자들이 힘을 좀 내줘야 할 차례입니다.”
So의 호투는 경기 전부터 예상되었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모자라 보였던 디-백스의 선발 제닝스까지 그에 못지않은 역투를 선보이며 팽팽한 투수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렵군요. 이상하게 오늘 경기 안 풀리네요. 어제도 그렇고 우리 타자들 타격감이 죽어 버린 것일까요?”
중계 중임을 알려주던 ON 표시가 꺼지자 캐스터 그래엄이 헤드셋을 벗으며 툴툴거렸다.
“그런 것도 영향이 있겠지. 타격감이야 오르내림이 있는 거니까.”
“그래도 이건 너무 하잖아요. 제닝스 같은 투수를 상대로 7회까지 한 점도 못 내다니···”
“오늘 제닝스의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였잖아. 소위 말하는 긁히는 날. 그냥 그런 날이야. 하지만 그는 이제 끝났어. 투구 수가 100개가 넘었는데 이번 회에 다시 올라오진 않겠지. 어떻게든 한 점만 뽑으면 이길 수 있을 거야. 오늘 So가 완봉 분위기잖아.”
해설자 데이빗이 달래듯 차분하게 위로를 건넸다.
“그건 그렇죠. So는 보면 볼수록 참 기가 막히네요. 아직 68구밖에 안 던졌다니··· 이대로라면 90구가 되기 전에 경기가 끝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데이빗. 최소 투구 수 완봉 이런 기록도 있나요?”
그래엄의 흥분을 식히기에는 So 이야기가 즉효였다. 이미 그래엄의 분노는 녹아내리고 얼굴에 짙은 웃음이 떠오르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집계하진 않는데 알려진 기록들은 좀 있지. 메이저에서 최소 투구 완봉기록은 1940년대라 좀 오래되긴 했지만, 보스턴 브레이브스의 레드 바렛이 세운 9이닝 58구야.”
58구면 타자당 대략 공 두 개로 한 게임을 끝냈다는 이야기다.
“예? 그렇게나 적어요? 하핫. 어떻게 게임을 했길래··· 그건 너무한 것 같네요.”
“좀 가까운 시기로는 매덕스가 세운 76구 완투승도 있었고, 80~90개 정도 투구 수의 완봉은 생각보다 좀 많을 거야.”
딩동뎅-
차임벨이 울리며 다시 ON에 불이 들어왔다. 손에 들고 있던 헤드셋을 머리로 가져가며 그래엄 얼굴의 웃음기는 사라졌다. 그의 워킹모드에도 불이 들어왔다.
“8회 초 디-백스의 투수 교체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불펜을 가동하는군요. 자이언츠는 3번 베그웰부터 공격이 시작됩니다. 좋은 타순입니다. 여기서 기필코 점수를 내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바뀐 투수 펠러 천천히 와인드업···”
“베그웰이 오늘 시프트에 막혀 안타를 쳐내진 못했지만 때린 타구들의 질 자체는 나쁘지 않았거든요. 이번 타석에서는 한 번 기대해 봐도 좋을 겁니다.”
“초구 볼. 높았습니다. 구속이 거의 100마일에 육박하네요.”
“조나단 펠러는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영건이죠. 올 시즌 평균 구속이 98.4마일을 기록해 지금까지 리그 탑 5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디-백스의 젊은 투수는 거침없이 100마일에 육박하는 패스트볼을 꽂아 대기 시작했다. 강약조절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듯 강강강 일변도였다.
“빠릅니다. 구속이 다시 99마일을 찍습니다.”
“이런 구위라면 한가운데 몰리더라도 쉽게 공략하기는 어렵겠네요. 제구가 일정하지 않아서 좀 더 까다로운 면도 있고··· 투 볼 투 스트라이크.”
딱-
“아! 떴습니다. 정확하게 맞진 않은 것 같습니다. 가벼운 외야 플라이··· 어! 타구가 뻗습니다. 우익수! 우익수를 넘어갑니다. 타구는 우중간을 완전히 갈랐습니다. 베그웰. 빠릅니다. 2루를 돌아 3루. 슬라이딩. 여유 있게 3루에 안착했습니다. 이걸 행운이라고 해야 하는 것일까요?”
생각지도 않던 3루타에 얼떨떨해진 그래엄은 바보 같은 질문을 해버리고 말았다. 스포츠 중계용 방송 용어로 운은 부적합하다. 열혈팬을 상대로 당신 팀은 운이 좋아 이겼습니다는 해선 안 될 말이다.
“행운이라고 말하긴 어렵죠. 이 시프트로 디-백스는 이미 안타성 타구 2개를 범타로 처리했었습니다. 모험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죠. 체이스필드라는 넓은 외야를 가진 구장에서 너무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그 대가를 받았습니다. 베그웰의 훌륭한 3루타였습니다.”
디-백스로서는 단타 두 개와 3루타 하나를 바꾼 셈이 되어버렸다.
“8회 드디어 노아웃에 주자가 3루에 갔습니다. 한 점. 1점이면 됩니다. 오늘 우리 투수는 So입니다. 4번 레블론 5번 필이라면 깊은 외야플라이 정도는 충분히 쳐낼 수 있는 타자들입니다.”
자신의 실수를 감싸준 시기적절한 해설자의 지원에 힘입어 캐스터 그래엄의 음성은 높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