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100화 (100/200)

100화. 오늘도 그라운드는 평온하다

“시프트가 뭐 저래?”

외야수들이 위치가 통상적인 위치보다 앞으로 바싹 당겨져 있었다. 내야수들은 정상 수비 위치. 짧은 안타를 막겠다는 생각인 것 같은데 상대가 뭔가 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베그웰 전용 시프트가 나오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주자 없이 투아웃 상황에서 베그웰이 타석에 들어서자 벌어진 상황이다. 오늘 게임에선 1회 공격은 별 소득이 없을 것 같다.

‘계산이 어떻게 되는 거야? 만약 통상적인 단타를 막고 단타 하나가 2루타로 변하면 누가 득이지?’

이곳 디-백스의 홈구장 체이스필드의 외야는 펜스의 중앙이 124m이지만 중앙이 각진 형태라서 중앙에서 양쪽으로 펼쳐진 좌중간과 우중간이 126m로 더 길다. 한마디로 외야가 넓은 구장이다. 돔구장이라서 기류가 안정적이고 애리조나의 건조한 기류 때문에 타구의 비거리가 더 나온다고 알려진 타자친화형 구장이다.

‘여기서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베그웰은 느리지 않다. 외야수를 저렇게 당겨 놓으면 2루타가 3루타로 바뀌는 경우도 생길 거다. 그리고 플로리다에서 보니까 의도적으로 공을 띄우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한 것 같았는데 웬만큼만 띄우면 평범한 외야플라이가 2루타로 바뀔 수도 있다.

좀 밋밋하게 끝날 것 같았던 1회 공격의 마지막에 볼거리가 하나 생겼다.

“베그웰. 다시는 저 짓 못하게 외야로 하나 띄워 버려.”

“저거 무리수야. 심리적으로 압박하겠다는 건데··· 베그웰도 빅리그 4년 차라고 그게 되겠어?”

선수들은 별거 아니라는 듯 반응하고 슬쩍 감독을 봐도 그냥 덤덤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주자 없이 투아웃인데 무슨 작전이 있겠어. 그나저나 베그웰이 그렇게 신경 쓰이는 타자인가?’

시범 경기에서 터졌던 장타력은 없었던 일인 양 다시 원래 자리를 찾아갔지만, 그는 4월에 거의 4할을 쳤다.

내가 상대의 입장이라면 적극적으로 투 스트라이크를 잡고 이후엔 무조건 유인구 승부다. 올해 장타율이 좀 올랐다고는 하지만 2루타가 좀 많아진 거지 홈런은 거의 안 나온다. 맞아봐야 단타일 확률이 높다.

‘스트라이크 존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모처럼 조용한 1회가 될 것 같네. 어제는 2점 내고 시작해서 마음 편했는데···”

소르카다. 어제 1회에 낸 그 2점이 마지막 점수였다. 하지만 소르카는 소르카였다. 디백스의 공격을 7회까지 산발 4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이후엔 우리의 새로운 승리공식이 된 8회 애덤 9회 체이스로 가볍게 경기를 마무리 지었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매번 점수를 어떻게 내겠어. 요 몇 게임 타자들 타격감이 좀 내리막 같기는 한데 어떻게든 한두 점이라도 내겠지. 한 달 이상을 타올랐는데 좀 사그라들 때가 되긴 했잖아.”

이럴 때 투수가 버텨줘야 한다. 그게 되는 팀이다. 어제 소르카도 견뎌냈는데 내가 못해낼 리 없다.

타악-

맞긴 잘 맞았는데 타구의 방향이 라인 밖이다. 투수가 정면 승부 모드는 아닌 것 같다.

“이럴 때 당신 같으면 어떻게 승부를 가져갈 거야? 좀 전에 나도 상대 투수의 입장에서 생각을 좀 해 봤거든.”

다른 투수는 이럴 때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해졌다. 소르카는 훌륭한 표본이 될 만하다.

“투아웃이라도 뒤편에 장타력 있는 타자들이 이어지잖아. 편하게 승부하기는 쉽지 않겠지. 타자의 지금 타율이 4할 가까이 되는데 정면으로 부딪치고 싶겠어? 그렇다면 유인구 승부밖에 선택지가 없을 거야.”

“그럼 외야수 시프트는 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해?”

“타자 입장에서도 이런 상황은 뻔히 보일 거 아냐. 그럼 스트라이크 존을 좁히겠지. 자기 존 안에 들어오는 것만 친다 이런 식이 될 거야. 그렇게 판단했다면 코너웍을 하다 실투가 나오는 것에 대해 대비가 필요했겠지. 확률이 낮은 장타가 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지만 높은 확률로 나오는 단타를 막겠다 이런 계산 아닐까?”

틱-

원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두 번째로 나온 타구도 파울이었다. 타격 타이밍이 늦고 있었다. 계속 타구가 1루 라인 바깥으로 나간다. 베그웰도 큰 타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공을 최대한 몸에 붙여서 때리려 하다 타이밍이 엇박자가 나면 일어나는 현상이다.

‘뭘 그렇게 재고 있어. 좀 빗맞아도 되니까 크게 한 방··· 참! 그게 마음대로 되면 저런 스타일이 굳어지지도 않았겠지만.’

그건 1루수 필이나 할법한 타격이다. 타격은 극단적으로 말해 단순한 방망이 휘두르기다. 하지만 다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많이 다르다.

빠르게 투 스트라이크를 내주며 볼카운트가 몰렸다.

틱-

“볼.”

틱-

베그웰이 타격 존이 아까보다는 조금 더 넓어졌다. 적극적인 커트에 상대 투수도 볼을 마냥 존으로 욱여넣기는 어려운 것 같았다. 투구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풀카운트 이후로 파울이 2개째다.

‘차라리 안타를 하나 맞고 말지. 1회부터 머리 좀 아프겠네. 이제 8구째인가?’

딱-

‘엇!’

잘 맞았다. 지금까지 엇박자가 나던 타이밍에서 반 박자 정도 빠르게 맞은 것 같다. 타구가 2루수를 넘어··· 우익수에게 잡혔다.

‘쩝! 시프트가 통했네. 그래도 1회부터 8개나 던지게 했으면 베그웰도 충분히 잘한 거지.’

느긋하게 마운드로 올라갔다. 베그웰이 바로 공격을 마친 다음이라 장비 착용 시간이 필요했다. 베그웰의 타순이 당겨진 것을 그동안 별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포수는 이런 문제가 참 불편하다.

“기본 장비만 마스크, 프로텍터, 렉가드, 낭심보호대, 니세이버 정도인데 이걸 원 터치로 착용할 수 있는 포수 장비가 있으면··· 음. 아직 없나? 못 본 것 같기는 하네. 내가 하나 만들어 볼까? 수요가 있을 것 같은데···”

은퇴하면 고려해 봐야 할 것 같다. 손가락으로 로진백을 들어 꼼꼼히 묻히고 살폈다. 로진이 아주 잘 배어 들었다. 화장 잘 먹는 날이 기준 좋은 건 남녀 불문이다. 이걸 화장의 부류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그게 그거다.

‘너무 많이 묻었나?’

눈으로 볼 때는 괜찮았는데 글러브 안의 공을 잡으니까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첫 구를 던지기 전은 늘 이렇다. 첫 구가 마음먹은 대로 잘 들어가면 그날 게임은 대개 순조로웠다. 일종의 징크스 아닌 징크스다. 그래서 좀 신경 써서 살핀다.

손을 유니폼 하의에 문질러 털고 다시 로진을 꼼꼼히 손가락에 묻혔다. 조금 많이 묻은 것 같다. 입으로 한 번 불어 로진을 좀 날려 보냈다. 좀 낫다.

이번에 손가락 끝에 걸리는 실밥의 느낌이 괜찮다. 초구 싱커. 코스는 늘 던지던 아웃코스다. 타석의 타자를 슬쩍 한 번 쳐다보고 와인드업.

‘오우! 그래 이거지.’

대개의 투수들은 초구로 패스트볼을 던지고, 나도 대개의 경우 그랬었다. 그때도 내 기준으로는 한 종류의 패스트볼이지만 통계사이트에서는 두 종류로 구분했다.

‘싱킹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 두 종류를 던진다고 하더라고. 느리게 던지는 싱커는 가끔 종 슬라이더로 표기되기도 하고···’

어쨌든 일반적인 분류에 의하면 싱커는 패스트볼의 일종으로 묶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기준의 패스트볼은 투심의 움직임을 가지는 것만을 뜻하게 되었다. 싱커를 여러 종류로 구분해 던지게 되던 때부터 나에게 싱커는 변화구였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구종 구별이 무의미해졌다고 해야겠지. 나도 발전하고 있다고.’

요즘 내 투구는 빠른 패스트볼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인 투심을 별로 던지지 않는다. 웬만한 건 싱커로 다 한다. 느리고 빠른 것이 싱커 하나로 다 가능한데 굳이 다른 구종을 던질 이유가 없었다.

‘보통 타자들에게는 다 통하더라구.’

틱-

‘이렇게 말이야.’

3루수 앞 땅볼을 만들어냈다. 5월 중순인 지금까지 총 8게임에 등판해서 6승을 해냈다. 평균자책은 1.82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다.

‘지난 시즌만 못하잖아. 시즌 통산이 ERA 1.68이었는데··· 음.’

초반 한 달 가까이를 6인 로테이션으로 돌았더니 등판 횟수 자체가 작년 이맘때에 비해 한두 번 적다. 당연히 소화 이닝도 좀 줄었다. 시즌의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이제 몸도 완전히 올라와 적응이 되었고 지금부터 피치를 올려야 할 때다.

올 시즌 디-백스 타선은 그저 그랬다. 표준적인 타자들의 모임 딱 그 정도의 느낌이었다. 특별한 느낌을 주는 타자는 보이지 않았다.

2번 타자에게도 굳이 레퍼토리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초구 낮은 곳을 향하는 싱커로 헛스윙을 이끌어 내고 2구 역시 비슷한 궤적의 싱커를 던졌다. 타자가 이번에 배트를 내지 않고 참는다.

“스트라이크.”

‘참 단순한 놈이네. 내가 같은 공을 두 번 던질 리가 있겠니?’

간단하게 몰아붙였다. 이번엔 초구에 비해 덜 떨어뜨렸다.

‘너무 쉽잖아. 긴장감 좀 가지게 해줘야 하지 않겠니? 이거 홈 팀 타자가 손님 맞는 예의가 없구만.’

디-백스 타자들이라면 우리 팀과 같은 지구라서 날 상대해본 경험이 꽤 많을 텐데 이 친구는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다.

‘게스 히팅도 아니고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공 보고 공 때리기는 본질적으로 가장 탁월한 기술이지만, 그걸 하기 위해서는 타자가 갖춰야 할 것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변화하는 공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는 빼어난 동체 시력과 포착한 순간을 놓치지 않을만한 빠른 배팅스피드 등이 필요하다.

‘적어도 넌 그 범주에 들지는 못할 것 같은데···’

아웃코스로 공 두 개 보여줬다고 3구를 기다리는 타격 자세가 앞으로 많이 쏠렸다.

‘나하고 많이 만났던 선수가 아니었나?’

내 투구에 대처하는 자세가 완전히 처음 본 투수 상대하듯 하고 있었다. 만약 나와 상대한 경험이 많은 선수였다면 2구를 멍청하게 서서 기다리는 바보짓은 안 했을 것이다. 내게 볼카운트가 쌓이면 쌓일수록 불리해진다는 건 통계로 증명되고 있었다. 그래서 대개의 타자들은 볼카운트에 구애받지 않고 노리는 공이 오면 서슴없이 배트를 냈다.

‘내려가면 자료를 한번 찾아봐야겠네. 경기 전에 보긴 했는데 기억이 가물거려. 요즘 그 선수가 그 선수 같아서···’

위닝샷은 몸쪽 높은 곳으로 향했다. 이 정도 선수에게 목적구를 하나 더 던져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생각했던 대로 화들짝 놀라며 억지로 스윙을 시도한다.

팔 길이가 갑자기 절반으로 줄어들기 전에는 절대로 맞힐 수 없다. 어리버리한 저런 놈이 왜 디-백스의 2번인지 모르겠다.

“배터 아웃.”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쉬웠다.

‘오늘 게임 잘 풀리네.’

3번 타자 역시 떨어지는 싱커에 내야 플라이를 쏘아 올렸다.

‘그래 이거지. 공 세 개씩 던지는 것도 힘들어. 빨랑빨랑 치고 끝내자고. 정말 손님 접대 제대로 하는 팀이야.’

기분 좋게 첫 이닝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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