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선택한 것 or 선택 당한 것
“애덤. 어떻게 된 겁니까?”
너무 뜻밖의 소식을 경기 전 그라운드에서 제 3자를 통해 듣게 되었다. 쉽게 믿어 지지가 않았다. 그러던 중 애덤 본인을 뒤늦게 덕아웃에서 만났다.
“어떻게 되긴 그냥 한두 시즌 더 해보기로 한 거지. 마침 알맞게 구단에서 적당한 제의를 해줬고··· 그래서 계약했어.”
“감독에게 불펜으로 보직 변경하겠다고 했다면서요.”
살얼음판을 걷듯 아슬아슬해서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진이 빠질 지경이었는데 당사자들은 오죽했을까.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정리가 되어 일단은 반가웠다.
“올 시즌을 끝이라 생각하고 전력으로 부딪쳐보려고 했었는데 몇 시즌 더 뛰려면 고려해야 할 게 좀 더 많잖아. 조금 길게 가기로 생각을 바꾸고 나니까 선발만 고집해서는 안 될 거 같더라구.”
‘한 시즌에 쏟아부을 것을 여러 시즌으로 나누시겠다? 그게 그렇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인가? 뭐, 나름 생각이 있겠지.’
“그렇다면 처분을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좀 더 폼이 나잖아. 양보하는 선배. 이게 모양새가 더 낫지. 물론 끝까지 해도 마지막엔 내가 이겼겠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으니···”
나이 들면 이게 문제다. 실리만큼 명분이 중요하게 된다.
“그건 그렇죠. 프런트와 언제 이야기가 된 겁니까?”
“프런트··· 아니, 그냥 개인적인 만남이었어. 윌리스 단장은 내 드래프트 때 스카우터 팀장이었거든. 원래 삼촌 같은 사람이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사이에 서로 마음에 묻어 두고 있었던 생각까지 이야기하게 되어버렸는데···”
‘서로? 애덤 진짜 그렇게 믿는 거야?’
이 아저씨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순진한 것 같다.
‘아니지. 별로 손해 볼 것 같지 않은 제의라 모르는 척 넘어 가줬을지도···’
“그가 그러더라구. 팀이 힘들었을 때 고생만 했는데 은퇴할 때 은퇴하더라도 반지는 가지고 은퇴해야 할 것 아니겠냐고.”
“그건 그렇죠. 저도 은퇴했는데 우승 반지 하나 없으면 좀 서운할 것 같아요.”
맞장구를 쳐 줬지만, 왠지 기분이 썩 개운하지가 않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지. 소위 말하는 프랜차이즈인데 우승 반지 하나 얻어 보겠다고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시켜주세요 할 수는 없지 않았겠어? 그래도 내 선수 생활은 축복받았지. 한 팀에서 시작과 마무리를 할 수 있다는 건 아주 소수만 가질 수 있는 행운이라고.”
그것에는 동감한다. 나도 메이저리그에서만 두 팀에 있었다. 팀을 옮긴다는 건 별로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래서 마지막 시즌 멋있게 불태우고 깨끗하게 마무리하고 싶었어. 그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팬들에게 보답하는 길이고···”
감성적인 건 피곤하다. 나는 아주 현실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렇지요. 메이저리그에서 그런 경력을 갖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죠.”
하지만 아무 때나 솔직하진 않다.
“윌리스 아저씨가 조금만 더 버텨 보라고 하더군. 우승이 곧 현실화 될 수 있을 거라고,”
‘이건 하늘을 날고 땅을 가르는 고전 소설에 등장하는 조삼모사 신공에 당한 것 같은데. 비룡이가 시대와 환경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반드시 통한다고 하더니···’
“내 생각에도 지금 돌아가는 걸 보면 한두 시즌 내 우승은 틀림없을 것 같아.”
정말 귀신 같은 윌리스 단장이다. 대수롭지 않은 몇 마디 말로 이 고인물을 흔들어 버렸다. 나도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한두 시즌 정도는 더 기다려야 될 줄 알았더니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당장 이번 시즌이라도 가능할 것 같긴 해요.”
“그래서 불펜에서 좀 여유 있는 보직을 받으면 나도 두세 시즌 정도는 충분히 더 던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사실 돈은 벌 만큼 벌어서 별로 아쉽지 않은데 윌리스 아저씨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것이···”
선발 경쟁이 힘들긴 했었나 보다. 하지만 그렇게 의욕을 불태우다가 갑자기 이렇게 입장이 바뀐 결정적 이유가 따로 있었을 것 같은데 마지막 말을 아낀다.
‘그러고 보면 선발 경쟁이 30대 후반에 할 짓은 아니지. 난 힘 떨어지면 바로 은퇴해야겠어. 나이 들어서 저렇게까지는 하기도 싫고.’
대화가 진행될수록 궁금해졌다. 윌리스 단장이 날린 히든 카드에 대해선 애덤이 아직 말하지 않았다. 이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 선수에게 뭐라고 했길래 이렇게 사람을 흐물흐물하게 만들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So. 월드시리즈를 가장 많이 제패한 팀이 어디지?”
“그거야 당연히 양키즈죠.”
이건 상식이다. 메이저리그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양키즈가 최강팀이었던 것은 웬만하면 다 안다.
“양키즈가 몇 번 우승했지?”
“음. 많이 한 건 아는데 몇 번인지는 잘··· 한 열몇 번 되지 않나요?”
“스물일곱 번 했지.”
“그렇게나 많았어요?”
“그 스물일곱 번 중에 1936년에서 1939년까지 4연패 1949년부터 1953년까지 5연패 1998년부터 2000년까지 3연패 등 연속으로 월드 시리즈를 여러 번 제패한 적이 있었지. 이건 1972년부터 1974년까지 애슬레틱스의 3연패를 제외하면 누구도 흉내조차 내지 못했어.”
어째 말하는 스케일이 굉장히 거창해지고 있었다.
“메츠가 재작년과 작년 연속으로 월드시리즈를 차지하면서 이번 시즌까지 3연패를 노리고 있지만, 나더러 우승 예측을 하라면 난 우리 팀에 걸겠어. 더 발전적인 건 우리 팀의 전력이 앞으로 적어도 4시즌 동안은 그대로일 거라는 점이지. 그래서 2+1 계약을 했어. 그 4년을 나도 함께하고 싶어.”
‘이거였나? 하아! 윌리스 그 노친네가 헛바람을 잔뜩 넣었네. 금전적인 부분은 채워졌으니 명예욕을 건드렸구만.’
대화가 길어질수록 상당히 타당성 있다는 생각이 나도 들 지경이다. 시즌 시작 전이라면 긴가민가했었겠지만, 4월의 우리 팀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지금까지 25게임에서 22승을 해냈다. 이 기간 승률이 무려 8할 8푼이었다.
단기간에 나타난 일시적인 것이라고 애써 담담해지려 노력 중이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시즌 162경기를 치르게 된 뒤부터 역대 한 시즌 최다승 팀이 116승이었다. 이건 7할 1푼 6리밖에 안 된다. 그런데 8할대라면 흥분이 안 될 수가 없다.
‘설레발은 안 돼. 이제 한 달도 채 안 지났잖아. 시즌은 길다고···’
벌써부터 역대 최고승률팀이 나올 것 같다는 말이 돌고 있었다. 역대 최고 승률은 1906년의 시카고 컵스다. 시즌 116승으로 2001년 시애틀 매리너스와 승수는 같지만, 그때는 연간 152경기를 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역대 최고 승률은 7할 6푼 3리다.
‘웃기는 건 116승 팀 둘 다 월드시리즈를 제패하진 못 했다는 거지. 장기 레이스에서는 압도적으로 강했지만, 단기전 승부에서는 실패했었어. 그래도 컵스는 월드시리즈까지 올라가서 졌지만, 매리너스는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떨어지고 말았지.’
“내가 역대 최강일지도 모르는 최고 선발진에 못 끼어 아쉬운 면은 있지만 한 시즌 버티다가 끝나긴 싫었다고.”
이젠 걸핏하면 역대 최고이고 최강이다. 그 단어는 중독성이 높은 것 같다. 이제 나도 그게 앞에 붙지 않으면 별 느낌이 없다. 하지만 기분은 기분이고 아직은 자제해야 할 때다.
“이제 시즌 한 달 지났는데 역대 최강이 될지 될 뻔만 할지는 장담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런 선발진을 가졌다고··· 음. 그렇죠.”
하마터면 쓸데없는 말을 할 뻔했다. 역대 최강이라 불린 선발진을 가졌다고 그 팀이 꼭 우승했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굳이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2014년 타이거스는 전성기에 이른 사이영 상 컨텐더 3명(저스틴 벌랜더, 맥스 슈어저, 데이비드 프라이스)으로 이루어진 선발진을 가졌었다. 하지만 디비전 시리즈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1998 시즌의 애틀랜타 선발진도 대단했다. 톰 글래빈 20승 6패 2.47, 그랙 메덕스 18승 9패 2.22, 존 스몰츠 17승 3패 2.90, 케빈 밀우드 17승 8패 4.08, 데니 네이글 16승 11패 3.55. 하지만 이런 투수들을 가지고서도 챔피언쉽 시리즈에서 파드레스에게 2승 4패로 탈락했다.
좀 더 과거로 가면 더 굉장한 투수진도 있었다. 1971년의 오리올스는 선발 4인 로테이션을 운영하는 팀이었다. 그 선발 4인이 모두 20승 이상을 올렸다. 마이크 쿠에이야 20승 9패 3.08, 데이브 맥날리 21승 5패 2.68, 팻 돕슨 20승 8패 2.90, 짐 파머 20승 9패 2.68. 그들조차 월드시리즈에서의 승리를 보장하지는 못했다.
‘이번 시즌 우리 선발진은 나중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애덤은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일까?’
***
“8회 초 자이언츠의 공격은 득점 없이 끝났습니다. 4대3의 스코어는 아직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조금 아쉽긴 하네요. 한 점만 더 내었어도 좀 더 확실한··· 어?”
애덤 산체스가 마운드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선발이었던 로저스가 다시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바뀐 투수가 산체스라니요. 자이언츠가 6인 로테이션을 포기한 것일까요? 4월의 마지막 날 파드리스와의 3연전 원정 마지막 경기에서 의외의 투수가 8회 말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내부적으로 정리가 이루어진 것 같네요. 이번 시카고 원정을 마지막으로 어웨이 경기로 계속 이어지던 힘든 스케줄이 끝나게 되니까 정상적인 5인 로테이션으로 투수 운용을 하겠죠.”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선발만 하던 산체스를 프라이머리 셋업맨으로 쓴다면 적응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프라이머리 셋업맨은 클로저의 등판 전 8회를 주로 담당하는 투수다. 보통 클로저와 함께 불펜의 원투펀치라고 할 수 있다.
“애덤 산체스가 주로 선발로만 뛰었다고는 하지만 빅리그 경력이 15년입니다. 그 경험치라면 적응에 큰 어려움을 가지지는 않을 것 같네요. 아마 벤치의 즉흥적인 생각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투수 운용이 원래 계획에 있었을 거라는 데이빗 해설 위원의 의견이었습니다.”
“허헛. 그래엄 캐스터는 제 말에 동의하지 않으시나 보군요. 제가 휴민트를 동원해서 다음 시간에는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애청자 여러분께 꼭 말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홈경기에서는 좀 더 정확한 사실을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약속 믿습니다. 데이빗.”
그래엄 캐스터의 장난스러운 워딩이 이어졌다.
“느낌이 새롭군요. 보통은 마무리가 가장 경력이 많고, 젊고 투지 있는 셋업맨 이렇게 되는데 자이언츠는 그 반대로 조합을 했네요. 어떻든 지금까지 자이언츠의 약점으로 불펜 투수의 층이 얇다는 지적이 좀 있었는데 산체스가 가세하게 된다면 전혀 다른 불펜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산체스의 초구 슬라이더가 아웃코스 낮은 존을 예리하게 파고들었습니다. 타자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제 이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