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97화 (97/200)

97화. 기다림의 미학

상대도 작년 통계 정도는 경기 전 보고 나왔으리라. 하지만 하나가 바뀌었다. 아주 큰 하나가··· 그것은 통계로 나타낼 수 없다.

틱-

깎여 맞은 타구가 3루수 쪽 라인을 타고 흐른다. 3루수 테일러의 대쉬가 이어지고 1루까지 빠른 송구. 아무리 빠른 타자라고 하더라도 공보다 빠를 수는 없다.

볼을 쳐서 안타가 될 확률은 스트라이크를 쳤을 때의 20% 이하다. 볼 다섯 개를 던져 제일 까다로운 타자를 잡았다. 이번 시즌의 나는 마음의 여유가 다르다.

삼진 하나 범타 둘. 깔끔한 삼자범퇴다.

‘이대로 계속 가는 거야.’

따악-

‘이런 식이라면 한두 점 정도는 줘도 괜찮을 것 같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우리 타선은 1회 폭발 중이다. 대개의 투수들은 1회를 상당히 어려워한다. 특히나 파워 피처보다는 피네스 피처가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신경 써야 할 게 많으니까 그렇지.’

연습과 실전은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선수라고 해도 불펜에서 공을 던지다 마운드로 올라가면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 피네스 피처의 경우에는 심판 고유의 스트라이크 존도 파워 피처에 비해 좀 더 섬세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대학 때는 아주 편했었네. 아무 생각 없이 가운데만 보고 던지면 됐었잖아.’

메이저리그에도 그때의 나와 비슷한 유형의 투수들이 꽤 있다. 하지만, 에이스급에 가까울수록 구위와 함께 제구를 갖추게 된다. 파워 투수이더라도 피네스 피처의 성향을 함께 가지게 된다. 그래서인지 어제의 다저스 1선발도 그렇고 오늘의 2선발도 우리 타선에 1회부터 털리고 있었다.

‘너무 억측인가? 알버트와 베그웰을 전진 배치한 타순 때문일 수도 있겠지. 그 둘이 초반부터 이렇게 펑펑 터트릴 줄은 미처···’

뭐든 간에 처음부터 이렇게 점수를 쌓아준다면 투수 입장에선 몹시 마음이 편하다.

타악-

오늘은 5번 타자 필이 홈런까지 쳐준다. 상대 투수가 승부를 서둘렀다. 앞 타자가 강하면 이런 효과도 생긴다.

알버트와 베그웰이 고정적으로 2, 3번을 맡고 거기에 기존의 최고타자 레블론이 굳건한 4번은 내가 상대한다고 해도 상당히 까다로울 것 같다. 상대 투수 역시 그들에게 시달려 진이 빠졌는지 실투성의 공이 가운데로 쏠렸다.

필의 쓰리런을 포함해서 1회부터 4점이다.

“필! 필!”

“이겼어. 2연승이야.”

덕아웃의 분위기를 보면 이미 경기가 끝난 것 같다. 아무리 좋아도 이러면 많이 곤란하다.

‘어이, 이봐! 아직 1회라고 벌써 이렇게 마음이 풀어지면···’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괜히 업이 된 분위기를 그런 말로 망치는 게 아닐까란 생각에 차마 말문을 떼지 못했다.

어쨌든 홈런 친 선수를 축하는 해줘야 한다.

덕아웃에 늘어서 홈런타자, 득점 주자들을 기다린다. 작년을 생각하면 이게 우리 팀 맞나 의심이 갈 지경이다. 시범 경기 때부터 올 시즌 터질 것 같은 낌새는 느꼈지만 그게 정규 시즌 시작하자마자 이렇게까지 이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

“So. 내가 이 정도야. 내가 이 경기를 잡았어.”

‘필 아저씨 적당히 해요. 고참이 1회부터 오버하면 어떻게 하냐구.’

참 갑갑하다. 홈런 친 타자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고···

“다들 너무 과한 것 아냐? 정신을 가다듬고···”

내 뒤편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그렇지. 그래도 긴장 풀지 않고 있는 선수가 있긴 하네. 다행···’

“어휴! 이래서 신참은 안 된다니까. 자기만 똑똑한 줄 알아요. 넌 그런 생각이 들 때 이상하지도 않던? 고참들 생각이 너보다 모자라서 이러는 것 같아?”

옳은 조언을 하면 그게 신참이든 뭐든 간에 받아들여야 한다. 후배를 위력으로 억누르려 하는 건 팀을 위해 지양해야 할 행동이다.

‘누가 그런 참신한 헛소리를···’

“아니, 그럼 무슨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야?”

“당연하지. 지난 시즌 So가 선발로 나왔을 때 가장 많이 실점한 게 4점이야. 그것도 딱 한 번뿐이고. 게임을 하러 나왔으면 경기 기록도 좀 찾아보고 해야지. 머리는 장식이냐?”

‘그랬나?’

맞는 것 같다. 4점을 줘 본 기억이 없다.

‘풋. 내가 멍청하긴 한 모양이야. 한 번 있었다는 그 사실조차 기억을 못하는 걸 보면··· 어쨌거나 통계의 스포츠에서 그 정도 확률이라면 거의 끝난 거나··· 음. 이건 설레발이 아니겠지.’

투수에게 망각은 어쩌면 축복이다. 괴로움을 딛고 다시 일어설 힘을 준다. 하지만 이제 내게 망각은 필요 없을 것 같다.

틱-

6회. 타구가 다시 유격수 패터슨 앞으로 구른다. 오늘 경기 내내 유격수 아니면 3루수 쪽이다.

‘2루수 방면이 너무 적네’

내가 던지는 공의 80%는 좌우타자를 가리지 않고 아웃코스를 향한다. 타자는 싫건 좋건 간에 가장 많이 던지는 공을 공략할 수밖에 없다.

우타자가 아웃코스를 당겨 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래서 보통은 2루수 방면 땅볼이 꽤 나오는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한두 개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유격수 방면이었다.

‘덮어놓고 당겨 친 건가? 하나만 걸려라? 계속 이런 식으로 타구의 분포가 이루어진다면 시프트를 쓰는 것도··· 별 의미 없나?’

6회까지 딱 1안타를 맞았다. 그 1안타는 홈런이었고. 지금까지 19명의 타자가 필사적으로 배트를 돌려대 그 결과가 1점이라면 다저스의 공격 시도는 효과적으로 잘 막은 셈이다. 역시 초반 리드가 있으면 편하다.

‘다저스 전력분석 직원이 욕 좀 듣겠는데···’

오늘 내 투구 내용의 통계는 작년과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투구의 기본이 되는 스트라이크를 별로 안 던졌다. 지난 시즌 나의 스트라이크 비율은 60~70% 정도였다. 오늘은 그 절반밖에 안될 것 같다.

‘흣.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우리 타선은 1회 4점에 이어 지금까지 두 점을 더 뽑아냈다. 6대 1이면 이 경기를 잡아내기에 넘치는 스코어다.

“아웃.”

우리 유격수는 어김없다. 이로써 삼자범퇴다. 우리 내야진의 수비는 아주 안정적이다. 실수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지금 타구도 느리게 구르는 보기보다 까다로운 타구였었다. 패터슨은 안정된 스텝으로 공을 잡아 여유 있게 아웃시켰다.

상당히 밋밋해 보이지만 멋진 파인플레이가 속출하는 수비보다 이런 수비가 더 고난이도의 기술이다. 깎여 맞고 비껴 맞은 땅볼 타구를 이렇게 안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내야진은 리그 전체에서도 찾기 어렵다.

비록 그들이 2할 초반의 타율 등 공격 지표는 보잘것없지만, 난 이 내야진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 나 같은 땅볼 투수에게 이런 내야진은 신의 축복과 같다.

지금 아웃시킨 타자가 1번 타자였다. 만약 다음 회 상대 공격을 2, 3, 4번으로 끝낼 수 있다면 8, 9회에 특별한 변수가 개입하기 어렵게 된다.

‘다섯 점 차이면 프라이머리 셋업맨과 클로저를 사용하지 않고도 이길 수 있겠지.’

그게 한국식으로 말하면 필승조다. 어제 필승조가 출전했었다. 아직 시즌 초반이라서 이틀 연투는 가능하겠지만 가급적이면 안 쓸 수 있으면 좋다. 안 쓰고 이긴다면 내일 게임까지 노려볼만하다.

***

팟-

조금 전까지 자이언츠의 경기 중계가 흘러나오던 모니터가 꺼졌다.

“6:3 마지막이 깔끔하진 못했지만 이기긴 이겼군요. 막판에 라드 감독 속 좀 탔겠어요.”

“허헛. 본인 이야기에 다른 사람을 슬쩍 끼우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저는 우리 팀이 당연히 이길 거라고 믿고 있었죠. 위기는 있었지만 늘 그랬듯 극복해 냈지 않습니까?”

9회 내내 체이스 빨리 올리라고 핏대 세우던 태도에서 너무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어흠. 그나저나 불펜 보강을 해야 할 것 같네요.”

해리스 사장은 멋쩍은 듯 화제 바꾸기를 시도했다.

“그건 좀 신중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겠죠. 즉흥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윌. 오늘 이 게임을 보시고도 그런 생각이 드세요?”

사장에게는 시원하고 깨끗한 승리에 대한 갈망이 있는 듯했다.

“폴. 모든 게임을 이길 수는 없어요. 오늘 라드 감독은 최고 불펜을 낼 수 있음에도 아꼈죠. 그가 불펜투수들의 실력 차를 몰랐겠어요? 우리보다 훨씬 잘 알지요. 그는 한정된 자원으로 더 많은 승수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이 정도 불펜 전력이라면 보강할 필요가 없다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하면 좋지요. 하지만 페이롤(팀 전체 연봉)을 높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충분히 잡을 경기 잡아내면서 지구 우승 정도는 가능한 전력이라고 생각합니다. 90승으로 우승하나 100승으로 우승하나 다를 것 없지 않습니까?”

자금을 마음껏 질러 우수 선수를 사 모은다면 어느 팀이나 우승이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치세를 따지기에 앞서 그런 식으로 우승해 팀이 파산한다면 우승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프로 스포츠의 바탕에는 자본주의가 있다.

“맞습니다. 하지만 지구 우승만 하고 끝내실 겁니까? 불펜이 두꺼워진다면 포스트 시즌에서는 그게 결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사장은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건 그렇죠. 하지만, 지난 스토브리그 기간에 여러 건의 연장 계약을 하면서 꽤 많이 쓰기도 했고···”

“아직 여유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전반기 후 타자를 보강하겠다는 용도를 정해 놓은 자금이긴 했었죠.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으로 봐서는 타자 보강이 필요할 것 같지가 않네요. 알버트와 베그웰의 성장세가 놀랍습니다. 그렇다면 자금의 용도를 조금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요. 그래서 예비 자금이 더 필요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거론하기는 이른 시점이지만, 만약 올 시즌 알버트의 포텐이 터진다면 말씀하시는 대로 예비비의 용도를 바꿔야 하겠죠. 잭팟이 크게 터지면 터질수록 예비비가 더 많이 필요할 겁니다. 반대의 경우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고···”

해리스로서는 더 이상 자기 주장을 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올 시즌 아니, 상반기 정도까지라도 알버트가 3할에 30홈런 페이스 정도를 보여준다면 예비 FA 영입을 생각할 게 아니라 그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 기세가 중간에 사그라들면 타자 보강은 필수적이 된다.

“음. 그 말씀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래도 쓸 만한 불펜 하나 정도만 더 있으면···”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어쩌면 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지금 불펜 문제는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질이 떨어지면 양으로라도 버텨야 하는데 지금 그것이 곤란한 상태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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