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96화 (96/200)

96화. 나는 달라졌다.

“스트라익.”

타자의 망설임을 만들어냈다. 이번 시즌을 대비해서 특별한 레퍼토리를 추가하진 않았다. 고 감독은 너의 투구 패턴은 완성형이라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었다. 나도 동감한다.

지금도 우타자의 바깥으로 휘어나가는 슬라이더에 이은 아래로 떨어지는 싱커가 타자의 배팅 타이밍을 흩트렸다. 공 끝의 휘어짐이 왼쪽에서 아래로, 구속도 5마일 정도의 차이를 보였다. 이제는 투심 패스트볼 차례다. 이것의 공 끝은 몸쪽으로 향한다.

틱-

빗맞은 타구가 유격수 앞으로 돌돌 굴러갔다. 타자는 1루를 향해 열심히 달렸지만, 우리 팀은 골든글러브급의 내야수들이 있다.

1루심의 손이 망설임 없이 올라간다. 넉넉한 차이로 아웃. 기대했던 결과가 나왔다. 평범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뚫어내기가 몹시 까다로운 패턴이다. 일반적인 타격 능력을 가진 타자들에게는 아주 잘 먹힌다.

2030 시즌은 다저스와의 홈 3연전으로 시작했다. 오늘은 2차전이다. 개막전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그냥 무심하게 넘겼다.

‘그렇지 않아도 다들 신경이 날카로운데 나까지 개막전 선발하겠다고 방방 떴으면 좋은 꼴 났겠지.’

물론 하겠다고 나섰으면 쉽게 거절당하지 않았을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가 있겠는가! 시즌 시작부터 이기적인 욕심을 드러내서 팀 분위기를 박살 낸다? 결코 그건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소르카가 아무리 내게 호의적이라 하더라도 내 고집으로 개막전 선발을 양보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면 절대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 것이다.

‘올 시즌 우승해야 하는데 그건 많이 곤란하지.’

그래서 2선발로 시즌 두 번째 경기에 나섰다. 물론 지난 시즌 성적은 내가 월등히···

‘월등하지는 않지만 조금 앞서긴 하지. 팀 선발 투수 중 최다승. 가장 낮은 평균자책 또 뭐가 있지?’

아무튼 무엇이든 내가 1등이다. 그렇게만 생각하면 개막전 선발은 내가 나서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이 동네도 기본적으로 선배 대접을 해야 하고 고참을 존중해야 한다. 그래서 개막전 선발을 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생각해 보니까 이유가 좀 구질구질하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별 지지가 없었다. 내가 개막전 선발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말을 하는 일부 팬들이 있긴 있었지만, 그냥 소수 의견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 꺼내면 나만 미친놈 되는 거지. 어쩌겠어. 내년에는 기필코··· 올 시즌 한 20승하고 1점대 평자도 찍고 탈삼진··· 헛! 무슨 생각하는 거야? 시즌 첫 게임부터 설레발은···’

어제 개막전에 나선 소르카는 6이닝 1실점으로 잘 던졌다, 감독은 소르카의 투구 수가 90개에 이르자 거침없이 그를 내렸다. 첫 게임이었고 스코어도 4대1이었다. 충분히 타당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 불펜이 7, 8회 1점씩 내주기는 했지만, 우리 타선도 잃은 점수만큼 되찾아 주었고, 올 시즌 클로저로 낙점받은 체이스가 깔끔하게 마무리를 했다.

‘전형적인 선발 야구의 이기는 패턴이었지. 아주 바람직해. 별 사연 없이 안정감 있는 승리였다는 게 더 마음에 들어.’

이제 내 차례다. 첫 타자를 무난하게 잡아냄으로써 첫 단추는 잘 끼웠다.

‘일 번은 무난하게 잡았는데 여기서부터가 지뢰밭이네.’

작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다저스는 4번보다 2번과 3번이 더 까다롭다. 4번부터는 정확도가 떨어지는 장타자 타입이라서 행운이나 우연하게 나오는 한 방만 조심하면 거의 맞을 일이 없다.

‘힘을 앞세우는 타자가 상대하긴 최고야. 주자만 없으면 뜬금포 맞아봐야 1점일 뿐이고. 그 행운이나 우연은 거의 생기지 않지. 그게 자주 나온다면 그렇게 불리겠어?’

그런 만만한 타자라도 앞에 주자가 쌓이면 부담감이 달라진다. 즉, 2번 3번은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뜻이다.

어느 투수나 마찬가지겠지만 정확한데 파괴력마저 있는 빠른 타자는 골칫덩이다. 다저스의 2번과 3번은 타율 3할을 기본으로 깔고 매년 30개 이상의 홈런을 터트렸던 실적을 가진 타자들이다.

2번 캐빈 럭스 1997년생 33세. 2019년 빅리그 데뷔. 풀타임은 2021 시즌부터라고 한다. 작년에 날 상대로 상당히 잘 쳤다. 20타수 5안타 0.250 홈런은 안 맞았다. 3할대 타자를 2할 5푼으로 막았으면 괜찮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리그 전체 타자를 상대로 한 내 평균은 2할이 채 안 되었다. 정말 이 생활 몇 년 더 하면 웬만한 선수 호적등본도 줄줄 읊겠다.

‘어제는 별로였지. 시즌 초반이라서 타격감이 아직 완전하지 않은 건가?’

어제 예열을 했으니 오늘은 좀 다를 수도 있다.

‘상대 타자가 잘 쳐도 걱정. 못 쳐도 경계를 해야 하고. 이 짓도 정말···’

내 컨디션 관리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컨디션 파악도 아주 중요하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스트라익.”

‘어? 헛스윙?’

조금 이상하다. 슬라이더의 각이 잘 꺾어지긴 했지만 맞히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헛스윙이라니 배트와 공과의 간격이 한참 멀어 보였다. 완벽하게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지는 않았지만 못 맞힐 정도로 많이 빠진 공은 아니었다.

‘이걸로는 모르는 거지. 하나 더···’

비슷한 코스에 2구를 더 느리게 던졌다. 싱커. 느린 만큼 각은 더 크고 명백한 스트라이크다.

틱-

억지로 맞혀내기는 했지만, 완전히 엉덩이가 빠진 상태로 팔로만 걷어냈다.

‘이거 뭐야? 너 이런 타자가 아니었잖아.’

20초라는 짧은 투구 간의 여유 시간에도 맹렬하게 머리가 돌아갔다.

‘오늘 내 컨디션은 보통. 상대 타자는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구속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공교롭게도 그 타자가 제일 경계하던 두 명 중 한 명이란 거네.’

이것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스트라익. 배터 아웃.”

첫 타자와 똑같은 볼 배합이었다. 다만 럭스는 1번 타자와는 다르게 공을 건드리지 못했다. 배그웰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공 배합이 마음에 딱 들었다. 고개를 저을 필요가 없었다. 오늘만 그런 건지 앞으로도 계속 이 상태가 지속될지 모르지만 현 상태의 캐빈 럭스는 더 이상 엘리트 타자가 아니다.

‘33살에 꺾이기는 좀 이른 거 아냐? 아니지. 빅리그 12년이면 나름 오래 해 먹었네. 올해 한 명 가시는 건가?’

에이징 커브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건 본인에게 물어봐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점진적으로 능력 하강이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고 일반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100에서 30 이런 식으로 신체 능력이 확 떨어져 버린다.

신체 능력이라고 두루뭉술하게 표현했지만, 그것이 꼭 근력, 순발력과 같은 종류의 육체적 능력에 국한되는 건 아니다. 신경의 반응 속도 저하. 멘탈의 변화와 같이 굉장히 복합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웨이트를 할 때도 똑같은 무게를 문제없이 평소처럼 들 수 있는데 본인이 신체 능력 저하를 자각하긴 어렵다. 즉, 자각이 되면 이미 돌이키기 어렵다.

‘호르몬 분비만 좀 달라져도 그럴 수 있다고. 우울해져 타격이 안 된다는 건 좀 웃기는 얘기 같지만 진짜로 그래. 빨리 병원이나 찾아보라고.’

내가 아주 잘 안다. 나의 에이징 커브는 좀 다른 경우였지만, 그 극복을 위해 안 찾은 곳이 없고 소소한 참고 서적까지 찾아서 열심히 읽어봤다.

‘고인 물은 가고 새 물결이 오는 건가?’

3번 타자 에디 레오날드. 빅리그 5년 차다. 20대 중반 육체적 능력으로는 정점에 올랐다. 내년까지만 지금 정도 지표를 유지한다면 돈방석이 예정되어 있다. 3할에 매년 40개 이상의 홈런을 칠 수 있는 내야수의 FA 조건은 어떨지 상상이 안 된다.

타율은 케빈 럭스보다 낮지만, 장타율은 더 높다. 타율 3할과 3할 3푼은 비슷하게 느껴지는데 홈런 30개와 40개는 왠지 상당히 많이 차이 나는 느낌이다.

‘타격 능력은 비슷. 하지만 좀 더 많이 잡아당기는 성향이라서 그런 차이가 있는 거겠지.’

주자 없이 투아웃. 하나 노릴 타이밍이다. 실제로 레오날드에게는 지난 시즌 홈런을 두 개 맞았다. 20타석에서 4안타를 맞았는데 두 개가 홈런이었다.

“스트라익.”

생각했던 대로 초구부터 매섭게 방망이가 돌았다. 아웃코스 낮은 쪽을 노리고 있었다. 나의 초구가 그쪽 스트라이크가 될 확률은 지난 시즌 기준으로 약 70%에 가까웠다. 당연히 반대로 갔다.

작년 같으면 이럴 때 쳐볼 테면 쳐보라고 무시하고 강대강으로 부딪쳤겠지만, 작년의 내가 아니다.

‘넌 FA가 되려면 두 시즌 남았지만 난 이미 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일 년 사이에 많은 것이 달라졌어. 너도 FA 해보면 내 맘을 알 거야.’

독이 오른 독사를 맨손으로 잡을 만큼 내가 무모하진 않다. 아니, 작년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이것저것 가릴만한 여유가 없었다. 지금과 그때를 비교할 수는 없다.

“볼.”

하나 더 뺐다. 상대가 유인구를 던진 초구부터 시원하게 휘둘러준 덕분에 볼카운트는 여유가 있다. 하나 더 뺄 생각이다. 이러다 볼카운트가 몰리면?

‘글쎄, 레오날드의 성향상 그런 일이 있을까? 얘도 아주 적극적인 타자거든. 아직 FA 전이라서 앞뒤를 잘 못 가리는 것 같아.’

“스트라익.”

역시 참지 못한다. 하이 패스트볼에 다시 헛스윙이 나왔다. 구속의 변화로 두 타자를 상대했으니 레퍼토리를 코스와 구질 변화로 바꿔야 할 때였다.

타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환하게 다 보인다. 볼 카운트는 원 볼 투 스트라이크였지만 레오날드를 상대로 아직 스트라이크를 하나도 안 던졌다.

‘알아서 망해주는데 내가 거기서 드잡이질할 이유가 없잖아. 자! 맞혀봐. 이제 내가 스트라이크를 던질까?’

“볼.”

‘우와! 너 머리가 빈 게 아니었네. 여기서 참았어?’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슬라이더에 당연히 배트가 따라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스트라이크를 던질 생각은 없었지만 비슷하게 보이는 공이었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이 공을 눈으로 보고 참을 수는 없다. 당연히 커트라도 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의도적으로 배트를 안 냈네. 눈으로 보고 참은 게 아니야.’

직감이든 예측이든 간에 그냥 루킹 삼진을 각오하고 눈 딱 감고 기다린 거다. 그 결과 투 볼 투 스트라이크로 내가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할 상황을 만들어냈다.

‘머리도 있고 배짱도 있는데 상대를 고르는 선구안이 떨어지네.’

작년 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가장 자신 있는 볼을 스트라이크 존에 욱여넣든지 업슛을 던졌을 거다. 타자는 선택지를 좁힐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러고도 살아남은 게 용하다 싶다.

‘아니, 이런 상황 자체가 거의 안 만들어졌지. 5구까지 별로 던진 기억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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