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니가 가라 하와이
나도 90마일 후반대의 평균 구속을 가진 투수가 저런 구속 조절이 될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었다. 그런 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서···’
생각해 보면 최고 구속이 90마일쯤 던지는 투수 중에는 저런 테크닉을 부리는 선수가 가끔 있었다. 90에서 80이 가능하다면 100에서 90도 당연히 된다.
‘똑같은 건데··· 하긴 나라도 100마일을 던질 수 있으면 대충 던져도 못 치는데 복잡한 짓은 하기 싫었겠지.’
환경이 사람을 지배한다. 나도 육체적 성장이 일찍 멈추지 않고 20대 초반까지 쭉 이어졌더라면 저런 유형의 투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는 메이저리그다.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가 아주 많지는 않지만 아주 드물지도 않고 그런 공을 거침없이 쳐낼 수 있는 타자들이 존재하는 최고의 리그다.
연습 투구가 끝나고 첫 타자로 레브론이 들어섰다
‘저 아저씨 오늘 일진 사납네. 하필이면···’
“스트라익. 배트 아웃.”
패스트볼 세 개가 연속적으로 꽂혔는데 레브론은 배트를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야!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정말 마음에 안 드네. 이러다가 타격 타이밍 다 망가지겠어.”
삼진 당하고 물러날 땐 조용하더니 쏜살같이 나한테 와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기가 막히네. 90대 후반 패스트볼로 초구 스트라이크. 90마일대 초반 공으로 타이밍을 흩트리고 다시 더 빠른 패스트볼이라··· 구속 차이를 진짜 의도적으로 낼 수 있는 건가? 저건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지? 체인지업? 아니지. 그냥 오프스피드 피치인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소르카마저 희한한 말을 한다.
“뭐로 부르든 무슨 상관이야. 아무렇게나 부르라고 해. 중요한 건 올해도 선발 경쟁을 해야 할 것 같다는 거지.”
어느새 애덤이 다가와 있었다.
‘이 아저씨가 위기감을 느꼈네. 원래 이랬던 동네에 그렇게 오래 버텨왔으면서 엄살 부리기는···’
우리 리그에 절대적으로 고정된 선발 같은 건 없다. 시즌 10승을 무난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선발도 15승 할 수 있을 것 같은 선수가 나타나면 밀린다.
“정말 한 해도 편하게 가는 해가 없네. 이적하고 맞은 첫 시즌부터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그냥 욕심부리지 말고 5선발이나 해야겠어.”
조용하던 드로이넨까지 한마디 보탠다. 절대로 밀리지 않겠다는 그 나름대로의 의사 표현 방식인 것 같다.
“메기 한 마리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죠.”
“하아! 로저스 넌 입 좀 다물어. 넌 그 입 때문에 언젠가 큰코다칠 날이 있을 거다.”
“메기 효과를 말하려는 거야?”
점잖은 드로이넨마저 벌써 반응이 별로 좋지 않다.
“풋. 설마 내가 청어고 존슨이 메기라는 뜻이야? 반대겠지. 아직 존슨은 도전자라고. 원래 쟁취보다는 방어가 쉬운 거야.”
드로이넨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그냥 가볍게 웃었다.
오래전 북해에서 잡은 청어를 멀리 보내려고 할 때는 청어가 들어있는 수조에 천적인 메기를 넣었다. 메기와 같은 강력한 포식자가 나타나면 살기 위해 각 개체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게 되고, 결과로 그 수조의 청어는 긴 시간을 버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메기? 메기 비슷하게는 생겼네. 그렇지만 아직 덜 자랐군. 메기가 될지 잡어로 끝날지는 아직 모르지. 시즌은 길어.”
의외로 소르카가 뾰족하게 반응했다. 1선발은 별 상관없을 것 같은 상황인데도 반응이 영 좋지 않다. 메기론에 긁혀서 기본이 별로인가 보다,
“계약 마지막 해라고 봐 줄 거라고 생각하나? 요즘 한두 해 더 해볼까 생각 중인데··· 글쎄 은퇴 결심을 하게 만들어 줄지 기대가 되네.”
애덤의 표현은 부드러운데 말투는 섬찟하다. 은퇴 시즌이라 너그럽게 자기 자리를 물려주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순순하게 주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을 분명히 한다.
‘어? 아저씨. 어제도 올 시즌만 하고 은퇴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말이 다르잖아. 다 선발하겠다고 하면 어쩌라구, 나야 누가 메기인지는 상관없지만. 최소한 내게 청어가 아닌 건 확실하잖아. 당연히 내 자리는 보장되겠지. 열심히들 싸우세요.’
“음 메기 효과는 원래 거짓말이야. 천적이 옆에 있으면 자극을 받는 건 맞아. 하지만 그 자극이 활력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스트레스가 되기 쉽지. 청어의 천적이 메기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 수조에 몰아넣으면 청어는 더 빨리 죽을 거야.”
‘오! 레블론. 원래 이렇게 진지한 사람이었어?’
투수들의 신경전에 레블론이 슬며시 브레이크를 걸었다. 싸우지 말라는 말 같은데 은근히 기분이 나쁘긴 하다. 정말 싸운다고 해도 내가 다칠 것 같지는 않다.
“메기는 비유일 뿐이야. 실제로는 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자극이 될 수 있는 위협 요인이 필수적이라는 경영 이론일 뿐이라고. 농담에 정색하기는···”
“그렇죠. 그 말이 옳습니다. 하핫. 그냥 그런 단순한 비유였어요.”
로저스는 자신이 무심코 뱉은 한 마디가 생각지도 않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억지웃음으로 무마를 시도한다.
“그나저나 너 어쩌냐?”
“뭘?”
“다섯 자리에 여섯 명이 붙었는데 누가 제일 약체일까?”
이대로 그냥 넘어가기엔 너무 싱거운 결말이다.
“So. 내가 가장 밀린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하하핫. 재미있는 농담이네.”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로저스는 동계훈련에 친구를 불러들여 제 발등을 찍은 것일지도 모른다.
“시즌 시작할 때도 니가 웃었으면 좋겠어. 그런데 아닐 것 같은 생각이 왜 이렇게 드는지 모르겠어. 뭐! 다 잘되겠지. 열심히 하자고.”
아직 애다. 감정 조절에 서투르다. 별거 아닌 말에 얼굴빛이 변했다.
“내가··· 흥. 두고 봐. 누가 남을지.”
우물거리듯 말했지만 다 들켰다. 그는 이제야 현실 자각이 드나 보다.
***
“안녕하십니까. 청취자 여러분! 자이언츠의 28번째이자 마지막 시범 경기인 애슬레틱스와의 일전이 곧 벌어집니다. 오늘은 애리조나 매사의 호호캄 스타디움에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우리 팀의 연승이 마지막까지 이어질지 기대가 됩니다. 오늘도 진행에 그래엄. 해설은 데이빗 씨가 함께합니다.”
“시범 경기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건 곤란해요. 시범 경기는 말 그대로 시범일 뿐이니까. 신인과 새로 영입된 선수들의 팀 적응을 돕고 기존 선수의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용도 이상을 기대하는 건 욕심이지요.”
해설자 데이빗이 노련하게 발언 수위를 조절해냈다.
“글쎄요. 본 경기든 시범 경기든 저는 우리 팀이 무조건 이겼으면 좋겠군요. 더군다나 올 시범 경기에서 지금까지 보여준 선수들의 컨디션과 신인급 선수들의 성장세에 미루어 정규 시즌 성적을 짐작해보자면 아주 긍정적인 생각밖에는 안 듭니다. 아마도 2030 시즌은 우리 팀에게 아주 좋은 시즌이 되지 않을까요? 짝수 해이기도 하고.”
좀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짝수 해의 자이언츠에게는 좋은 기억이 많다.
“오늘의 스타팅 라인업입니다.”
1. 크리스 LF
2. 알버트 RF
3. 베그웰 C
4. 레블론 CF
5. 필 1B
6. 테일러 3B
7. 루터 DH
8. 크로포드 2B
9. 패터슨 SS
산체스 P
“투수를 제외하면 이 라인업을 베스트라고 봐야겠죠?”
“그렇습니다. 작년 시즌 하반기와 거의 비슷하지만 타선의 무게감이 많이 달라졌어요. 시범 경기 동안 알버트롸 베그웰의 장타가 폭발하고 있죠. 스토브 리그 때 특별한 타선 보강을 하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는데, 그 틈새를 기존 선수들이 메꿔 주고 있습니다.”
상하위 타선의 불균형이라는 약점은 있지만, 작년에 비해서는 한결 개선된 타선이었다.
“알버트 선수까지 그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요? 작년 하반기에게 빅리그 무대에 데뷔해 아직 신인 자격을 유지하고 있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신인상 후보 자격은 26인 로스터 등록 일수가 45일 미만이여야 하고 타자는 130타수 이하, 투수는 50이닝 이하로 투구했어야 유지되는데 알버트 선수는 이 조건을 충족합니다. 벌써 올 신인상의 가장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죠.”
“이제 개막이 눈앞으로 다가왔네요. 새 시즌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 빠트릴 수 없는 소식이 있지 않나요?”
원래 자이언츠는 본즈가 있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폭발적인 타선의 힘으로 승리하는 팀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자이언츠의 팀컬러는 선발 야구에 충실한 팀이었다. 몇 년간의 암흑기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은 자체 팜 출신의 투수들이 꾸준히 성장해 준 것이었는데 급기야 올 시즌 데이브 존슨마저 터질 기미가 보였다.
“빅리그 데뷔 3년 차에 들어선 존슨 선수가 시범 경기 내내 맹위를 떨쳤죠. 물론 아직은 의문 부호가 좀 붙어 있긴 하지만 어쩌면 좌완 파이어볼러의 대명사였던 존슨이라는 이름을 구별해서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고평가를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시범 경기 시작 전 내셔널 리그 5위권으로 평가받았던 우리 팀 선발 투수진이었는데 데이빗은 그 순위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연하죠. 그 예상은 강력한 원투 펀치를 받쳐줄 허릿심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전제를 깔고 한 평가였어요. 지금은 어떤가요? So와 소르카는 여전하고 나머지 선발 투수들조차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잘 던져주고 있죠.”
데이빗은 리그 최고의 선발진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 샴페인을 터트리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였다.
“마지막 시범 경기이지 않습니까. 이제 선발 투수를 결정해야 할 텐데 데이빗은 최종적으로 선발 투수진에 누가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미래를 생각한다면 젊은 선수가 포함되는 게 맞겠지만, 긴 시간 묵묵히 자리를 지켜준 노장을 외면할 수도 없겠죠. 선발 자리가 다섯이라는 게 지금 자이언츠 프런트의 가장 큰 고민일 겁니다.”
“경기 시작합니다. 심판의 플레이볼 선언과 함께 1번 타자 크리스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초구. 쳤습니다. 깨끗한 좌전 안타입니다. 오늘도 역시 아주 상쾌한 출발입니다.”
그래엄 캐스터는 요즘 나날이 즐거웠다. 자이언츠가 도무지 질 것처럼 생각되지 않았다. 투수진은 탄탄했고 타선은 끈끈했다.
“2번 알버트. 큽니다. 타구는 외야 우중간을 완전히 갈랐습니다. 오늘은 1회부터 폭발합니다. 선취 득점 자이언츠. 가자! 자이언츠.”
1번부터 4번 타자까지 4연속 안타로 2득점 무사 2, 3루. 자이언츠는 초장부터 화끈하게 밀어붙였다. 1회의 광란이 끝났을 때 자이언츠는 타자 일순하며 6득점을 올렸다.
“자이언츠의 긴 공격이었습니다. 광고 듣고 다시 오겠습니다.”
경기 시작부터 얼마나 고함을 질렀는지 아직까지 한 이닝의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스포츠 캐스터 그래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1회부터 그렇게 열을 올리면 어떻게 해. 페이스 조절을 좀 해야지.”
“괜찮습니다. 목이 쉬어도 괜찮으니까 정규 시즌에도 맨날 이렇게 이겼으면 좋겠네요. 요즘 정말 선수들이 미친 것 같아요. 이 기세가 정규 시즌까지 이어질까요?”
“그거야 알 수 없지. 하나 말할 수 있는 건 타격 컨디션은 기복이 심하지만, 투수력은 오르내림이 덜하지. 결국에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투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