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93화 (93/200)

93화. 타고난 놈이 노력하면

“빠른 공을 던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얼마나 잘 전신 관절의 움직임이 부드럽게 이어져 마지막 팔 스욍에 이르기까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가입니다. 이것이 잘 이루어지면 힘은 점차 증폭되어 모이게 되고 최고의 가속이 만들어집니다.”

찰칵-

프로젝터에서 쏟아진 빛으로 만들어졌던 화면이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조금 전까지 크게 나오던 투수의 와인드업 동작이 부분으로 나눠져 투수의 각 관절 부위를 크게 확대하고 있었다.

“근육이 관절을 움직이고 그것에 전신 골격이 연동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빠른 속도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근력 혹은 순발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이어볼러는 체형이나 체격에 크게 구애를 받지는 않습니다. 음. 큰 상관이 없다는 거지 키가 6피트(약 182cm) 이하 이러면 곤란해요.”

푸하하-

앉아서 강의를 듣던 사람들에게서 일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터커. 넌 안 될 거 같네.”

“시끄러. 닉. 니가 뭘 안다고 그러는 거야. 이보세요. 코치. 팀 린스컴이 6피트쯤 되지 않았나요? 예외는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에서 질문이 나왔다. 퉁명스러운 어조다.

고등학생들이지만 이미 체격은 성인이었다. 다들 투수를 하고 있으니 6피트 이하는 없을 것 같아 무심코 던진 가벼운 농담이었는데 어디나 예외는 존재했다. 슬며시 자책을 하며 고 코치는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예외는 있지요. 신장이 작아도 예외적으로 강인한 어깨를 타고난다든지 해서 100마일을 던지던 투수들이 있었죠. 린스컴도 그랬고 다른 예를 찾자면 비공식이지만 가장 빠른 볼을 던졌다고 하는 달코스키 같은 선수도 키가 6피트가 안 되었죠.”

“아주 드문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씀하시면 안 되었던 것 아닙니까?”

그 학생의 부모인 것 같았다. 자기 애가 맞고 들어왔다고 아버지가 화를 낸다.

“그 말이 맞습니다. 생각보다는 숫자가 좀 되긴 합니다. 하지만 그 선수들은 예외를 찾기 힘들 정도로 롱런 하지 못했었죠. 앞서 예를 든 린스컴도 28세 시즌에 데드암 증상이 생겼고 달코스키도 24살 때 인대가 끊어져 끝나버렸죠.”

“그럼 코치님 주장은 체격이 작은 선수는 장래성이 없으니 투수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가요?”

이제 그 부모의 목소리에 걱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런 말은 한 적이 없습니다만, 꼭 빠른 볼을 던질 수 있어야 좋은 투수가 되는 건 아닙니다. 이걸 좀 뒤집어 생각해 보면 빠른 볼을 못 던진다고 꼭 나쁜 투수는 아니라는 거죠.”

빠른 볼을 던질 수 있으면 좋은 투수가 될 확률이 절대적으로 높긴 하다. 하지만 옳은 생각이라고 해서 아무 때나 다 공감받을 수는 없다.

“모든 결과를 더듬어 올라가면 분명한 원인과 이유가 있습니다. 투구 시에 허리가 빨리 열린다면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 전 동작을 수정해야 합니다. 팔꿈치의 각도가 이상하다? 역시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하는 원인이 된 예비 동작이 있을 수밖에 없죠.”

청중의 고개가 끄덕여진다. 처음 생각했던 방향과 틀어지기는 했지만 겨우 다시 방향을 바꿨다. 고 감독은 숨을 몰아쉬었다. 여기서 피치를 올려야 했다.

“신체 단련과 사용에 있어서 세밀한 순서가 필요하고 작은 관절 움직임 하나라도 규칙이 존재합니다. 투구 폼은 원인과 결과라는 관계의 연속으로 이루어집니다. 각자의 신체 조건과 지금 가진 역량이 서로 다른 만큼 성장기에는 세밀하게 토대를 쌓아가야 합니다.”

찰칵-

띄워져 있던 화면이 바뀌었다. 마지막 사진 한 장. 회심의 위닝샷이다. 지난겨울 훈련 모습이다.

“저희는 오랜 코칭 경험을 바탕으로 첨단 장비의 도움을 얻어 현역 메이저리그 투수들의 비시즌 훈련과 컨디션 관리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아빠. So야. 로저스, 체이스도 있어.”

“맙소사. So의 에이전트라고 하더니 다른 투수들이 있었어?”

조그맣게 시작된 파문이 삽시간에 웅성거림으로 변했다.

“모든 선수를 다 코치가 지도한 건가요?”

어느 이에게서 질문이 나왔지만, 아직도 미심쩍은 듯 묻는 목소리에 확신이 안 보인다.

“So는 지금 학생들 정도의 나이부터 코칭을 했었습니다. 원래 저를 처음 만났을 때 So는 오버핸드의 투구 폼을 가지고 있었죠. 제가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 뜯어고쳤습니다. 지금까지 10년 이상의 오랜 기간을 함께 하고 있죠.”

“그랬군요. 어디서 So에게 개인 코치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게 고 코치였네요.”

누군가 아는 척을 했다.

“So 이외의 투수들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해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만큼 저의 혁신적 코칭법에 감화되었다고··· 음. 상식적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게 얻을 것이 있으니 찾았겠죠. 메이저리그 선수가 코치가 없어서 오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설득을 위해서는 판단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최종 판단은 자신이 내린 걸로 되어야 자연스럽게 넘어온다. 고 감독이 레이저 포인터로 한 선수를 지목했다.

“이 선수를 주목해 주세요. 이름은 데이브 존슨. 자이언츠 선수입니다. 생소하시겠지만 이 선수가 지난겨울 동안 가장 큰 발전이 있었습니다. 제가 예측을 하나 하겠습니다. 이 선수는 올 시즌 선발 10승 이상 할 겁니다.”

“누군지 알아?”

“응. 작년에 자이언츠 땜빵 선발로 몇 번 나왔었어. 개 털리고 마이너 갔다고 들었는데··· 공만 빨랐지.”

부모들은 잘 모르는 듯했지만, 투수 하는 학생들답게 일부는 자이언츠 투수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를 직접 코칭을 했다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코칭이 아니라 조언을 했죠. 이를테면 골프에서 말하는 원 포인트 레슨 같은 거죠. 기술적인 부분이 완성되었거나 그에 가깝지 않으면 메이저리그로 콜업될 수 없습니다. 물병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꽃병으로 못 쓸건 없지만, 접시로 쓰기는 어렵지 않겠어요?”

“그런가요?”

드디어 질문 대신 긍정 표현이 나왔다.

“배우는 건 어릴 때 해야죠. 메이저 선수들은 이미 뭘 가르치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처음 만들 때 용도에 맞게 설계를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술적으로 어느 정도 완성되고 나서 뭘 다시 한다는 건 그릇을 깨뜨리기 쉽죠.”

“그렇다는 건···”

“조건이 맞지 않는데 억지로 패스트볼만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파워피처는 로망이지만 현실은 롱런한 피네스피처가 더 많습니다. So도 90마일밖에 못 던지지만, 최고 투수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건 자신에게 맞는 걸 찾는 겁니다. 저희 아카데미는 선수로서 한 단계 더 올라설 수 있는 교육과 관리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마일리에게 권유받아 자신 있게 나섰지만, 고 코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다 야구가 더 쉽다고 느끼고 있었다.

에이전트 사업은 쉽지 않았다. 출발은 원활하게 이루어졌지만, 확장은 또 다른 문제였다. 기존의 에이전트 회사들에 비교 우위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실적은 부족하고 야구계 인맥도 풍부하지 않았다. 그런 조건으로는 신규 고객 유치가 아주 어려웠다.

“주 1회 레슨이라고 하셨죠? 비용이 어떻게···”

관심을 가지는 부모가 나오기 시작했다.

“따로 비용은 받지 않습니다. 다만, 누구나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것은 아니고 저희 회사에서 정한 기준을 통과해야 합니다. 기초 체력과 메디컬 테스트 정도이고 지금 실력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통과가 되면 에이전트 계약을 맺으면 됩니다. 그때부터 저희가 제공하는 모든 혜택을 누리실 수 있습니다.”

“신청하면 바로 테스트받을 수 있는 거요?”

“예. 출구 쪽에 접수대가 있습니다. 신청하시면 시간을 지정해 드릴 겁니다.”

발상을 바꿨다. 메이저 선수와의 계약이 어려우면 아마추어 유망주를 계약해서 메이저에 올리면 된다.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

“스트라익.”

아주 오랜만에 하는 라이브 피칭이지만 손끝에 감기는 실밥의 느낌이 너무 좋았다. 이런 날 실전을 해야 하는데 정규 시즌이 시작하려면 아직 한 달도 더 남았다.

가라앉는 싱커는 예리하게 떨어졌고 슬라이더는 마지막까지 패스트볼과 구별하기 어려운 궤적을 그렸다.

“배터 아웃,”

평소보다 투심의 꺾이는 각이 훨씬 더 크다. 보통 때는 배트에 비켜 맞아야 할 공에 배트가 스치지도 못한다. 공은 아무런 저항 없이 홈플레이트 위를 그냥 통과해 버렸다.

“So. 이봐.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이거 훈련이라고. 이러면 훈련이 안 되잖아.”

공을 한 번도 맞혀내지 못하고 헛스윙만 세 번 한 레블론이 타석에서 물러나며 투덜거렸다.

‘누가 뭐래? 나도 슬슬 좀 던지고 싶다고. 그렇게 안 되는 걸 어쩌라구. 하필이면 이런 날···’

“So. 그만하지. 오늘은 점검 차원이니까 처음부터 너무 힘 뺄 거 없어.”

한 타자 더 상대하려고 했더니 리우드 코치가 말린다.

“예.”

원래 세 타자만 상대하고 내려오는 것으로 되어있긴 했었지만 아주 아쉽다. 10구밖에 안 던졌다. 투구 수가 너무 적었다. 연습구라도 좀 더 던져야 하는 게 아닌지 고민스럽다.

“쩝.”

마운드에서 내려와 벤치에 앉으려다 선뜻 앉지 못하고 입맛만 다셨다. 시원하게 한번 던져보고 싶었는데 감질만 난다.

“하핫. 완전히 장난감 뺏긴 어린애 얼굴이네. 오늘 공 좋던데··· 겨울 잘 보냈나 봐. 나도 내년엔 거기나 따라갈까?”

먼저 투구를 끝내고 앉아 있던 소르카가 물병을 건네주며 웃는다.

“유부남 사절이야. 일 년의 절반은 외박이고 가끔 집에 가도 잠만 자고 나오잖아. 비시즌까지 그러면 가정이 남아나겠어? 가정의 평화를 지키세요.”

“그건 그렇지. 그래도 궁금하단 말이야. 겨울에 뭘 하기에 거기 갔다 온 선수들이 날아다니는 건지···”

“뭘 하긴··· 훈련이 거기서 거기지. 별다르겠어? 좀 혹독하게 하는 편이긴 해도 특별하게 뭘 따로 하는 건 없어. 올해는 여러 명이서 같이 하니까 경쟁 심리가 생겨서인지 다들 상당히 열심히 하더라고.”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고 감독이 경쟁 심리를 만들어내고 지랄 맞게 쪼아 댔다. 그것 빼고는 별거 없었다.

“로저스도 그렇고 체이스도 아주 컨디션이 좋아 보이던데···”

“그정도 가지고 뭘 그래. 아직 진짜는 등장도 안 했다구.”

“진짜? 누구 이야기하는 거야? 투수 중에 같이 훈련한 건··· 설마 존슨?”

프로 레벨에서 실력이 단기간에 늘어나기는 어렵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것도 사람 나름이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실감했다.

‘사람 탈만 썼지 그놈은 사람이 아니야. 사람이면 그럴 수가 없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