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92화 (92/200)

92화. 반지가 필요하다

“크크큭.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어쩌긴··· 모두 얼어붙었지. 아침에 러닝하다가 집채만 한 악어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과 딱 마주쳤는데 기분이 어땠겠냐구. 이제 마지막인가 싶고···”

난 진짜 그랬었다.

“빨리 돌아서 도망가면 되지. 그 정도 가지고··· 플로리다에서 골프 치면 그런 일은 가끔 있다고 하던데. 예전에 어느 방송에선가 골프 대회에 악어 나오는 걸 본 적도 있었어.”

‘자주 있는 일이면 방송에 나오겠냐? 특이한 일이니까 나오는 거지.’

화면으로 본 것으로는 그때 그 공포를 10분의 1도 알 수 없다. 악어의 감정 없는 노란 눈알을 보면 정말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동물원 울타리 안의 악어와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다.

“너도 실제로 한번 겪어봐야 하는데. 암튼 한 5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놈이었어. 전동카트보다 한참 더 큰 느낌이었어. 그런 놈이 뒤뚱거리며 걸어오는데 처음엔 너무 큰 게 움직여서 오히려 눈에 안 들어왔다니까.”

아침부터 베그웰이 요란하게 입을 털었다. 같은 테이블의 선수들뿐만 아니라 옆 테이블의 선수들까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아! 베그웰. 밥이나 먹어라. 정말 아침부터···’

“뛰다가 모두 멈춰서 멍하니 그걸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저스가 입을 열었지. 그때 뭐라고 그랬냐면···”

“엄마라도 찾았어?”

“풋. 크크큭”

누군가의 어이없는 말에 모두에게 헛웃음이 터졌다.

“내가 몇 살인데 그랬겠어. 그때 그건··· 잠시 당황해서 말이 헛나온 거였을 뿐이었다구.”

로저스가 억울한 듯 반박했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굉장히 진지하게 내 최후가 이럴 줄 알았다면 아침 먹을 때 스테이크 소스라도 뿌려 먹을걸. 그러더라구.”

옆에서 거든 체이스의 말에 테이블이 뒤집어져 버렸다.

“푸하하하. 진짜 로저스다운 말이네.”

“크크큿. 식단 조절하는 게 엄청나게 힘들었나 보지?”

그때 나도 이렇게 웃을 수 있었으면 아주 좋았을 것 같다. 그때는 전혀 웃기지 않았다. 눈앞의 티라노사우루스급 악어에 압도되어 공포감만 가득했었다.

“이렇게 무사히 스프링 캠프에 다 나타난 걸 보면 어떻게 악어는 잘 피했었나 보네. 결국 도망친 거야? 어떻게 처리했어? 그거 땅에서는 느리잖아. 빨리 뛰면 못 쫓아 왔을 거 같은데···”

역시 우리의 에이스 소르카가 가장 먼저 이성을 찾아 제대로 된 물음을 던졌다.

‘그때 구원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었지.’

“결말은 좀 싱거운데··· 우린 놀라서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거든. 생각해 보면 전동카트에 타고 있었던 고 코치 같은 경우엔 차를 그냥 막 달렸으면 악어가 못 쫓아왔을 텐데 그는 달리지도 못하고 그 대신 카트 지붕으로 올라갔지.”

‘그거야. 사람이 당황하면 허둥거릴 수도 있지. 음. 설득력이 좀 떨어지긴 하네.’

아무리 덮어주고 싶어도 쉴드가 안 된다. 차 지붕으로 올라간 건 너무 모양새가 떨어지는 행동이긴 했었다.

“우리가 그러고 있을 때 케이트가 나섰어.”

“케이트? 너희 동계훈련하는 데 여자가 있었단 말이야? 너희들 훈련하러 간 거 맞아? 여자를 훈련에 데려가?”

애덤이 이상한 걸 걸고넘어졌다.

‘노친네. 대충 좀 넘어가자.’

“그게 설명하려면 좀 복잡한데··· 아무튼 그때 우리와 함께 촬영팀이 있었어. 케이트는 조감독이었고···”

“그래?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다음엔···”

“그녀가 막대기를 들고 악어를 몇 번 꾹꾹 찌르니까 악어가 스르르 방향을 틀어서 다른 쪽으로 가버렸어. 셀카봉 같은 가느다란 접는 막대기였는데 원래는 거기 마이크를 매다는 용도라고 하더군.”

일반 막대기가 아니었다. 그건 발키리의 창과 같은 거였다. 진실을 왜곡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발키리 알아? 원래 발키리가 토르의 딸이고 창을 들고 전진하는 자라는 뜻이야. 우란 여신에게 구원받았던 거야.”

“크크크. So는 왜 저래? 악어에 놀라서 지병이 도진 거야? 아님 마블의 찐팬?”

이런 세상의 박해와 고난은 다 감수할 수 있다.

“사랑을 하면 남자는 바보가 된다고 하잖아.”

입 가벼운 놈과는 앞으로 같이 다니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사랑? 크크큭. 그래? 어째 그 스토리가 악어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을 것 같네.”

“So가 사랑에 빠진 건 맞는데 그래서 바보가 된 건 아닌 것 같아. So는 알고 보니까 원래 바보였었어.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거야.”

늘 그렇지만 로저스 저놈은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은 갈 텐데 사서 매를 번다. 뭐라고 해도 좋다. 세상의 오해와 모함. 이런 것에 난 아주 익숙하다.

“허허. 미숙한 사랑은 당신이 필요해서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사랑하니까 당신이 필요하다고 하는 거야. 애들이 뭘 몰라서···”

언제나 난 할 말은 한다. 나의 진정성 있는 말에 선수들이 공감한 것 같다. 모두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완전히 대사가 그거 같은데··· 그거 맞지?”

드로이넨이 말하는 그게 뭔지 상당히 궁금하다.

“응. 내 생각에도 그거 맞는 것 같아. 본인은 아니라지만.”

베그웰의 그것과 드로이넨의 그것이 같은 것일까?

“취향 참 독특하네. 악어를 상대하는 모습에 뻑이 갔다는 거 아냐.”

‘뻑이라니··· 그런 비속어를 사용하면 곤란하다고.’

케이트를 지칭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그냥 넘어 가주기로 했다.

“그 여자는 악어 농장 집 딸쯤 되는 거야? 막대기 하나로 거대 악어를 어떻게 돌려세울 수 있었지?”

‘여신 맞다니까.’

“아! 그녀가 예전에 악어가죽 산업을 소재로 한 다큐를 찍은 적이 있었다더군. 그래서 악어의 습성에 익숙하다고.”

“그것참! 크크큭. 그래서 그 케이트는 지금 어디 있는데··· 답이 너무 뻔할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네.”

걱정도 팔자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뭐가 마음이 아파? 자기 일 열심히 잘하고 있는데··· 다음 촬영이 기후변화에 대한 것이라서 북유럽에 갔어.”

“음. 널 놔두고 그냥 가버렸다? 음. 과연 그게 정상적인 것일까?”

자기 본분에 충실한 건 사회인으로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몇 개월 후에 다시 만나면 된다.

“했냐?”

밑도 끝도 없는 말이다. 애덤이 이상한 걸 묻는다. 프라이버시 침해가 심각하게 우려되는 질문이다.

“뭘요?”

“그거 말이야.”

“그거 뭔데···”

왜 구체적으로 말을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앞에 말한 그거와 뒤에 말한 그것이 같은 것인지도 궁금하다. 난 홍길동이 아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형을 형이라 한다.

‘그걸 왜 말을 못해. 그것은··· 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가? 내가 홍 씨가 맞았나 보네.’

“말하는 것 들어보면 몰라요? 안 한 거지. 아니, 못한 거겠죠. 어휴!”

소르카가 한숨을 내쉰다.

나도 다 안다. 하지만 때로는 알아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편할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반지가 필요해요. 청혼하려면···”

“뭐라고? 너 제정신이냐?”

모두 펄쩍 뛰는 게 너무 이상하게 느껴진다. 여기 있는 사람 중 절반은 유부남이다. 그런데 왜? 자기들은 하면 되고 내가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 결과를 만들어내려면 그것을 성취하고 싶은 동기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허헛. 그런 걸 다른 사람에 묻는다고 답이 있겠어? 결심했으면 하면 되지. 너도 이제 돈 많잖아. 반지는 어디든 가서 아무거나 하나 사. 청혼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애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기려고 했다.

“그런 보통 반지로는 격이 떨어지잖아요. 돈으로 살 수 없는 반지가 필요해요.”

적어도 어머니의 시계에 어울리는 격이 맞는 반지였으면 한다.

“푸하하. 그 반지는 나도 갖고 싶긴 해. 마지막 시즌에 반지라··· 청혼에 대해 기혼자로서 하나 조언하자면 애정 때문에 결혼하는 자는 분노 때문에 죽는다라는 말을 잘 생각해 보게나.”

“So가 생각보다 낭만이 있네. 별수 없지. 동료의 청혼을 위해서 우승하는 수밖에···”

우리 에이스의 말은 언제나 옳다.

“동기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결론은 마음에 드네.”

선수들 모두 아주 긍정적 반응이다. 원래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다. 경치 좋은 곳에 누웠는데 그게 마침 정자였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면 여기 왜 왔는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난 이번 시즌 우승을 할 것이고 반지를 손에 넣을 거다.

‘그리고 다른 것도···’

“그런데 악어는 한 번만 마주쳤어? 재작년에도 거기서 훈련했었다며··· 그동안 한 번도 못 봤었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그건 다 누구 때문이다.

“악어는 말이지. 그 뒤로도 여러 번 나왔는데 자꾸 마주치니까 아무렇지도 않더라고. 특별하게 공격적이지도 않고 순하고 착한 놈이었어. 자기 앞만 가로막지 않으면 아무 일 없이 그냥 가던 방향으로 쭉 가더군.”

그건 베그웰의 경우고 내 경우는 달랐다. 난 볼 때마다 끔찍했었다. 사람도 믿기가 어려운데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악어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악어가 나왔던 날은 배팅 게이지에서 연못에 공을 많이 빠트린 다음 날이었다. 언제나 그랬었다. 그것이 얌전히 잘 있던 악어를 자극해 뭍으로 오르게 했다. 다 타자 놈들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배팅 게이지를 그따위로 설치한 놈들도 공범이다.

배그웰이나 알버트나 그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 더 열심히 공을 그물망 너머로 보내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살살 좀 치라고 그렇게 권유를 했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악어 없는 우리나라 정말 너무 좋은 나라다.

“So도 그렇고 고 코치도 보기보다 간이 작아요. 우리 할아버지 이야기로는 옛날 사냥할 때 악어를 잡아서 대충 그을려 사냥개 먹이로 던져졌었다고 하던데 악어가 뭐가 어떻다고···”

어린 애가 정말 못하는 말이 없다. 정말 뒤뜰에 곰이 나오고 상시로 코요테와 퓨마를 마주치던 놈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이제 모두의 이야기가 제각각인 걸 보니까 밥은 다 먹었나 보다. 훈련이나 하러 가야 할 것 같다.

“존슨 너 그거 언제부터 던질 거야? 어제 왜 안 던졌어? 리우드 코치가 상당히 걱정스러운 눈치더라.”

“왜? 뭐라고 해요? 그냥 패스트볼 위주로 던지라고 해서 슬슬 던졌죠. 그렇게 걱정하면 베그웰이 슬쩍 말해주지 그랬어요.”

존슨도 구렁이가 다 되었다. 본인을 마냥 드러내기보다 주변을 먼저 살핀다.

“니가 가만히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먼저 하겠어. 코치가 무슨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눈치가 뻔하잖아. 그래도 물어봤으면 어떤 말이든 좀 해주려고 했는데 아무 말 없이 그냥 돌아서더라고.”

“캠프 들어온 지 이틀 지났는데 급할 게 뭐가 있어요. 낼모레 타자들 들어오면 그때 라이브 피칭하면서 보여주면 되죠. 코치가 그냥 봐서는 잘 모를 수도 있잖아요.”

‘모를 수가 있을까? 수십 년간 투수로 선수 생활을 하고 가르쳐온 사람이··· 존슨이 적응기만 좀 지나면 어쩌면··· 그래 봐야 물론 내 다음이겠지만.’

올 시즌 우리 팀은 우승 전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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