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90화 (90/200)

90화. 전지훈련장은 평화롭다

딱-

플로리다에서 훈련을 시작한 지 한 달 반 만에 피칭 머신을 이용한 배팅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물망으로 사면을 감싼 배팅 게이지가 한국에서 많이 보던 골프 연습장처럼 보인다.

‘한국 같으면 일주일이면 다 만들었을 것 같은데 오래도 걸렸네.’

훈련하면서 그물망 친다고 인부들이 오가는 것을 자주 봤었는데 진척이 지지부진하더니 결국 다 되긴 했다.

“위쪽은 왜 안 막았어?”

“길어야 두 달 쓸 시설인데 대공사를 할 수는 없잖아. 그쪽까지 막으려면 기둥도 더 세워야 하고 공사가 복잡해진대. 그래서 간단하게 했어. 그물 넘어가면 홈런이지. 나나 알버트가 몇 개나 넘기겠냐구.”

그 말은 맞다. 베그웰과 알버트가 장거리 타자는 아니다. 베그웰은 전형적인 똑딱이고 알버트도 홈런보다는 2루타가 많은 중거리 타자다.

“그래도 혹시 넘어가면 골프 치던 사람들이 맞을 수도 있잖아. 조심해야···”

딱-

“오! 크다.”

“풋! 좀 전에 못 넘긴다고 한 말 들었나 보네.”

말 나오기 무섭게 타구가 그물망 너머로 훨훨 날아갔다.

풍덩-

예상치 않은 소리가 들린다.

“음.”

누구든 다 생각이 있었다.

“호수에 빠진 공은 잃어버리겠지만 그거야 어쩌겠어. 너도 밤에 심심하다고 벽 긁지 말고 심심하면 여기 와서 공이나 쳐.”

작은 규모지만 라이트 시설도 있고 한번 고려해 볼 만한 말이다. 타격을 언제 해 봤는지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굳이 하려면 못 할 것도 없다.

“옛날에 나도 좀 쳤었다구. 내가 좀만 연습하면 이도류도 가능하지.”

리틀 야구 할 때는 그랬었던 것 같다.

“푸하하. 어련하겠어.”

***

“오늘도 끝내주네. 너무 잘 먹었어.”

“그래? 그렇게 감동 받았으면 오늘 뒷정리는 니가 하는 걸로 알고 있을게.”

존슨의 방심을 로저스가 순간적으로 치고 들어갔다.

“오! 그래? 솔선수범 좋지. 오늘 뒷정리는 존슨이 한다네.”

“고마워. 매일 해주면 더 좋은데··· 수고해.”

정글에서 방심하면 돌이킬 수 없다. 상처 입은 사냥감은 무력하다. 선수들이 후다닥 자리를 떠나 버렸다. 맨날 당하면서도 존슨은 대수롭지 않은 듯 웃으며 넘기고 있다.

“참! 너도 마음이 태평양이네.”

“다 좋은 애들이에요. 이 정도야 별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다. 뒷정리라고 해봐야 사용한 그릇 모아서 큰 물통에 담가 놓으면 클럽하우스 직원들이 아침에 출근해서 다 씻어서 정리해준다. 다 탄 숯이나 버리고 앉았던 자리 주변 조금 치우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다.

‘둘만 있으니까 좀 어색하네.’

아버지와 고 감독은 촬영 팀에게 음식을 좀 가져다준다고 우리 식사가 끝나기 전 자리를 비우셨다. 그들이 숙소로 쓰는 트레일러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걔네들은 우리 밥 먹을 때 같이 앉아서 먹으면 될 걸 왜 이렇게 까다롭게 구는지 모르겠다.

‘일반인이 이런 고단백에 무염식을 먹는 건 무리일까?’

아버지와 고 감독도 매 끼니를 우리처럼 먹지는 않는다.

“저번 스프링 캠프에 참가하면서 So는 어떤 기분이었어요?”

‘윽!’

존슨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 왔다.

“무조건 선발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어. 뭘 고려하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거든.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그때 뭐 서운했던 거 있냐?”

“그런 건 없어요. 제가 이번에 비슷한 위치잖아요. 상황은 작년보다 훨씬 안 좋아졌고. 그래서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참고하려고 물어봤어요.”

다음 시즌 선발 다섯 명은 거의 확정적이다. 지난번에는 표면적으로나마 5선발이 미정이었지만 이번 스프링 캠프는 그런 것도 없을 것 같다. 선발진의 부상 같은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선발 후보를 추리는 정도일 것이다.

‘아마 롱릴리프 보직이 주어지겠지. 그렇게 뽑혀도 선발진의 급격한 부진이나 부상이 없으면···’

“지난번과는 다른 마음가짐이 필요하겠죠. 저번에는 솔직히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했던 것 같아요.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So의 호투가 거듭될수록 비교하려는 마음이 생겼었죠. 그것보다는 잘해야겠다라고 생각할수록 무리를 하게 되고 한 번에 무너져 내렸죠.”

너무 직설적인 말이라 오히려 듣기가 불편하다. 대답을 하긴 해야 할 것 같은데 맞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아니라고 말하기도 이상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음이 단단하지 못했었죠. 불안해하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그 뒤로도 여러 차례 기회가 주어졌는데 아시다시피 다 망쳐버렸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달라졌어?”

이 말밖에는 못 하겠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AA에서 던지고 있는 거예요.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던가 그렇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담담해지더라구요. 이번에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노력해 봐야죠.”

기세등등하던 엘리트 유망주의 앞길을 막고 그것을 디딤돌 삼았던 내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위선적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먼저 하는 내가 한심스럽다.

‘나도 많이 변했어. 별게 다 신경 쓰이네. 누가 지킬 것이 생기면 소극적이 된다고 하더니 딱 그 꼴이야.’

상대가 이렇게 다 드러내 놓고 말을 하는데 요리조리 흠 잡히지 않을 대답만 하려고 한 내 태도를 먼저 바꾸지 않으면 진지한 대화가 계속 이어지는 어려울 것 같다.

“스프링 캠프에서 당장 팀에 합류하는 건 어려울지도 몰라. 하지만 작년에 그랬듯이 선발진에 구멍은 언제라도 생길 수 있지. 지금 말처럼 조급해하지 않고 꾸준함을 보여준다면 시즌 중에 기회는 다시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해.”

“잘 해봐야지요. 여기서 또 밀릴 수는 없죠.”

그는 지난 시즌에도 전반적으로 잘 던졌다. 실점 위기가 오기 전까지는···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졌던 만큼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이미지가 코치진에게 굳어졌다. 선입견을 깨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밸런스를 조정한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건 좀 진전이 있는 것 같아?”

“잘 모르겠어요. 고 코치는 뭐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를 않아요. 투구 후에 몸이 틀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거라고 억지로 억제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군요.”

“그럼 밤에 셰도우 피칭 봐준다는 시간에는 뭘 하는 거야?”

“힘 빼는 걸 연습하죠. 전력투구할 때와 같은 모션으로 90%만 힘주는 연습을 해요. 와인드업인데 세트 포지션을 할 때 느낌으로 던지라고 하더군요.”

‘헐! 도대체 그게 어떤 느낌이야? 공기 반 소리 반?’

그런 건 보통 아주 컨트롤이 안 되는 투수에게 구속은 줄어들더라도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게 하기 위해 하는 극약 처방이다. 하지만 존슨의 컨트롤이 그 정도로 나쁘지는 않다. 의식적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질 정도는 된다.

케리 우드는 한 게임 20탈삼진을 기록한 파이어볼러로 유명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단일시즌 최다 몸에 맞는 공을 던진 투수이기도 하다. 그만큼 파워피처와 제구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그런 걸 한다고 뭐가 달라질 수 있는 건가? 100마일을 던질 수 있는데 그걸 굳이?’

파워 피처는 구속이 최고 무기다. 그게 줄어들면 배팅볼 투수가 될 수도 있다. 시키는 코치나 시킨다고 하는 선수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지만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다.

‘본인이 선택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책임은 본인이 지는 거지.’

본인은 느긋하게 마음먹은 것처럼 말하지만 이것저것 안 가리고 다 해보려는 것을 보면 많이 급한가 보다.

‘어! 아버지가 오시나 보네.’

작은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곳은 밤이 되면 암흑천지다. 작은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꽤 멀리 걸어가야 하는 게 불안해 보여 고 감독이 따라간 건데 별문제는 없었던 것 같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그냥 산책 삼아 슬슬 걷기도 했고 거기서 맥주 한 잔 얻어먹었다.”

그들이 예의 없이 굴진 않았던 모양이다.

“걔네들은 그냥 이 옆에 있으면 될걸. 왜 그렇게 유난을 떠는지. 그냥 이 옆으로 오라고 하지 그러셨어요. 식사도 같이 하고 그러면 자기들이 편할 텐데 굳이 외면하는 이유를 모르겠네.”

참 별난 사람들이다.

“그게 그 사람들도 나름 이유가 있더라고.”

고 감독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맥주 한 캔 먹으면서 이야기를 좀 해봤는데 그게 그 회사 방침이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들이 우리와 좀 어울린다고 폐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미국 사람들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게 아니라 피사체와 인간적 교류가 생기면 영상에 그게 드러난대. 예를 들면 애정 어린 시선 이런 게 나타나면 안 된다고 하더라. 자기 회사 다큐멘터리의 특징은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관객에게 판단을 맡기는 관찰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거라고. 그게 그 마이클 뭐라는 프로듀서 겸 사장의 원칙이래.”

올해 들어본 가장 황당한 말인 것 같다.

“제대로 들으신 거 맞아요? 해석이 잘못 되었다든가 그런 거 아니에요?”

“야! 나 이제 영어 잘해. 아마 내 영어가 너보다 나을걸? 그 친구들도 고민이 좀 되긴 한대. 그들이 이제까지 만들어온 영화들이 주로 사회 문제를 다루는 거였다고 하는데 이런 스포츠 관련된 영상을 찍는 건 처음이래. 접근 방법을 달리해야 하는 것 같기도 하다고 뭐라고 한참을 이야기하더라고.”

정말 어이가 없다.

“그럼 그 사람들은 그동안 어떤 영화를 만들었대요?”

“의료보험을 주제로 한 것도 있었고, 금융 위기에 대한 영화는 무슨 영화제에서 상도 받았다는데 내가 그런 쪽에 아는 게 있어야 대화가 되지. 그 외에도 많다는데··· 아무튼 그렇단다.”

버나드 씨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쪽과 계약을 했는지 모르겠다.

딱-

고요함 속에 소리는 멀리 퍼진다. 베그웰과 알버트가 밥 잘 먹고 힘이 뻗치는지 타격 연습에 나선 것 같았다. 어느새 타격 게이지 뒤 라이트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존슨. 우리도 해야지. 다들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우리도 연습해야 할 것 아니냐. 로저스하고 체이스 좀 데려와라.”

“다들 아까 배팅 게이지 쪽으로 같이 갔는데 아직 안 돌아왔어요. 우리가 저쪽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요?”

“그럼 가자.”

아버지와 단둘이 남았다. 아직도 이런 순간이 어색하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음. 주무셔야죠.”

“음. 그게··· 그래야지. 미안··· 먼저 들어가마.”

무엇인가 굉장히 생소한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그런 말이 왜 지금 나오는지 잘 모르겠다.

뭐가 미안할까? 사업하다 망해서? 부모님 당대에 스스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본인의 의지로 한 일인데 나한테 미안할 일이 뭐가 있을까? 잘나가든 못나가든 부모는 부모다.

한동안 연락이 끊겨서? 내가 미성년도 아니고 만 27살이 된 어른이었는데 스스로 나를 돌보는 게 정상적이다. 그렇지 못했던 그 전이 비정상적이었던 거다.

부모님이 그랬듯 이제 나도 자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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