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독한 놈이 뭐든 잘한다
“이거 반갑구만.”
“아! 예.”
살집이 넉넉한 체구에 구레나룻 무성한 아저씨가 내 두 손을 맞잡고 격하게 흔들었다. 다듬지 않은 머리카락과 수염이 사방으로 제멋대로 뻗쳐 있는, 얼핏 보면 노숙자로 보일 자유분방한 스타일이었다.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네. 아저씨가 아니고 할아버지인가?”
촬영 팀이라고 해서 제법 규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달랑 네 명이 왔다. 더군다나 프로듀서라는 이 아저씨는 곧 돌아간다고 했다. 가지고 온 장비도 별거 없는 것 같다. 주거를 겸한다고 하는 작은 트레일러 하나에 실을 수 있는 것 해봐야 뻔하다.
“여기는 현장 지휘를 맡을 조감독 케이트, 이 사람은 카메라 담당 크리스, 여기는 조명 및 소품 기타 등등 모든 것을 다하는 만능맨 월터야.”
“예. 안녕하세요.”
기대에 못 미친 탓인지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내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프로듀서는 자기 할 말만 계속 이어나갔다.
“여기서 그림 좀 나올 때까지 찍을 거고 시즌이 시작되면 관중의 시선으로 찍을 거야. 인터뷰 질문을 생각 중인데 그건 나중에··· 거기에 과거 방송된 자료 화면 좀 섞어 편집하면 다음 시즌 끝날 때쯤에 결과물이 나올 거야.”
마이클이란 이 아저씨에게 이번 일은 너무 쉽고 간단하게 생각되는 것 같다.
‘다큐멘터리 전문이라더니··· 그런 프로듀서면 불타는 예술혼 같은 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영화에 대해 잘 모르지만 내 다큐가 완전한 상업 영화는 아니었으면 하는 막연한 바람은 있었는데 이 양반의 관점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 같다.
‘이거 제대로 계약한 거 맞아? 스튜디오 메이저하고 작업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을 하더니 이건 어디 독립 영화사 중에서도 아주 영세한 곳인 것 같잖아. 이런 사람이 유명하다고?’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다.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생각이 잘못이었나? 손해를 좀 보더라도 직접 투자를 했었어야···’
“촬영 의식하지 말고 그냥 평소 하던 대로 하면 됩니다. 찍는 건 우리가 알아서 찍을 거니까 촬영자 신경 쓰지 말고 우리를 배려하려고 하지도 마세요. 그냥 평소처럼 해요.”
조감독이라고 소개받았던 케이트라는 여자가 웃음기도 없이 딱딱하게 말했다. 어려운 주문도 아니다.
‘그렇게 하면 당신들이 더 불편하지 않겠어?’
“그러지요. 촬영은 언제부터 시작하실 건가요?”
생각과는 다른 말이 불쑥 튀어 나왔다.
“지금부터요. 그냥 하던 일 하세요.”
‘말투는 마음에 안 드는데 행동력 하나는 마음에 드네. 거 참!’
잠시 연습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눈길로 기웃거리던 선수들도 곧 시선을 거두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는 법이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생각난다.
마이클이란 프로듀서는 우리 훈련 현장을 조금 둘러보다가 바로 떠났고 그렇게 우리 일행에 세 명이 더 스며들었다.
크게 달라진 것이라고는 인터벌 트레이닝 할 때 따라붙는 전동카트가 한 대 더 늘어난 것밖에 없었다. 핸드 카메라를 들고 주변에 얼쩡거리는 사람에게도 곧 익숙해졌다. 그들은 말을 걸지도 않았고 마치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식사 시간에도 촬영만 할 뿐 같이 밥도 안 먹는다. 밥을 참을 수 있다니 프로가 맞긴 한 것 같았다.
“감독님. 전 수정할 거 없어요? 요즘 계속 애들만 봐줬잖아요. 오늘 밤에는 저도 한번···”
“없어.”
오후에 매트를 깔고 필라테스를 하면서 슬쩍 말을 걸었는데 답이 너무 짧다. 마치 귀찮다는 듯이···
“음. 어제 셰도우 피칭을 하는데 느낌이 조금 이상하더라구요. 잠시만 봐주시면···”
“내가 눈으로 봐서 그걸 어떻게 바로잡겠니. 모션 캡쳐 장비도 없는데 봐도 몰라. 너도 잘 알면서··· 진짜 밸런스 틀어진 거 같으면 쓸데없는 데 헛심 쓰지 말고 셰도우 피칭 안 하면 되잖아. 체력 훈련이나 열심히 해.”
정말 간단명료한 해결책이다.
“어떻게 말씀을 그렇게 하실 수가···”
“음. 그래? 그럼 다시 똑똑히 말해줄게. 잘 들어.”
“살짝 틀어진 거면 넌 감각이 좋으니까 샌프란시스코 가서 장비로 측정해서 정확히 바로 잡으면 금방 수정이 되겠지. 하지만 괜히 잘못된 채로 자꾸 하다가 고정되면 나중에 바로잡기가 더 힘들어. 그런 걸 사서 일을 만든다고 하는 거다. 원래 겨울에는 체력 훈련만 하던 애가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니?”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란 걸 못 느끼지는 않을 텐데 섬세한 내 감성으로 이런 외면은 감당하기 어렵다.
‘진짜 관심 좀 가져 달라고···’
나에게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는 건 지금 나를 향해 있는 카메라 두 대밖에 없는 것 같다. 정확한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고 감독과 간단한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난 지금 상당히 여유가 있는 편이다. 하지만 내 뒤쪽은 아비규환이었다.
“자! 숨 내쉬고. 발끝을 뻗어. 영수는 집중하고.”
고 감독의 몸이 기묘하게 비틀어지며 호를 그린다. 오후의 필라테스는 34개로 구분된 동작을 매트 위에서 정해진 순서와 횟수로 고 감독의 시범 아래 똑같이 따라 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난 대학 시절부터 오랫동안 해왔던 가락이 있어서 곧잘 해냈지만 이번에 처음 합류한 우리 신참들은 아직까지도 상당한 애로 사항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으으윽.”
“아우아.”
요상한 비명 소리가 연신 터져 나오고 있었다.
작년에 좀 했었던 베그웰마저 온갖 인상을 다 쓰고 있지만, 동작의 완벽한 재현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걸 클래식 필라테스라고 하는데 초기에 뉴욕 무용계에 보급되어 무용수들의 코어 근육을 강화한다던가 스트레칭용으로 쓰였다고 한다.
‘유래가 그렇지. 무용수처럼 기본적인 근육의 힘과 유연성이 탁월한 인간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이거야. 당연히 걔네들이야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동작들이었겠지만···’
우리 같은 전문적인 운동선수들도 따라 하기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투수들은 유연성이 상당히 좋다. 하지만 무용수만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정식 동작을 하다간 초보자들 관절을 아작 낼 위험이 있기 때문에 난이도를 조절해 약식으로 여러 동작들을 변형시키고 횟수를 줄여서 하고는 있지만, 기본적인 운동 순서는 지켜야 한다. 그건 수행자 수준에 맞춰 변경이 불가능하다. 문제는 기본조차 그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
초보자는 때는 코어에 가까운 쪽을 컨트롤하면서 동작을 익히는 데 주력해야 하고, 동작들이 익숙해지면 질수록 코어를 중심으로 팔과 다리 등 멀리 떨어진 신체 부위를 조절해 전체적으로 신체를 통제할 수 있게 된다.
“휴식. 10분 쉰다.”
“아아악.”
“히히힛. 체이스. 지금 내 다리 제대로 붙어있는지 좀 봐줘. 힘이 안 들어가.”
“로저스 네 다리는 아주 멀쩡해. 그런데 발끝은 왜 그렇게 떠냐? 수전증은 들어봤는데 발끝이 그렇게 흔들리는 건 뭐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모두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혀있었다. 로저스는 반실성상태다.
“그런데 코치. 이런 필라테스가 밸런스 유지에 도움이 많이 되나요? 유연성이 좋으면 투구에 나쁘지는 않겠지만···”
대하면 대할수록 느끼게 되는데 저들 중에서 존슨이 가장 학구열이 높은 것 같았다.
“소영수. 넌 어떻게 생각하냐?”
고 감독이 답을 내게 미룬다.
간단한 이야기다. 공을 빠르게 던지기 위해서는 팔을 뻗는 동작이 최대한 크고 빠를수록 좋다. 그러려면 당연히 유연한 게 득이다.
“너무 간단하게 말했잖아. 좀 길게 말해 봐.”
‘그냥 본인이 하면 될 걸 왜 사람 귀찮게··· 나도 힘들다구요.’
본인이 하기 귀찮은 건 꼭 날 시킨다.
“팔만 휘두른다고 다 끝나는 건 아니야. 팔 힘에 덧붙여 몸통의 회전이 더해지면 팔의 회전속도가 배가 되겠지. 그런데 사람 몸의 구조상 몸통을 크게 돌리기는 힘들어. 허리가 좌우로 돌아가는 각도에 한계가 있으니까. 그래서 회전은 골반에서 시작하는 게 좋아.”
기본적인 투구 메커니즘이다. 프로 선수쯤 되면 다 아는 내용이다. 골반은 척추와 직접 연결되어 있다. 신체 구조상 골반을 돌리면 척추는 골반을 따라 자연스럽게 회전하게 된다. 이것이 몸통 즉 상체를 가장 빠르게 회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영수가 잘 말해줬어. 그렇게 하면 상체에 전해지는 힘이 배가 되지. 왜 그런지 누구 아는 사람 있어?”
또 물어볼까 봐 다음 할 말을 미리 생각하고 있었는데 고 감독은 한 번을 맞춰주지 않는다.
“골반보다 상체의 회전 반경이 크니까요. 그래서 골반의 작은 회전이 위로 갈수록 커지게 되는 거죠.”
다시 존슨이 대답했다. 학구파가 맞는 것 같다. 로저스와 체이스는 멍한 표정이다.
“자! 이제 정리해 볼게. 같은 힘으로 더 빠른 공을 던지기 위해서는 골반을 빠르게 회전시키면 된다. 이게 답이지. 그런데 골반은 어떻게 해야 회전이 빨라질까? 존슨 넌 어떻게 하지?”
“투구 시에 앞다리가 땅을 밟는 동작을 최대한 빠르게 하려고 하죠. 그렇게 해서 몸 앞으로 쏠린 힘을 이용해서 마지막 순간 골반을 비틀죠.”
“지금 존슨이 말하는 방법대로 하면 자연스럽게 투구 마지막에 뒷발의 안쪽이 지면에 닿게 되면서 균형을 유지하게 되지. 로저스 넌 어떻게 하지?”
“뒷다리를 차주죠. 그러니까 발을 앞으로 뻗으면서 그 힘을 모아서 골반 허리 어깨 순서로 그 힘을 전달합니다. 알고는 있는데 말로 하려니까 설명을 잘 못하겠네요.”
투수마다 접근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이다. 신체적 차이가 있기 때문에 외견상으로는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동일하다.
“어떤 식으로 회전력을 가속해 공에 힘을 전달시키든 너희들은 기술적으로 거의 손댈 게 없어. 이론을 공부해서 알았든지 경험적으로 몸에 새겼든지 간에 너희는 이미 최상급의 선수들이야.”
고 감독이 간만에 공감 가는 이야기를 한다. 이들은 최고 리그의 주전이나 그에 버금가는 수준의 야구 선수들이다.
“내가 그 메커니즘을 건드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돼. 완성품에 그런 짓을 했다간 그건 개선 보다는 개악이 될 가능성이 높아. 이런 필라테스에 힘을 쏟는 이유는 너희가 더 유연해져서 꼬임각을 더 크게 하라는 건 아니야. 구속이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그때부터는 빠르기보다 제어가 문제지.”
“그건 그렇죠. 그래서 투구 밸런스를 개선하고 싶은 건데···”
“회전 반경에 여유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그게 될 거야. 어느 순간 본인이 느끼게 돼. 그 부분은 누가 가르쳐줄 수가 없어. 본인이 스스로 찾아가야 해. 다만 이 훈련은 몸에 그 여유를 줄 수 있을 뿐이야. 주의해야 할 건 여유가 생겼다고 해서 꼬임각을 더 크게 해 구속을 더 올리는 데 쓰지만 않으면 돼.
“타자도 비슷할까요?”
알버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음을 던졌다.
“어차피 투구나 타격이나 회전 운동이 그 바탕에 있는 거잖아. 타격에서도 힙턴이니 이런 표현을 쓰잖아. 타격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유연성이라는 것이 제어라는 측면에서 유용한 것은 마찬가지 아닐까?”
잠시 토론의 시간이 지난 뒤 재개된 필라테스에서 선수들의 신음 소리가 악에 바친 기합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역시 독한 놈들이 야구를 잘한다.
여전히 카메라는 우리를 훑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