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긴장하고 살자
“어서들 오너라.”
이 시간이 너무 좋다. 요즘 매일 이 시간만 기다린다. 하루 종일 고 감독에게 시달리다가도 이 시간만 되면 힘이 난다.
‘간이 좀 되었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그래도 가릴 건 가려야지.’
동계훈련 때마다 저염 고단백의 식사를 매일 해야 한다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소스 없는 스테이크는 쳐다만 봐도 신물이 올라올 지경이다.
이번에 아버지와 같이 왔다. 샌프란시스코에 혼자 계시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뜻밖에 같이 가면 안 되냐고 먼저 말씀을 주셨다.
“고 감독에게 들었는데 훈련 장소가 골프장이라면서. 나도 갔으면 좋겠는데. 여기서 혼자 지내느니 거기 가서 라운딩도 하고 그럼 심심하지 않을 거 같아. 저녁에 니들 밥도 해주고···”
그렇게 해서 이 자리가 만들어졌다. 아주 만족스럽다.
낮 시간에 스테이크를 먹을 때와는 또 다른 풍미가 있다. 은은한 숯 향이 매 끼니 먹어야 하는 단백질 섭취의 거북함을 희석시킨다. 야채를 듬뿍 곁들여 먹는 석쇠구이의 맛에 모두 만족하고 있다.
“오늘은 안심이야. 생갈비가 맛은 있는데 지방이 좀 많은 부위라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먹자고··· 내가 좀 찾아봤는데 소고기에서 지방 함량이 낮은 부위는 사태, 우둔, 설도, 안심, 목심 등이라고 하더구나. 그래서···”
“매일 이렇게 차리려면 힘들지 않으세요? 가끔만 해주셔도 돼요. 그냥 편하게 지내세요.”
“아냐. 매일 편해. 오전에 공 치면서 운동하지, 드라이브 삼아 시내까지 쉬엄쉬엄 다니는 거야 일도 아니고, 사람 구경도 하고 재미있어. 하루 한 끼 식사 준비야 밑반찬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한두 시간만 하면 되는 건데. 이 정도도 안 하면 오히려 너무 심심할 것 같아.”
정말이지 우리 아버지가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다. 이곳에 온다고 하셨을 때도 원래 골프에 취미가 있던 분이니 좋아하는 것 하면서 잘 지내만 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짜 이렇게 매일 저녁 식사를 챙겨줄 줄이야.
여기서 대형 마트가 있는 시내까지는 차로 1시간쯤 걸리는 상당히 먼 거리다. 말은 저렇게 해도 매일 장 보러 다니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거기다 운동선수 여러 명의 식사 준비까지 하다니 정말 내가 알던 아버지가 맞나 싶다.
작년에 덩그러니 작은 건물 한 채만 있던 숙소 주변으로 컨테이너를 이용한 조립식 주택 몇 개를 가져다 놓았더니 그럴듯해 졌다. 그곳 앞마당에서 밤마다 바비큐 파티가 벌어졌다.
재작년에는 나 혼자. 작년에는 고 감독과 베그웰. 올해는 사람이 그득하다.
“정말 이런 식으로 하는 훈련이라면 일 년 내내 해도 괜찮을 것 같네. 작년처럼 또 하라면 이제 못할 것 같아.”
베그웰이 커다란 고깃덩어리 하나를 깻잎에 싸서 씹으며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응? 깻잎이 있었어? 아버지는 어디서 이런 걸 구하셨지?’
미국에서 구경하기도 어려운 것을 척척 구해 저녁 식사를 하고 느긋해진 마음으로 대화를 즐긴다. 정말 평화로운 세상이다.
급할 것도 없고 아주 평온해야 할 순간인데 웬일인지 등골이 오싹하다. 무엇인가 빠졌다. 아주 중요한 것이.
‘그렇군. 긴장감이 없어졌어.’
속된 말로 배에 기름기가 끼었다. 훈련할 때 독기가 사라져 버렸다. 너무 여유가 넘친다. 단시간에 너무 많이 얻은 것 같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고 다 좋은 건 아닌가 보네. 이래 가지고는··· 헝그리 정신을 되살려야 해.’
크어엉억- 억-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지뢰는 예고 없이 나타난다. 좀 진지하게 생각 좀 해보려고 하니까 꼭 분위기 깨는 놈이 있다.
“저놈은 잠도 없나? 원래 악어가 야행성인가?”
“몰라. 밤마다 이러는 것 보니까 그런가 보지.”
베그웰은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다시 젓가락을 고쳐 쥐었다. 정말 더럽게 많이 먹는다.
“난 악어가 운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그런 걸 실제로 겪게 될 줄은 몰랐지.”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자주 들어서 그렇거니 하는데 첫날 밤에는 혼비백산했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티라노사우루스가 영화에서 내는 울음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골프장 직원들이 악어 소리라고 하길래 처음엔 농담하는 줄 알았었다.
“작년엔 조용하더니 올해는 왜 밤마다 저 난리라니?”
“그걸 나한테 물어보면 내가 알겠어? 마저 좀만 더 먹고 내가 가서 대신 물어봐 줄게. 좀 기다려 봐.”
그건 참아줬으면 한다. 베그웰과 1대1로 싸우면 악어가 도리어 잡아먹힐 것 같다. 악어가 너무 불쌍하다.
“어디 있는지는 알아?”
“찾아보면 물가 어딘가는 있겠지.”
정말 농담도 자연친화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별은 빛나고 공기는 상쾌하고 선선하다.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려오고···
“우리 동네는 요즘도 뒷마당에서 가끔 곰과 마주치지.”
“코요테가 옆집 개를 물어 죽이고···”
“어렸을 때 퓨마랑 마주쳤는데···”
악어가 선수들에게 추억을 떠올리게 했나 보다. 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이놈들 말을 반만 믿어도 얘네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용하다 싶다.
크어엉억- 억-
“이거 구애의 울부짖음 같지 않아? 뭔가 애절하잖아.”
“그럼 요즘이 번식기인가? 발정 나서 그런 거라고?”
“존슨. 넌 일 년 내내 그렇잖아. 새삼스럽게 놀라긴. 악어도 할 건 하고 살아야지.”
역시 어린 애들이다. 대화의 끝이 허리하학적인 내용으로 종결되려고 한다.
“발정기가 없는 건 인간종 고유의 특성이야. 즉, 난 아주 정상적이지.”
진지함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분위기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요즘은 어떻게 참냐?”
애들에게는 빈틈을 보이면 안 된다. 악의는 없지만 서로 마구 물어뜯으려 한다.
“일부 유인원 중에 발정기가 없는 인간과 비슷한 종이 있다고 들었는데 넌 그쪽에 가까운가 보지? 난 사람이라서 일 년 내내 하기도 하지만 참을 수도 있다네. 당신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고릴라 씨.”
“크크큭. 그러고 보니 로저스 넌 좀 닮은 데가 있는 거 같아.”
‘오호! 나이스 플레이. 존슨 너도 좀 치는구나.’
헝그리 정신이 없어졌든 어쨌든 작년의 그 삭막하던 분위기보다는 지금이 너무 좋다.
“아! 잊고 있었네. 다음 주에 촬영팀이 온다고 오늘 낮에 연락을 받았는데···”
고 감독이 맥락 없는 말을 갑자기 꺼내 들었다.
“예? 무슨 촬영이요?”
“그거 다큐멘터리.”
“그거 확정 났어요?”
“그렇다네, 올 한 시즌을 전부 다 찍어야 한대. 그래서 바로 동계 훈련부터 시작해야 한다더라고. 프로듀서가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걸로 아주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확정된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일의 진척이 빠르다.
“코치, 그게 무슨 말이에요?”
“퍼펙트 뒷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계획이 있었는데···”
젊은 친구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우리 훈련 장면을 찍는데 그게 나중에 개봉된다는 거잖아요.”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배우는 누가 나온대요?”
“바보야. 다큐라잖아. 배우가 있겠냐? So하고 우리만 나오면 되지 누가 나오겠냐?”
“나도 어떻게 되어 가는지 내용은 잘 몰라. 그거 담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아무튼 다음 주에 촬영팀이 온다니까 보면 알겠지. 니들은 신경 끄고 훈련이나 열심히 해. 그리고 존슨 너 투구 밸런스가 맘에 안 든다고?”
존슨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실외라 그렇게 밝지 않은데도 뚜렷하게 느껴질 만큼 붉어졌다.
“예. 그렇긴 한데 여기서는 체력 훈련만 한다고···”
“그거야 작년에는 So하고 베그웰밖에 없었으니까. 영수 쟤는 밸런스 조정 같은 건 아주 단시간에 되거든. 그리고 작년에는 전 감각을 리셋할 필요도 있었고 그래서 체력 훈련만 하고 스프링 캠프 직전에 잠깐 다듬었던 거지.”
고 감독이 내가 알고 있었던 내용과는 미묘하게 다른 말을 풀어내고 있었다.
“투수마다 특성이 다른 거야. 영수 하는 식으로 굳이 따라 할 필요 없어. 공 던지는 건 좀 천천히 하더라도 원래 감각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고 감독은 완전히 달라졌다. 원래 저렇게 자상하게 말을 해주던 양반이 아니었다. 지금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손자들을 돌봐주는 자상한 할아버지 같다.
‘동계훈련에 사람 많은 것 싫다고 하지 않았었나? 누구냐! 넌.’
“이렇게 하자꾸나. 낮엔 체력 훈련과 유연성 훈련을 하고 밤에는 셰도우 피칭을 좀 봐줄 테니까 불편한 부분이나 어색한 곳을···”
애들 눈에 힘이 풀리고 있다. 사람 잘 홀리는 건 여전하다. 작년 베그웰과는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올해가 확실히 난이도는 낮은 것 같다.
‘난 안 봐주고 애들만··· 할 수 없지. 난 베그웰이랑 알버트가 있으니까.’
“베그웰. 우리도 이제 문화생활을 좀 즐기자고 낮에 열심히 훈련을 하니까 저녁엔 영화라도 같이 보면서···”
“글쎄 그럴 시간이 되려는지 모르겠네. 알버트와 밤에 티배팅 200개씩 치기로 했거든.”
‘헉! 이럴 수가 베그웰이 날 외면하다니··· 야! 배터리는 이러면 안 되는 거라구. 영혼의 단짝 이런 말도 못 들어 봤어?’
이러면 아버지밖에 안 남는데 아버지는 8시가 좀 넘으면 주무신다.
‘이것 참! 이러면 사람 많은 게 무슨 소용이야? 작년엔 뭐 하고 시간을 보냈지?’
생각해 보니까 작년엔 아무것도 안 했다. 훈련에 지쳐 해 떨어지면 자기 바빴었다. 여가 시간 그런 건 사치였었다.
“영수야!”
“예.”
“사람은 하던 대로 하고 살아야 하는 거더라. 각자 태어날 때 주어진 몫이 다른 거더라구. 니 엄마 죽고 나서 붕 떠 있었지. 함께하던 사람이 먼저 가버려 슬프다는 감정도 있었지만 무언가 족쇄가 풀린 것 같은 기분도 들더라구. 물론 그때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지는 않았고 그냥 막연한 희망적인 생각 그런 거였어. 한참 시간이 지나고 인생의 바닥이라고 싶은 곳에 이르고 나서야 좀 알 것 같더라.”
돌려서 무엇인가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 같은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비가 되어서 너에게 별로 바람직한 모습을 보인 적도 없고 스스로 생각해봐도 많이 부족한 사람이다만, 그냥 날 보면서 저러면 뒤가 좋지 못하구나 정도만 생각해 줬으면 좋겠구나.”
‘그 정도였었나?’
좀 많이 달라지긴 한 모양이다. 아버지까지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내가 그렇게 현명한 사람은 못 되지만, 이 정도 말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기름이 배에만 낀 게 아니었나 봐. 정신 차려야지. 밤에 정 심심하면 러닝이라도 하면 되지. 너무 걱정 마세요. 아버지.’
크어엉억- 억-
‘음. 밤에 뛰는 건 무리겠네. 그럼 뭘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