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다시 플로리다
“헥헥. 에고, 며칠만 더 쉴걸. 안 하다가 하려니까 겁나게 힘드네.”
섭씨 20도 내외의 쾌적했던 날씨가 불지옥으로 변해간다.
“영수. 입 다물어. 말하는 걸 보니 다들 아직 힘이 남았나 보군. 그럼 한 번 더 가자. 속도 올려.”
‘악!’
잠깐 긴장이 너무 풀어졌던 것 같다. 독사 같은 고 감독이 지켜보고 있는데 딴생각을 하다니···
선두에서 달리던 전동카트의 속도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 속도에 맞춰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지랄 같은 인터벌 트레이닝이다. 속도의 오르내림에 전혀 규칙성이 없다.
‘아마 고 감독 기분대로 하는 걸 테지.’
“So. 정신 좀 차리자.”
“뭐 하는 거야.”
같이 달리던 늘어진 대열에서 일제히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것들이··· 니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안 드니?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게 아니에요. 그냥 날 핑곗거리로 삼은 거야. 어휴! 군대를 가봤어야 알지. 우리가 분열하면 점점 더 힘들어진다고.’
선착순, 열외 이런 건 기본 스킬이다. 고 감독은 우리를 분열시켜 훈련 성과의 극대화를 노리고 있다. 고 감독은 군 면제자이면서 어떻게 이런 걸 아는지 모르겠다.
“출발 지점 도착 시 선두 일 명 1바퀴 열외.”
갑자기 우수수 내 앞으로 튀어나오는 뒤통수들이 보인다. 뒤늦게 따라잡으려고 했지만,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다.
골프장 외곽에 저수지인지 연못인지 아무튼 여기서 워터해저드라 부르는 호수 비슷한 게 하나 있었다. 한 바퀴 돌면 대략 2킬로가 좀 넘는다. 우리 훈련 장소다. 별로 긴 거리는 아니지만, 속도에 가감을 줘가면서 그곳을 뛰어야 한다면 문제가 다르다.
‘야! 그렇게 뛰면 안 돼. 다음번 러닝에서는 그 속도가 빨리 달리기 기준이 된다고. 정말 얘들이 사람 미치게 만드네.’
인터벌 트레이닝에서 지옥의 끝을 보고 싶지 않다면 이러면 안 된다. 운동생리학적으로 보면 1킬로를 뛰나 걸으나 운동 효과는 같다. 그렇다면 좀 덜 힘들게 하는 것이 좋은 일이다.
‘몸에 무리도 덜 가고 뭐 그런 거 있잖아.’
그런데 어린 것들이라서 그런지 힘이 너무 좋다. 겁나게 잘 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뛰어봤자 1등은 어려울 것 같다.
‘그냥 중간만 하면···’
“2등도 같이 열외.”
정말 악마 같은 고 감독이다. 전체적인 속도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으니까 당근을 하나 더 던진다. 하지만 난 안 속는다. 난 말도 아니고 당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왕년에 훈련소에서 이런 건···’
“좋아. 오늘 봐 주는 거야. 3등까지 열외.”
‘어? 3등? 6명에 3등? 베그웰, 체이스, 존슨은 제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의 속도보다 몸이 빨리 움직였다. 어느 사이 내 두 다리는 맹렬히 잔디를 긁으며 대지를 가르고 있었다.
‘흐흣. 3등은 가뿐··· 아악! 이놈이···’
데니스 존스 이놈이 뒤통수를 치려고 한다. 속도가 꽤 빠르다. 이놈은 나에게 이래서는 안 되는 녀석이다. 애들이 동계 훈련 출발 마지막 순간에 느닷없이 데려왔지만, 흔쾌히 우리 스케줄에 합류시켜줬는데 이런 순간 날 꼭 이겨 먹으려 하다니 이건 선을 넘었다.
‘안 돼. 난 좀 쉬어야 해. 너희들 연장자 우대 이런 것도 모르냐? 아아···’
어느새 나란히 달리던 존스의 등이 조금씩 보이고 있다. 도착 지점이 바로 앞인데 이럴 순 없다.
“아아악.”
“우왁.”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 순간 어깨를 밀어 넣었다.
‘이겼다. 우히힛. 3등이야.’
천국의 입성권을 손에 넣었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좀 뛴다.
“로저스, 알버트, 존슨 3인 열외.”
“헥헥. 뭐라고··· 내가 먼저···”
오심이다. 이건 말이 안 된다. 분명히 마지막 순간 내가 이겼다.
“존슨의 발끝이 먼저 들어왔어. 야! 왜 멈췄어. 아직 끝나지 않았어. 열외자. 이겨 놓고 같이 뛰고 싶은 거야? 모두 제자리 뛰기. 더 빨리. 천천히 숨 고르고 갑자기 멈추면 근육에 부하가 많이 간다고.”
고 감독의 호통에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들어 올리며 어필을 계속했다.
“허헉··· 내가 이겼다니까요.”
“여기는 비디오 판독 같은 건 없어. 내 말이 법이야. 넌 그렇게 동생들을 이겨 먹고 싶니? 연장자로서 모범을 보여야지. 맞건 틀리건 한 바퀴 더 뛰면 체력 증진에 도움이 되면 됐지 손해야 가겠어? 우린 훈련하러 온 거야. 니가 앞장서 게으름을 부리려 하면···”
여기서 이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나이는 나보다 베그웰이 더 많다.
‘그리고 주제가 뭔가 초점에서 빗나간···’
‘헉헉.’
호흡이 아직도 안 돌아온다. 마지막 순간 너무 무리를 한 것 같다. 머리에 피가 잘 돌지 않나 보다. 생각이 뒤죽박죽이다.
“자! 열외자. 제자리 뛰기 계속하고 패배자들은 한 바퀴 더 뛴다. 출발.”
정말 미치겠다. 멍한 상태에서 관성에 의해 몸이 자동으로 앞으로 움직인다. 이곳에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고 감독에게 길들여진 것 같다.
“So. 너 제정신이냐?”
뛰면서 베그웰이 소곤거렸다.
“힘들어 죽겠어. 말 시키지 마.”
“어린 애들하고 경쟁을 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훈련 초반부터 그렇게 피치를 올리면 앞으로 어떻게 견디려고. Go 코치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제일 잘 알면서···”
나도 슬슬 뛰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존슨 넘이 갑자기 무슨 필을 받았는지 너무 열심히 뛰는데 자극받아서 이렇게 되고 말았다.
“존슨은 못 이겨요. 걔가 마음만 먹었으면 1등 했을 거예요. 훈련이라고 생각하니까 다른 사람들 페이스에 맞춰···”
체이스까지 사람 부아를 채운다.
“하아! 내가 이긴 거였는데 고 코치가 억지를 부려 승패를 바꾼 거야. 니들도 다 봤잖아.”
“내가 보기에도 존슨이 빨리 들어간 것 같았어. 억지는 니가 부리고 있는 거야.”
투포수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인데 포수가 이렇게 나오면 많이 곤란하다.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베그웰은 당연히 내 편을 들어야 하고 그게 배터리다.
‘음극과 양극의 조화가··· 한 몸? 자웅동체?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몸이 힘드니까 생각이 자꾸 음습해지는 것 같다.
“존슨은 고등학교 때 육상을 야구와 같이 했었다구요. 중장거리 전미 고교 랭킹 20위 정도는 했었어요. 주 대회에서는 우승도 여러 번 하고···”
“그래? 그런 놈이 육상이나 하지 야구는 왜···”
보기보다 아주 음흉한 놈이었다. 일부러 우리에게 맞춰주다가 오늘 결정적 시점에 마각을 드러내다니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품성이다.
“전미에서 20등 해봐야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야구를 하는 게 낫죠. 걔가 지금은 좀 그렇지만 그때는 텍사스 고교 올스타에도 뽑히고 그랬었다구요. 드래프트 순위도 2라운더였어요.”
대화가 길어지는 것 같아 고 감독을 슬쩍 살폈더니 앞으로 완전히 돌아앉아 있었다. 속도 변화도 완만하다. 이번까지 심하게 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지금은 뛰는 것보다는 빠른 걸음에 가까운 속도다.
‘이게 맞지. 우리는 훈련을 하는 거지 고문을 받으려는 건 아니라구.’
데니스 존슨 그는 지난 시즌 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가장 강력한 5선발 후보였었다.
그랬던 그를 밀어내고 내가 5선발이 되었다. 그렇게 선발에서 멀어진 그였지만 케빈의 부상으로 곧 다시 선발진에 합류하긴 했었다. 하지만 원인 모를 부진으로 난타당하고 최고 반열의 유망주에서 지금은 AAAA급 선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존슨이 잘했으면 프런트에서 시즌 중간에 드로이넨을 영입할 생각은 안 했을 수도 있었겠지.’
우리 팀이 아직은 그를 주목하고 있긴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이 남지 않았다. 대체자는 이미 팀에 적응을 끝냈고 마이너에서 새로운 자원들이 계속 자라나고 있다.
‘무슨 경쟁이든 날 한 번 이겨 보고 싶었던 건가?’
그와는 별로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내가 팀원들과 어울리기 시작할 무렵 그는 샌드다운되어 마이너리그에 있었다. 얘네들이 그를 데려오기 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존재였었다.
“마이너에서는 괜찮게 하고 있었던 거야?”
“슬럼프가 와서 엉망이었죠. AAA에서도 박살 나고 AA까지 밀렸다가 시즌 후반쯤 겨우 다시 AAA로 올라왔어요. 하도 딱해서 좀 도와주고 싶어서 여기 데리고 온 거예요.”
“멘탈이 나가서 부진에 부진을 거듭하다가 겨우 정상적인 폼에 가까워진 상태다 이거네.”
“그렇죠.”
찔리는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다. 굴러온 돌이었던 내가 박히려고 하는 돌을 흔들어버리는데 한 손을 보탠 셈이 되어버렸으니. 그게 메이저리그라는 정글의 법칙이지만 마음 한구석엔 인간적으로 조금은 미안한 미묘한 감정이 있었다.
“존슨은 그럼 나 싫어하겠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싫어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걔한테는 So가 피칭의 롤모델이에요.”
이건 좀 예상 밖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그와 나 사이에 불편한 일이 없긴 하다. 정당한 경쟁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에게는 이성과 비이성이 공존한다. 괜히 미워지고 이유 없이 싫고 그건 게 다 비이성의 영역이다.
“내가 어떻게 그의 롤모델이 될 수 있어? 존슨과 나는 투수로서 스타일이 너무 다르잖아.”
이건 너무 모양새 좋게 포장된 이야기인 것 같다. 100마일을 던질 수 있는 정통파 파워 피처가 내 투구에서 도대체 뭘 참고할 수 있단 말인가?
“그에게 없는 섬세한 커맨드가 있잖아요. 투구 시의 밸런스도 굉장히 안정적이고. 그게 존슨이 제일 따라 하고 싶은 거죠.”
존슨의 투구 폼은 좋게 말하면 역동적이었지만 투구 마무리 시 한쪽으로 심하게 쏠렸다. 투구 후 수비 문제는 그의 약점이었다. 만약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가 컨트롤이 좋다면 그는 장래에 명예의 전당행이 확정이다. 즉 대부분의 파워피처는 컨트롤이 좋지 않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라는 것도 인간의 속성이지. 커맨드 그게 내 피칭의 장점이긴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하면···’
조금 아니, 많이 민망하다. 사실 내 컨트롤은 노력의 산물이 아니었다. 아무리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해봐도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되더라밖에는 할 말이 없다.
“존슨은 이번에 기대가 많아요. So의 그 밸런스를 만들어준 게 Go 코치라고 했더니 그의 조언을 꼭 받아야겠다고 얼마나 난리를 치던지···”
“글쎄··· 그건 좀···”
이것 역시 상당히 애매한 문제다. 현재 내 투구 폼을 만들고 기본적인 투구가 가능하도록 다듬어 준 게 고 감독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지금의 내가 된 것이라고 말하기는 많이 부족한 느낌이다.
“아! 그래? 그렇게 날 존경하는 선수가 있었다니 기분이 나쁘진 않네.”
갑자기 고 감독이 뒤를 돌아보며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그는 갈수록 음흉해지는 것 같다. 모르는 척하면서 우리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다.
“아니, 그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해석되는 거예요?”
“야! 조언이라고 했잖아. 넌 깔보는 놈에게 조언 들을 수 있어?”
“예? 그건···”
“조언이라는 말 속에 다 들어있는 거야. 리스펙(Respect)이라··· 보기 드물게 바람직한 사고방식을 가진 녀석이었네.”
고 감독이 제멋대로인 건 불치병 같다.
‘또 시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