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86화 (86/200)

86화. 이럴 때가 아니다

『So, 베그웰, 로저스. 체이스 과감한 연장 계약 자이언츠』

『모험인가! 안정인가! 자이언츠의 비전은···』

『30살 투수에게 7년 총액 1억 2천만 달러 계약은···』

월드시리즈가 끝난 다음 날 우리의 계약이 언론을 통해 공표되었다. 하지만 그 기사에는 별로 눈이 가지 않았다.

새로운 충전과 집중을 위해서는 때로는 리셋이 필요하다는 고 감독의 조언을 받아 한동안 야구를 끊었었다. 그래서 야구 소식에 어두웠는데 월드시리즈 기사가 눈에 밟힌다.

‘빌어먹을··· 메츠가 작년에 이어 또 우승해 버렸네. 월드시리즈 2연패라니··· 뭐? 왕조 건설의 시작이라고? 택도 없는 소리를···’

우리를 짓밟고 올라선 적의 성공은 찬탄보다 맹렬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한 번 던져보지도 못하고··· 나하고 소르카가 던졌으면 너희는 어림도 없었어.’

치지직-

육질과 불이 만나 환상적 화음을 만들어 냈다.

석쇠 위에서는 생갈비가 익어가고 아래로 낙하한 기름에 옮겨붙은 불길이 가끔씩 거세게 타올랐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따갑지 않은 햇살이 좋은 오후였다.

“영수야. 핸드폰 좀 그만 보고 고기나 좀 빨리 들어내. 그건 좀 덜 익어야 맛있어. 레어로 먹어야 해.”

여행은 못 갔다. 새로운 집에 입주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챙겨야 할 일이 많았고 다시 생각해보니까 남자 어른 둘이서 디즈니랜드는 좀···

아쉬운 김에 집들이 겸 해서 가든 파티를 계획했다. 말처럼 거창한 건 아니고 동료들과 밥 한 끼 같이 먹고 싶었다. 이제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보기를 원했다.

음식은 출장요리사를 부를 생각이었는데 뜻밖에 아버지가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이런 건 성의가 중요하다면서 직접 바비큐를 준비하겠다고 하셨다.

손님은 대부분 우리 팀 선수들이다. 시즌 끝나고 집으로 돌아간 선수들이 많아서 올 사람은 몇 명 안되겠지만 거구의 운동선수들이었다. 그들은 엄청나게 먹는다.

얼핏 떠오른 생각에도 일반적인 양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았는데 순수 아마추어인 아버지가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장면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본인이 기어이 하시겠다니 어쩌겠어.’

그냥 그동안 많이 지루하셨나 보다 정도의 생각만 했다. 뭐라도 하시겠다는데 안 된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나로서는 장 보는 것 정도밖에 도울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요리라니··· 크면서 직접 라면 하나 끊이는 걸 본 적도 없었는데···’

오늘 예상치 못한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 번째는 손님이 너무 많이 왔다. 몇 명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더니 샌프란시스코에 머물고 있는 선수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리고 대개 동행이 있었다. 가족, 여자 친구 등.

두 번째는 더 놀라웠다. 준비 과정부터 심상찮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버지의 요리 실력이 아주, 상당히, 몹시 수준급이었다. 그뿐 아니라 대응도 아주 빨랐다. 예상 인원을 초과한 손님들에게 큰 문제 없이 음식이 제공되었다.

‘진작 좀 해주지. 나 어렸을 때 이런 거 해줬으면 얼마나 좋아했겠어.’

나이 서른 되고서 아버지가 해주는 음식을 처음 먹어봤다. 이전에는 먹는 건 고사하고 구경도 못 해봤었다.

석쇠에서 옮겨진 고깃덩어리가 병아리 떼처럼 모여 있던 사람들에 의해서 순식간에 나눠져 그들의 접시로 옮겨졌다.

상추, 마늘. 쌈장에 밑반찬까지 준비된 완전히 한국 스타일의 고기 뷔페 같다.

생갈비가 동이 나자 등심이 자리를 채웠고 곧 양념 갈비로 바뀌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삼단 콤보에 사람들은 정신없이 먹어 대고··· 계속해서 고기를 구워냈지만, 사람들의 흡입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기다리기 답답한 몇몇은 직접 집게를 잡기까지···

“야! 체이스 넌 고기 굽지 마. 니가 구운 건 못 먹겠어. 다 탔잖아.”

“너 이거 안 먹을 거면 내가 먹는다. 난 좀 타도 괜찮아.”

“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음식을 괜히 시켰나?’

혹시 몰라서 서비스 업체를 통해 따로 주문을 좀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 같다. 내가 아버지를 너무 과소평가했었다.

드디어 고기가 떨어졌다. 장 볼 때 이걸 누가 다 먹나 싶은 정도로 양이 많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너무 적게 산 셈이 되었다. 아쉬움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디. 맛있었어요. 언제 또 해 줘요.”

“시내에 있는 한국식 바비큐 식당보다 훨씬 나았어요. 요리를 엄청 잘하시네요. So는 좋았겠어요. 이런 맛있는 걸 많이 먹고 커서···”

“허헛.”

아버지가 영어를 잘 알아들어야 좀 찔릴 텐데 아직 그 정도가 아니라···

“얘네들 다 맛있게 잘 먹었다고 인사하는 거예요.”

“어. 나도 그 정도는 알아들어. thank you. thank you.”

다 즐거워하니까 나도 좋긴 한데 좀 서운한 마음은 왜 드는지 모르겠다.

“어이구, 소 사장님. 애 많이 쓰셨네요.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기 구울 때는 보이지도 않던 고 감독이 소주 한 병을 들고 불쑥 나타나 우리가 있는 테이블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고라니요. 심심하던 참에 며칠 재미있었어요. 맛있게 드셨는지···”

“그럼요. 중간에 끊어져서 좀 아쉽기는 한데, 아주 맛있었어요. 소 사장님이 요리하신다는 말은 전혀 못 들어봤는데 어떻게 이런··· 적은 인원도 아니고···”

그건 나도 궁금했던 일이다.

‘혹시 사업 망하고 갈빗집에서 일이라도···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그거야 뭐···”

대답이 애매하다. 아버지는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한잔하셔야죠. 바비큐도 동나 버렸고 이제 별로 바쁘진 않으시죠? 소주 못 드신 지 좀 되시지 않으셨나요?”

“그렇긴 한데···”

“손님들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한잔하세요. 밥도 다 먹었고 좀 있으면 사람들도 가려고 할 거예요.”

말도 잘 안 통하는 애들 거둬 먹이느라 오늘 수고 많이 하셨다. 여기 말 통하는 사람이 고 감독밖에 없는데 마침 잘된 것 같다. 고 감독과 아버지는 예전에 한두 번 정도 술자리를 가졌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정말 이제부터라도 한국 사람들을 좀 만나야 하나?’

샌프란시스코에는 한국 사람이 많았다. 산호세 인근 서니베일에는 한인마켓들과 한인계열 사업체들이 모인 코리아타운이 있다, LA 정도는 아니지만, 대로 하나 정도는 차지하고 있는 규모이고 사우스베이 대부분의 지역에서 한인 마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말 많이 나올 것 같아서 굳이 그런 곳에 안 갔었는데 아버지 때문이라도 생각을 좀 다르게 해야··· 아! 소주··· 정말 맛있게 드시네.’

준다고 마시지도 않겠지만 한잔하겠느냐는 권유 한마디 없이 두 분이서 주거니 받거니 잘 드신다. 나도 소주 맛을 안다.

‘찬합에다 소주를 그냥 콸콸 부어서··· 참치 캔 하나 까고··· 그때는 새우깡만 있어도···’

군대에서 먹었던 소주가 제일 맛있었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좀 한 거죠. 군에서 취사병 할 때 대량으로 음식 준비하는 건 많이 해봤었죠.”

소주 몇 잔에 아버지 입이 좀 풀린 것 같았다. 군대? 하지만 너무 오래전이다. 그리고 군대에서 바비큐 해서 먹는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다. 그것도 삼십몇 년 전이라면···

“밑반찬들도 사 온 건 아닌 것 같던데 설마 직접 다 만드신 겁니까? 그런 걸 어떻게 다···”

“이야기가 좀 긴데··· 영수 엄마 있을 때 갈빗집을 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장사를 하려면 직접 다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이것저것 레시피도 사들이고 배우기도 하고 그랬었죠. 음 그것도 10년은 되었겠네요. 참 시간이 빨리 가요. 그때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렴풋이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상당한 기간 백수이던 아버지를 위해서 엄마가 뭐라도 좀 해보라고 권유했던 때가 있었다.

‘그 갈빗집 결국 못했었지. 엄마가 기존 가게 인수하라고 준 돈을 친구인가 누가 부도 직전이라고 빌려주었다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고향 친구 놈이 급하다고 3일만 쓰고 돌려준다는데 어떻게 안 줄 수가 있었겠어요. 결국 그 친구는 부도가 나서···”

엄마는 그 일 이후 아버지께 큰돈을 맡기지 않았다.

‘그 레시피가 돌고 돌아서 10년 뒤 샌프란시스코에서 쓰일 것이란 건 그때 누구도 짐작조차 못했겠지. 삶이란 게 그런 건가?’

그동안 너무 무심했었다. 모든 것을 내 위주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지도 않았었다.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그의 삶이 이해가 되겠어.’

즐거운 날에 주책없이 울적해지고 말았다.

‘흠. 난 에이징 커브도 빨리 오더니··· 갱년기도 빨리 오는 건가? 감정 조절이··· 으음.’

“So. 아쉽게 되었군.”

“예?”

지난 시즌 아쉬운 일이 전혀 없지는 않았었다. 그중 제일 아쉬웠던 건 포스트 시즌에 한 번 던져보지도 못하고 팀의 패배를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메츠 놈들을 그냥··· 정말 별것도 아닌 것들이···’

“모르고 있었던 건가? 좀 전에 사이영 상 발표가 났잖아.”

오늘이 11월 18일이다. 매년 이맘때쯤 사이영 상 투표 결과가 나오긴 했었던 것 같다.

“기대감이 있어야 그런 것도 챙기죠. 말씀하시는 게 결과가 생각했던 대로인 것 같네요. 괜찮아요.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받은 건데··· 아쉽지도 않아요.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잭 플라티니라면 인정한다. 내가 평균자책이 좀 낮고 퍼펙트 두 번 한 것을 제외하면 그보다 별로 나은 것이 없었다.

‘아무튼 기자넘들 하고는 안 맞아.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니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퍼펙트 기사로 뽕이란 뽕은 지들이 다 뽑아 놓고서 투표에선 다른 놈을 찍어··· ’

생각지도 않은 라드 감독의 전화였다.

“그래도 풀타임 첫해에 사이영 3위를 한 것은 대단한 성과야. 이건 자네 커리어에···”

“예? 3위요? 무슨 그런···”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어느 놈이 2위란 말인가? 플라티니까지는 참아 주려고 했다. 그런데 3위라니···

“음. 내 생각에도 좀 문제가 있긴 한 것 같지만, 사이영 상 수상도 아니고 2위와 3위인데 사람들은 별 관심 없을 거야. 2위는 메츠의 랜돌프 프리먼이네. 그도 20승을 했으니 다들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다고 생각할 걸세. 너무 티는 내지 말게나.”

“아! 예.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독님.”

정말 짜증 난다. 전화를 끊고 생각난 김에 프리먼의 최종 기록을 찾아봤다.

총 204이닝 20승 6패 ERA 2.02

“이거 뭐야? 이런 불합리한 일이··· 이런 놈이 어떻게 나보다 순위가 위야?”

마음을 좀 가라앉혀 보려고 했지만 어떻게 해도 진정이 안 된다. 전화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베그웰. 동계 훈련 빨리 시작해야 할 것 같아. 뭐? 이 주일 후? 야! 집어치워. 내일이라도 당장 훈련하러 가자고.”

다음 시즌에는 누구도 두말할 수 없는 성적을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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