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이런 날이 오다니
“안녕하세요. 제니스 씨.”
“아주 일찍 연락을 주셨군요.”
그녀는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되었다. 연장 계약 협의는 급진전이 이루어졌다. 아직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아니지만 원론적 부분에서는 서로 이견이 없었다. 팀은 나를 길게 묶으려는 결심이 있고 나도 안정적으로 자이언츠에서 선수 생활을 끝내고 싶었다.
마음 편한 팀에서 37세까지 선수 생활이 보장된다는 건 너무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돈 얼마 더 받으려고 안간힘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집에 있는 파랑새에 만족하는 소소한 사람이다. 물론 1억 달러가 절대 소소한 금액은 아니지만.
주택중개인을 시내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대부분의 절차는 에이전트가 처리해 주겠지만 계약서에 사인은 직접하고 싶었다. 특별한 소유물에 의미 부여를 하고 싶었다.
“마음 내킨 김에 사려고요. 얼마 전에 봤던 집들 중에···”
“이걸 보시면서 말씀 주세요.”
제니스 아줌마가 태블릿으로 사진을 보여준다. 봤던 집들이 죽 정리되어 있었다. 이제 나에게도 마이 홈이 생긴다.
“아··· 예. 이 집이요. 그사이에 팔렸다든가 그런 건 아니죠?”
“그럼요. 언제든 계약이 가능합니다. 개인적으로 많이 기쁘네요. So 선수가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실 결심을 하신 것 같아서··· 들리던 이야기가 결론이 났나 보군요.”
이 여사님은 자신의 수입으로 돌아올 집 계약보다는 내 연장 계약이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이제 연장 계약 이야기는 알음알음으로 많이 퍼져 있다. 애초에 알려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숨기기엔 관련 선수가 너무 많았다.
“뭐··· 대충은··· 구단에서 발표하기 전까지 비밀은 지켜주세요.”
굳이 부인해 제니스 아줌마의 기쁜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물론이죠.”
계약서에 멋있게 사인을 하고 미국에 온 지 3년 만에 내 집 마련을 했다.
‘아! 가슴이··· 이거 아직 갱년기는 아니겠지?’
서른이 되면서 별것 아닌 일에도 감정 변화가 다채로워진 것 같다. 역시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걸로 하죠.”
“아니, So. 취향이 왜 그래?”
오전에 상쾌한 마음으로 집 계약을 마치고 오후에는 팀 동료들을 만났다. 계약에 관한 이런저런 의논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대개의 운동선수들은 이야기 같은 걸 하면서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를 못한다.
그래서 지금 여기 왔다.
대화 중 어쩌다 오전에 집 계약을 했다는 이야기가 잠시 나왔었는데 대뜸 그러면 차는 안 사냐고 물어와 곧 살 생각이라고 했더니 모두 차 보러 가자면서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나버렸다.
“이거 어때. 마세라티 MC20 V6 3.0L 최대출력 630마력, 최대토크 74.4kg·m 제로백이 2.9초야. 새 차 가격이 21만 정도 하니까 이건 더 쌀 거야.”
가격은 별로 걱정하지 않는데 매끈한 차체에 정신 못 차리는 로저스가 더 걱정된다.
“웹. 넌 취향이 어떻게 여자애 같냐. 그런 예쁘기만 한 차는 질색이야. So라면 이 정도는 타 줘야지. 저런 거 볼 거 없어. 여기 한번 앉아 봐. 벤틀리 컨티넨탈 GT Speed야. W12 6.0L 트윈터보 엔진이라서 안정감이 다르다고···”
체이스도 꼭 자기 같은 차를 골랐다.
‘하아! 역시 애들은··· 하긴 나도 20살 때 포르셰를··· 으음. 형이 왕년에 다 해봐서 니들 마음은 이해하는데··· 스포츠카는 자리도 좁아터져 가지고···’
“So. 꼬맹이들이 뭘 알겠어. 우리 같은 운동선수는 일단 튼튼한 차를 타야 해. 혹시 모를 사고의 위험에서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안전함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지. 거기다 친환경적 차량이라면 이미지 관리에도 좋고.”
차 한 대 사면서 이미지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나마 들어줄 만한 말이다.
‘허! 베그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GMC 허머 EV이다. 그나마 SUV 모델이라서 다행스럽다. 난 스포츠카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상생활에서 탱크를 몰고 다니고 싶지는 않다. 넓고 크다고 좋기만 한 건 아니다.
바로 사지 않더라도 여러 가지 차종을 한자리에서 보고 비교하기 좋다고 중고차매매 단지로 사람을 끌고 와서는 도리어 자기들이 신났다. 나를 핑계 삼아 모두 자기 취향대로 차를 고르고 있었다.
‘애들 데리고 디즈니랜드에 온 거 같네. 음? 시간 있을 때 아버지 모시고 거기나 한번 갔다 올까? 차를 사면 동계 훈련 가기 전에 요세미티를 들러 LA 가서 디즈니랜드를··· 너무 머나?’
샌프란시스코에서 LA까지는 383마일이다. 600킬로미터가 넘는다. 아무튼 미국 땅은 겁나 넓다.
별로 안 좋아하실 거 같기는 한데 어디든 가서 같이 시간을 좀 보내고 싶었다. 난 사실 아버지를 잘 모른다. 같이 오래 살았다고 모든 것을 잘 아는 건 아니다.
‘호텔 생활에 많이 답답하실 텐데··· 한번 물어는 봐야겠네.’
“So. 이건 어때?”
알버트다. 그런데 물음이 나에게 사라고 권하는 게 아닌 것 같다.
‘포드 익스페디션? 자기가 타려고 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하는 건가? 가족?’
이 차종은 미국에서 패밀리카로 유명하다.
“갑자기 엄마가 생각났어. 올 시즌 연봉 정도면 이거 한 대 정도는 살 수 있었는데 그동안 왜 아무 생각 없었는지 모르겠어.”
그러고 보니 알버트에 대해선 팀 동료이고 이번 시즌 40인 로스터로 합류했다는 것밖에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었다. 알버트는 연장 계약 제안을 받은 선수들 중 유일하게 계약을 거절했다. 즉, 앞으로 최소 3년은 최저 연봉이라는 뜻이다. 이 친구는 아직 많이 어리다. 21살.
이대로만 잘 성장하면 27세에 FA가 된다. 성적에 따라 진짜 초장기 계약도 가능하고 누구처럼 FA를 한 번 더 할 수도 있다. 연장 계약 거절이 에이전트의 생각인지 본인에게 깊은 뜻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무조건 응원한다.
‘큰 뜻을 품었다는데 이 정도야 형이 도와줄 수 있어. 엄마에게 잘해라.’
“야! 그런 거라면 형이 한 대 사주고 싶네. 형이 조만간에 부자가 될 예정이거든 한국에서는 좋은 일 있으면 주변 동생들에게 선물도 돌리고 하는 건데 나도 잊고 있었어. 이 차 필요하면 너한테는 이거로 하면 되겠네.”
“아니, So. 그럴 필요는···”
알버트가 좀 당황한 것 같다. 몸은 크지만 역시 아직 애는 애다.
“So. 나도 한 대 사줘. 좀 전에 보던 MC20이면 돼. 별로 비싸지도 않고···”
웹 로저스 이 녀석은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은 갈 텐데 사서 매를 버는 스타일이다.
“넌 뭐 해줄 건데··· 알버트하고 넌 경우가 다르잖아. 내가 알기론 너도 좋은 일 있고 곧 부자가 될 거잖아. 그럼 너도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 돌려야지.”
“So랑 난 총액 규모가 많이 다르지. 당신은 빌리언이지만 나야··· 뭐!”
“하핫! 말 참 예쁘게 하네. 7년 후에 계약 끝나면 난 아마 은퇴하겠지. 37살이니까. 넌 30살에 FA 선언을 다시 할 거고. 뭐? 총액 규모가 뭐 어떻다구?”
아무튼 나이가 깡패다. 나도 20살에 메이저리그로 올 수만 있었다면···
‘마이너에서 7~8년 굴렀겠네. 사람은 다 각자 가지고 태어나는 복이 다른 거라고···’
각자 자신의 사정에 맞춰 현명한 선택을 했을 것이라 믿는다. 내게 남의 떡이 커 보인다. 이건 말은 설득력이 없다. 내 떡은 내 떡이고 남은 떡은 남의 것이다.
‘내가 살아보니까 그렇더라구.’
“알버트 미안해할 필요 없어. 이제 So에게 이 정도는 별 부담이 안 돼. 정 부담스러우면 나중에 니가 FA 할 때 So에게 선물 하나 해주면 되지. 그리고 우리가 여기 너무 헤집고 다녀서 나갈 때 한 대 팔아주기는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베그웰이 교통정리를 끝냈다.
“So. 고마워 잘 받을게. 나중에···”
활짝 웃는 알버트에게 손 한 번 들어줬다. 왠지 가슴이 뿌듯하다. 모두 웃고 즐거운 이런 분위기. 이런 삶을 꿈꾸어 왔었다.
“So 작년에 베그웰이랑 동계 훈련을 같이 했다며. 올해도 같이 갈 거야?”
웃음기를 거둔 로저스가 웬일로 상당히 진지하게 묻는다.
“난 그럴 생각인데 아직 베그웰하고는 말을 안 해봤어.”
시즌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동계 훈련 스케줄을 묻는단 말인가! 이놈들도 제정신이 아니다.
“말을 하나 안 하나 똑같지. 왜? 관심 있어?”
기다렸다는 듯이 베그웰이 말을 받았다.
“체이스하고 의논을 했는데 거기 우리도 끼면 안 될까?”
“어··· 나도···”
알버트까지 나섰다. 나와 눈이 마주친 베그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애들까지 다 데리고 가서 괜찮으려나?’
좋으면서도 솔직히 걱정스럽다. 나와 베그웰에게 잘 맞았다고 이들에게도 괜찮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같이 하면 난 좋은데 혹시 우리에게 인스트럭터가 있다는 이야기 들었어? 그의 훈련 방침에 따라야 하는데 주로 체력 훈련 위주고 그 인스트럭터는 동계 훈련 동안 거의 공을 못 던지게 하거든. 너희들 해오던 방식과 좀 다를 것 같은데 괜찮겠어?”
조심스럽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일 년 농사를 망칠 수도 있는 일이다.
“그건 상관없어. 고라는 코치 이야기도 알고 있고 상당히 유능하다는 말도 들었어. 새로운 방식을 한번 시도해볼 적당한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해.”
다행히 즉흥적인 부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른 문제는 훈련 장소가 야구장이 아니라서 타격 훈련하기가 어려워. 투수는 몰라도 타자는 많이 불편할 것 같은데··· 인스트럭터도 투수 전문이지 타자 쪽은 좀 아니라서···”
“그건 올해 조금 다를 거야.”
베그웰에게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다.
“작년에 그런 문제가 조금 있었는데 내가 타격 연습을 위해서 피칭 머신과 간단한 설비를 할 생각이야. 공간은 충분하고 이미 골프장과 통화 해서 허락을 받았어. 나도 이제 그 정도 여유는 생겼다고.”
돈이 좋긴 하다. 너무 쉽게 일이 처리된다.
‘아!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러려고 조기에 연장 계약을 한 것이기도 하고···’
“그럼 11월에 말쯤에 다 같이 가자고. 한번 해보지.”
결심했다. 플로리다의 따스한 햇살이 그립다.
어느 순간부터 일이 술술 풀려가고 있다. 앞으로도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라 믿는다. 중고차매매 단지를 나오는 길에 일반 매장에 들러서 차 3대를 계약했다. 유럽 브랜드를 선택했다. 나에게 너무 큰 것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버지, 나 그리고 픽업 한 대는 있어야 한다고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