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아직은 부족하다
며칠 쉬다가 아버지와 집을 보러 나섰다.
“미국에서 주택 가격이 가장 비싼 동네가 혹시 어디인지 아세요?”
“예?”
마일리에게 예전 에이전트 사무실을 구할 때 도움받은 주택중개인이라며 제니스라는 이 중년 여성의 전화번호를 받았는데 첫 만남부터 이상한 걸 묻는다.
“글쎄요. 뉴욕 맨해튼이나 LA의 비버리힐스 같은 곳이 아닐까요?”
‘비버리힐스의 아이들이란 유명한 TV 드라마에서 보면···’
제니스 아줌마가 내게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웃는다.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지 않겠나. 생각나는 대로 말했더니 답이 아닌가 보다.
“미국 부동산 정보회사의 통계에 따르면 중간 규모 주택의 평균 가격이 가장 높은 지역은 샌프란시스코의 애서튼 지역이고 평균 가격은 1,020만 달러입니다. 2위 지역은 산호세의 로스알토스(Los Altos)라는 동네이고 평균 가격은 633만 달러죠. 그 동네도 애서튼 지역 근처에 있어요.”
아마 샌프란시스코의 부동산 가격이 만만찮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보라는 의미인 것 같다. 비싼 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1위와 2위가 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이라니 좀 생각 밖이긴 하다.
‘중간 규모가 그렇다면 좀 크고 좋으면 대체 얼마 한다는 거야?’
주택 구입 예산은 천만 달러였다. 그 정도면 소위 말하는 대저택까지는 아니어도 웬만큼 넓고 큰 집은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아줌마 말대로라면 어림없을 것 같다.
“도대체 샌프란시스코의 집값이 그렇게 비싼 이유가 뭐예요? 이곳이 날씨도 괜찮고 살기 좋다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 아니에요? 제가 미네소타에 있을 때는···”
“미네소타에는 실리콘 밸리가 없죠. 애서튼에는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 폴 앨런. 투자계 거물 찰스 슈왑, HP 최고경영자 멕 휘트먼,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등등 전미 400대 거부 중에 6명이 살지요.”
실리콘밸리 인근의 고급 주거지로서 애플, 휴렛패커드, 페이스북, 구글 본사 등 세계적인 하이테크 기업들과 스탠포드 대학이 가까이 있다고 한다.
“IT 붐이 일어나기 전부터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싸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죠. 하지만 실리콘 밸리에 출퇴근하는 젊은 백만장자들이 급작스럽게 생겨나면서 2000년대 후반부터 주거 비용이 폭등하기 시작했어요.”
“그건 투자처로서의 가치도 있다는 말씀이신 건가요?”
“당연하죠. 근 10여 년 내에 가격은 꾸준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의 구매 붐이 일었던 어떤 해에는 그 해에만 약 40% 이상의 가격 상승이 있기도 했었죠.”
“그렇군요. 그럼 지금 아까 말씀하셨던 애서튼 쪽으로 가시는 건가요?”
부동산 중개인의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관심사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주는 그녀의 입담에 지루한 줄 모르겠다.
“예. 거의 매물이 없는 지역이긴 하지만, 우리 회사는 전미에서 탑에 속할 만큼 다수의 물건을 확보하고 고객의 주문에 빈틈없이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여···”
“아··· 예.”
그녀와 같이 몇 군데를 둘러보다 보니 어느 사이에 오후가 되었다.
“아버지 어떠셨어요?”
“나야 뭐··· 네가 마음에 드는 곳으로 하면 돼. 난 어디든 괜찮아. 오늘 본 곳들은 다 좋아 보이더라.”
‘한국 돈으로 다 몇백억짜리를 봤는데 맘에 안 들면 그게 이상하죠. 정말 집값 오지게 비싸네. 이거 대출이라도 내야 하나?’
우리 엄마의 지론이었던 빚 지지 말고 살자를 실천하려고 했는데 첫걸음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오늘 너무 하이 퀄리티를 본 것 같다. 이런 곳이 기준이 되면 다른 곳도 있다지만 별로 마음에 차지 않을 것 같다.
‘아직 재정적인 기초가 확실하게 다져지지 않았는데 벌써 과소비는 곤란하지 않나? 일단 돈이 좀 모이면···’
“미국에서 첫 주택 구매이시죠?”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몇 시간 동안 싫은 기색 없이 친절하게 안내해준 제니스 여사의 물음이라서 그냥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렇긴 합니다. 제가 그동안 직업상 별로 집에 있을 여유가 없어서 주로 호텔에서 지냈거든요. 이번에 아버지와 함께 지내려고 집을 살까 했는데··· 오늘 본 곳들 다 마음에는 듭니다. 그런데 솔직히 많이 비싸군요.”
겉으로 보기에 난 부자처럼 보이지 않는 젊은 동양 청년일 뿐이다. 그런데 왜 이런 수준의 고급 주택들을 보여준 건지 이해가 안 된다.
‘마일리가 따로 연락하지는 않았을 테고··· 혹시 날 실리콘밸리에 연관된 젊은 백만장자쯤으로 착각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실 거라고 저도 짐작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도 있는 거니까요.”
“하하. 집 소개를 직업으로 하시는 분으로서는 너무 한가한 말씀이신 것 같네요. 거래가 이루어져야 본인께 수익이 생기는 것 아닌가요? 고객이 좀 빼면 사라고 권유도 하고 그래야 하는 것 같은데···”
제니스 아줌마는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이고 성격도 온화한 것 같은데 그것이 이런 영업에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좋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거래 알선이 한 번에 되기는 어렵죠. 자수성가한 부자들은 자신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어서 그런 것을 일일이 맞춘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요.”
너무 전투력이 떨어지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거래를 성공시킨 적이 한 번이라도 있나 싶다. 나라도 한 채 사줘야 하나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에구구, 정신 차려야지. 큰돈이 오고 가는 일인데 냉정하게 판단해서···’
“So 선수도 자수성가한 부자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분이죠.”
“어? 절 아시나요?”
만나서 내 개인적인 신상을 알아차릴 만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었다. 평소에도 경기장 밖에서 모자 벗고 다니면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었다. 일단 내 체격부터가 미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통상적인 운동선수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그럼요. 샌프란시스코 살면서 자이언츠 경기를 안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미국인에게 야구는 생활이에요.”
전혀 티를 안 내서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아줌마 생각보다 찐팬인 것 같다.
‘더 이해가 안 되잖아. 날 알아볼 정도의 야구팬이라면 내가 지금 최저연봉자에 가깝다는 것도 알 거고 후원 계약은 일반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을 텐데···’
“좀 놀랍네요. 절 알아보셨다면 지금 제 재정 상태가 보여주신 주택을 살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는 건 파악하셨을 것 같은데 왜···”
“지금은 그렇겠지요. 하지만 1년 후엔 다르지 않을까요? 집이야 어디로 갑자기 없어지는 물건도 아니고, 보면서 좋은 인상을 받으셨다면 이후에라도 다시 찾기 마련이거든요.”
다음 시즌 후 서비스 타임 4년 차가 시작되면 웬만한 집은 충분히 살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긴 한다. 하지만 그렇게 텀을 오래 두고 영업을 한다는 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상에 중개인이 제니스 씨 한 분뿐이라면 거래가 쉽게 이어지겠지만 그렇지는 않지 않습니까? 만약 시간이 많이 흐른 뒤라면 고객이 다시 찾지 않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다른 중개인과 연결되기가 더 쉽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 경험으로는 대개 다시 찾으시더군요. 아까 제가 고객에 맞춰 일일이 응대하기가 어렵다고 했었죠. 하지만 그 중간에 하나만 있으면 뒷과정은 다 생략할 수도 있는 게 사람이죠. 전 신뢰를 드렸습니다. 과연 So씨가 다음에 절 안 찾을까요?
굉장히 자신만만한 말투다. 내가 완전히 사람 잘못 봤다.
“푸하하. 대단하시네요. 상황이 되면 꼭 다시 찾겠습니다.”
집을 안 사도 정말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아줌마다. 자신의 이익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에도 이렇게 부담 주지 않는 사람은 제니스 씨가 처음인 것 같다.
***
“돈이 모자라는 거냐?”
“못 살 정도는 아닌데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아요. 사려면 대출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급한 일인가 하고 생각 좀 하고 있는 중이에요. 1년 정도 기다리면 서비스 타임 3년이 지나거든요. 그럼 일반적 메이저리거처럼 연봉을 받을 수 있는데 아직은 제가 최저 연봉이라서요.”
아버지는 며칠 전 본 집들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그 집들 가격이 얼마인지 모르신다. 아직 영어가 서툴러서 일상 대화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억지로라도 사야 하나? 이거 고민되네.’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말씀을 안 하셔서 그렇지 말도 잘 안 통하는 이국땅 호텔 생활이 편안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눈을 좀 낮춰서 집을 구하면 되지만, 사실 나도 보고 온 집이 아른거린다. 집이란 게 한 번 사고 나면 되돌리기가 어렵다. 한 시즌 정도만 기다리면 되는데 굳이 마음에 들지 않는 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집도 집이지만 조용하고 치안 상태도 좋고 시내까지 40분이면 이동 가능하고. 그 동네가 딱 좋긴 한데··· 그냥 대출 좀 받아서 사 버려? 어차피 후원금이 내년에도 나오고 세금도 많이 내야 하잖아. 절세를 위해서라도 집을 사는 게··· 그렇게 집에 다 넣어 버리면 여유 자금이 거의 없어지잖아. 필요 없는 지출도 많아지고··· 아직은 모아야 할 때가 아닐까?’
마음을 정하지 못하겠다.
“아버지 내리셔야 해요. 다 왔어요.”
아직은 차도 없어 주로 택시를 이용한다.
쉰다고 호텔에만 있는 것이 지루해 에이전트 사무실로 나왔다.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이번에 한 달 정도 쉬기로 했는데 잡생각이 더 난다. 시즌에 야구하는 것이 제일 편하다.
“마침 너 잘 왔다.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었어.”
사무실에 마일리는 안 보이고 고 감독만 있었다.
“왜요? 다큐멘터리 일 관련해서 문제가 있어요?”
“그건 버나드 씨가 알아서 하고 있잖아. 듣기로는 몇 개 회사와 계속 협의 중이고 조만간 계약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하더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거야. 잘 모르는 일에 나서봐야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한 번 믿었으면 끝까지 가야지. 그래야 일이 되는 거라구.”
이젠 말하는 게 제법 사업가 티가 난다.
“그건 그렇죠. 마일리 씨는 어디 갔어요?”
“자이언츠 단장 만나러 갔어. 미팅을 겸한 점심 약속이라고 하더라.”
“그래요? 왜 같이 안 갔어요? 시즌 끝났는데 편안하게 좋은 데서 식사나 하고 그러면 되잖아요. 지금 보자는 연락이면 내년 연봉 이야기일 텐데··· 그건 별로 복잡한 일도 아니고, 저야 주는 대로 받아야 하는 처지니··· 아! 베그웰은 상황이 좀 다르려나?”
“내가 참석하기가 좀 그래. 용건에 대해서 먼저 언질이 있었는데··· 혹시 너 연장 계약 생각 있니?”
생각지도 않은 말이 고 감독에게 나왔다.
“연장 계약이요? 이제 서비스 타임 2년 지났는데? 뭔가 착각하신 것 아니에요? 서른 살 먹은 투수의 계약이 아직 4년이 더 남았는데 연장 계약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내가 거기 안 간 거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 같아서. 윌리스 단장이 분명히 너와의 연장 계약이라고 했어. 의논을 좀 했으면 좋겠다고. 조금만 기다려봐. 마일리가 자세한 걸 알아 가지고 올 거야.”
조건이 크게 좋지는 않겠지만, 성의를 보여준 구단에 감사할 따름이다. 나도 현실 파악은 하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