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건 법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말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버나드 씨가 이렇게 와 주신 것만 해도 많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조언까지 해주신다면 잘 새겨듣겠습니다.”
일단 예의는 차렸다. 어쩌면 이 사람도 야구공 하나 때문에 내게 코가 꿰인 것일지 모르겠다.
“원래 대중하고는 싸우면 안 되는 겁니다. 설득하려고 해서도 안 돼요, 그런 건 다 무의미합니다. 대중은 옆을 보지 않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그런 것이 대중의 속성이고 고래로부터 원래 그랬습니다.”
이 사람도 인간 사회에 대한 관점이 상당히 독특한 면이 있었다.
“그건 공감이 되는 말인데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신지.”
“대중이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하는 걸 해주면 되죠,”
‘무엇을 어떻게··· 구체적인 내용을 말해보라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 말고···’
이래서 많이 배운 사람과의 대화는 힘들다. 설명이 친절하지 않다. 그가 말하려는 내용을 이해하기 몹시 어렵다.
“혹시 다큐멘터리 같은 걸 보시나요?”
“예전에 내셔널 어쩌구 하는 회사에서 만든 건 많이 봤었죠. 그 동물들 나오는 거···”
“스포츠 관련해서 본 적은 없나요?”
“예?”
본 적은 없고 들은 적은 있었다. 주로 축구 관련이긴 했지만.
“야구 관련으로는 한 십 년 전에 과거 야구 스타들의 인터뷰 영상을 편집해 빠른 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하기도 했었죠. 한번 보세요. 나름 재미있으니까.”
“그 말씀은···”
“히어로에 대한 서사는 계속 변해왔죠. 각 시대마다 그 시대의 가치관이나 문화, 유행, 이념 등이 달라졌죠. 그 시대정신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그 영화에 나오는 야구 스타는 행크 아론, 놀란 라이언, 데릭 지터였어요.”
‘다큐멘터리는 그 시대상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뜻인가?’
“각 시대를 대표하는 야구 선수의 말이 시대가 바뀌어도 아직도 공통의 룰로 성행하고 있는 야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대중의 공감을 얻어낸 거죠. 대중은 히어로를 좋아합니다. 비현실적인 것에 열광하는 경향이 있죠.”
‘정말 말 알쏭달쏭하게 하네. 그래서 뭘 어쩌자구요.’
“히어로에 대한 표현은 초기에 정형적 권선징악 서사 구조로 출발했지만 사회 구조가 복잡다변화 된 현대에서는 그의 내면과 사회와의 관계 설정,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한 질문 같은 것을 다루는 등 다양하게 변해왔죠. 대중이 원하는 메시지는 계속 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야구라는 매개체가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할 테니까요.”
정말 내가 공부가 모자란 게 한이 된다. 나에게는 말을 이렇게 알아듣기 어렵게 하는 재주도 없고, 알아듣는 척하는 것도 힘들다.
“과거 영웅의 모습 중 권선징악적인 면이 클리셰로 대중에게 받아들여졌다면 현시대에선 개성이라는 것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포장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거 괜찮네.”
“좋은 아이디어이군요. 버나드 씨.”
‘허! 이럴 수가··· 마일리는 그렇다 치고 고 감독도 지금 이 말이 이해가 된다고?’
열 받고 의기소침했던 고 감독의 모습이 돌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우리 다큐 제목은 퍼펙트게임으로 하면 되겠네. 한국인 고난을 딛고 일어나 땀으로 새 역사를 이룩하다. 많이 볼 거 같은데···”
‘헉! 이 이야기가 영화 찍자는 말이었어? 그것도 나를 모델로? 그게 우리가 하고 싶다고 되는 일인가? 음. 될 수도 있겠네. 까짓 제작비를 우리가 대면 되지. 다큐멘터리라 별로 많이 들 것 같지도 않고···'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뜻밖의 관점 변화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아이디어. 조금 구미가 당기긴 한다.
“지금 무슨 이야기가 돌든지 무시하면 됩니다. 안티 없는 유명인은 없어요. 비난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 되더라도 비난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거기에 맞춰줄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주장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지요. 그럼 대중이 어느 쪽을 따라갈지 결정할 겁니다.”
마일리도 동조했다.
“언론은 과거부터 그들대로의 고유 영역을 구축해왔지만 이제 신문사는 시대에 뒤떨어진 업종이에요. 새 시대에 맞게 OTT 서비스 같은 걸 이용해서 전 세계에 우리 모습을 송출한다면 우리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길 겁니다. 메시지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이게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입니다.”
이제야 버나드에게 결론이 나왔다. 이렇게 좀 명확하게 말을 하란 말이다.
‘빌어먹을··· 결론만 알아듣겠네.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잖아. 이리 꼬고 저리 꼬고···’
역시 유명해지고 볼 일이다. 이런 계획이 즉석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니 얼마 전만 해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거 좋군요. 안티는 내버려두고 지지자를 만들자. 그런 거군요.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그럼 그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요? 전문가를 섭외해야 할 텐데 워낙 아는 게 없어서···”
고 감독은 마일리를 쳐다봤지만, 그녀도 그런 쪽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제가 할리우드에 친구들이 좀 있습니다. 아마 이번 So의 퍼펙트게임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자고 제의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바로 뛰어올 사람들이 좀 있을 겁니다. 그들도 야구팬이거든요.”
누가 버나드 씨를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굿 초이스였다.
“이번에 O사 후원금이 들어오면 그걸 이번 계획 밑자금으로 쓰면 되겠네요.”
정말 돈 들어오기 무섭게 돈 쓸 일이 생긴다. 천만 달러 이상은 될 것 같은데 이제 나도 돈 쓰는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야! 그거 다 쓰면 안 되지. 너 살 집도 구해야 하잖아.”
‘하핫. 감독님 이 장면에서 그러시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요.’
걱정은 고맙지만 일의 선후라는 것이 있다. 지금은 집보다 다큐멘터리 계획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맞다.
“당분간 월세 살면 돼요. 그런 계획에는 여유 자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요. 일단 좀 넉넉하게 잡아 놓고 시작해야···”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겁니까? So가 거기 자기 돈을 왜 넣어요?”
정말 버나드 씨. 이 사람은 다 좋은데 말을 너무 알아듣기 힘들게 한다. 그럼 이런 일에 내가 돈을 투자하지 않으면 누가 한단 말인가? 혹시 일이 진행되다 투자자가 나설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다 나중 일이다. 일단은 내가···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미국의 영화 산업은 190만 개 직종의 종사자들에게 연간 천억 달러 이상의 임금을 지불합니다. 이 산업에 연관되어 국고로 들어가는 세금만 연 200억 달러 이상이 되지요. 이걸 수출 규모로 환산하면 미국에서 면, 옥수수, 석탄 다음입니다.”
시장 규모가 크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계획의 파급력이 클 것이라는 판단을 한 거고.
“미국에서 영화 산업은 가장 극단적인 자유 시장경제 논리가 지배하는 모델입니다. 독점적이면서 아주 폐쇄적인 구조죠. 선과 악을 떠나 그냥 경제적 논리를 우선으로 하는 거대 메커니즘으로 이해해야 해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된다.
“미국 영화계를 보통 할리우드라고 불리는 메이저 스튜디오들과 인디펜던트 영화사로 나누기는 합니다만, 실제로는 공조와 의존 관계를 통해 연결되어 있어서 한 덩어리나 마찬가지죠. 영화 제작은 독립영화 프로듀서 혹은 독립제작사들이 하고 메이저들은 투자와 배급에 주력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건 리스크를 분산시키고 효과적으로 작품들을 수급하기 위해서라고 포장되어 있지만, 그 내막은 독점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조금 감이 온다.
“그러니까 제가 돈을 대도 마음대로 다큐멘터리를 찍을 수 없다. 이 말씀이신 건가요?”
“찍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예를 들어 극장에서 일반 관객들이 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 뜻입니다. 그 독점적 구조는 내용이 좀 다르긴 하지만 OTT를 서비스하는 회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 감독은 나처럼 멍하니 듣고만 있고 마일리는 무엇인가 열심히 메모 중이다.
“원래 미국에는 한 기업당 소유할 수 있는 매체 수를 제한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 레이건 정부하에서 그 법이 철폐되었죠. 그때부터 다국적 거대 미디어 기업들이 소위 pipeline이라고 부르는 유통 시장의 모든 경로를 장악하게 되었고 콘텐츠에 대한 판권을 소유하는 메이저 회사의 미디어 부서들이 이런 pipeline을 통해 배급하게 되면서 현재의 산업적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결국 이미지 개선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다큐가 되려면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그 메이저 회사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군요.”
“결론을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게 세상의 룰이죠.”
난 이미 짜여있는 세상의 규범과 규제에 도전하고 싶지는 않다.
‘야구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란다구. 선수 생활을 앞으로 10년 더 할 수 있을까? 아마 어렵겠지?’
거기에 쓸 시간도 모자란다. 앞으로 몇 년 남지 않았는데 멋지게 정말 잘해보고 싶다. 이런 야구 외적인 부분에 신경을 쓰는 건 온전히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서다.
‘잘하면 편안하게 웃을 수 있고 게임을 치르다 보면 있을 수밖에 없는 실수에 더 분발하려면 정신이 분산되어서는 곤란하지.’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그동안 나에게는 상당히 어려웠다. 그만큼 여유가 없었다.
“세운 계획이 잘 이루어지게 하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건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다. 이걸로 경제적 손실이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저하고 정식 계약을 해야겠죠. 그게 자본주의죠.”
이 사람도 보통 멘탈이 아니었다.
“풋. 그건 당연히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투자가 필요 없다는 건 무슨 말씀인가요?”
“우리가 자금을 투자한다고 해서 모든 수익이 우리에게 돌아오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구조입니다. 그럼 발상을 바꿔야지요. 수익과 위험은 메이저에게 다 돌려야죠.”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기득권의 이익을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럼 우리 목적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려면 시작부터 메이저의 자본을 유치해서 출발해야 하는 건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기대 수익이 크면 클수록 이 일에 쏟는 그들의 노력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투자의 유치에는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는데 가장 확실한 건 그것이고 그것이 안 되면 다른 방식으로 선회하면 됩니다.”
이 사람이라면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들어 줄 것 같다.
“우리 수익은 어떤 식으로 발생하게 되는 건가요? 말씀하시는 식으로 일이 진행된다면 잘되어도 그냥 남 좋은 일 하게 되는 거잖습니까?”
아주 즐겁다. 마일리의 시기적절한 질문이었다.
“스튜디오 메이저들의 기본적인 투자 방식은 저작권 확보를 위한 구매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그런데 가령 우리가 하려는 걸 일반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원작자도 우리고 주연 배우도 우리인 셈이죠. 우리가 빠지면 안 되는 일입니다. 이것에 대한 대가는 러닝 개런티 형식으로 수익을 배분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죠. 그 비율은 우리가 저들을 설득하기 나름이고···”
아주 바람직하다. 이 사람 계획은 투자의 위험은 남에게 지우고 안정적으로 수익을 확보하자는 이야기다. 정말 자본주의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