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해 지는 풍경
“이 바보 같은···”
드로이넨의 글러브가 바닥으로 향하다 멈춰졌다. 움츠러 들었던 그의 몸이 천천히 바로 섰다. 어깨의 들썩임으로 봐서는 심호흡 중인 것 같다.
‘실투가 그렇게 아쉬웠나?’
슬라이더가 행잉성으로 가운데로 밀려들어갔고 그대로 통타 당했다. 아무리 그랬어도 마운드에서 감정 표현을 잘 절제하던 마크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포스트 시즌이 되니까 선수들이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나 보네.’
1회 시작부터 2:0이다.
‘맛이 가는 상황이긴 해.’
드로이넨은 진정이 된 것 같았다. 조용히 구석으로 가서 앉는다. 겨우 덕아웃 분위기가 좀 나아지는 것 같더니 시작하자마자 다시 숙연한 분위기로 돌아가 버렸다.
“어렵네. 어려워.”
케빈이 소곤거렸다.
“뭐가 어려워요. 드로이넨이 투수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그 친구야 그렇겠지. 그 문제가 아니라···”
뒷말을 이어 말하진 않았지만 다 알아들었다.
‘이럴 때 누가 한 방 터트려서 분위기를 좀 바꿔줄 수 있으면 좋은데 우리 타선이 그런 걸 기대하기가 어려워서···’
그나마 홈런을 좀 터트려주던 게 레블론과 필이었는데 팀배팅 쪽으로 타격 스타일을 변형시키면서 홈런 수가 줄어들었다.
우리 팀 타선은 전형적인 원래 소총부대였다. 그런 경향은 시즌 마지막에 들어 더 심해졌다.
‘다 일장일단이 있는 거잖아.’
시즌 마지막 한 달간 우리 팀의 장점은 집중력이 좋았다. 타율은 낮고 홈런도 적었지만 어떻게든 점수를 내야 할 장면에서는 한두 점이라도 냈다. 그렇게 밀어붙여 그걸로 와일드카드를 따냈었다.
타자들이 이 사실은 더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과감한 풀스윙을 연이어 돌려대던 우리 4번 레블론과 5번 필이 당해버렸다.
‘의도가 아무리 좋았어도 결과가 안 따르면··· 하핫. 시즌 끝나면 철학책이라도 한 권 써야 하나? 야구에서 인생을 배운다?’
이제 베그웰 차례다. 그는 하반기에 포텐을 터트렸다. 어쩌면 우리 팀 와일드카드 진출은 그의 후반기 맹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거다. 최근 우리 팀의 최고 타자는 그였다. 마지막 한 달간 거의 4할에 가까운 타율을 기록하며 시즌을 끝냈다.
‘상반기에 출장 기회가 좀 많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나마 후반기라도 잘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내년엔···’
물론 규정 타수에 많이 미달해 시즌 전체로 보면, 그저 그랬던 타격 컨디션의 일시적 반등 정도로 평가절하할 수도 있겠지만 뚜렷한 임펙트를 남겼다.
‘출장 기회가 많아지면서 타율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잘 유지해냈어. 똑똑한 우리 프런트가 이걸 지나치지는 않겠지.’
다음 시즌 초반 출장 시간은 이미 보장받은 거나 마찬가지다. 거기서 어느 정도만 해내면 걱정 끝 행복 시작이 된다.
그의 장래는 아주 긍정적인데 지금이 문제다. 타격 스타일을 바꾼 뒤로 베그웰에게는 장타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번 시즌 홈런을 하나도 때려내지 못했다. 전형적인 똑딱이다.
‘그래도 3할 치는 포수에게 경쟁 상대가 있을 수 있겠어? 최근 한두 달간은 그가 주전이었잖아. 그는 완전히 자리 잡을 거야. 내년은 걱정하지 않아도···’
타악-
생각지도 않은 타격음이 났다.
“어?”
무슨 일인지 온전한 판단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라인 드라이브 타구가 쏜살같이 좌측 담장을 넘어갔다.
“허! 무슨 타구 속도가···”
“지금 베그웰이 홈런 친 거야? 완전 미쳤네.”
“누가 치든 무슨 상관이야. 한 점 따라붙었잖아.”
늘어졌던 분위기가 금방 달아올랐다. 완전히 양은 냄비 저리 가라고 할 정도다.
“베그웰!”
“베그웰. 니가 해낼 줄 알았어.”
‘태세전환 지리네.’
어이없긴 하지만 일단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러면 된다.
“올 시즌 첫 홈런이잖아. 그럼 덕아웃 들어오면 모르는 척해야 하는 것 아냐?”
“제정신이야? 베그웰이 풀타임 몇 년 차인데 그딴 걸 해. 흐흣. 이래서 신인은···”
“나 참! 누가 들으면 니가 풀타임 몇 년 된 줄 알겠네. 지도 작년에 겨우 올라왔으면서 마이너에서 질질 짜던 꼬마 놈이 많이 컸네.”
“키킥. 당연하지. 이 동네가 다 그런 동네야. 신참은 찌그러져 있으라구.”
짓궂은 농담이 오고 가고 웃음이 피어난다.
다들 분위기를 띄워야겠다는 듯 평소보다 훨씬 요란하게 홈런 타자를 맞이했다. 기죽지 말자는 감독의 말은 잘 실천되고 있었다.
“잘했어. 얻어걸린 것 같지만 아주 좋은 스읭이었어.”
덕아웃 환영식을 마친 베그웰의 포수 장비 착용을 도와주면서 나름 생각한 덕담을 건넸다.
“얻어걸리긴··· 심혈을 기울인 게스 히팅이었다고.”
‘하아! 칭찬해주면 그냥 좀 들어라. 네 스윙 만든 과정을 내가 바닥부터 다 아는데···’
“너 그런 거 안 하지 않았냐? 삼진 당하면 안 된다고 투 스트라이크 이후엔 커트 해내기 바쁜 사람이··· 우연이라도 아주 잘했다구. 좀 더 세련되게 거짓말했으면 그 말도 믿어주려고 했는데···”
이 말은 진짜다. 너무 터무니없는 말을 하면 믿어주고 싶어도 못 믿는다.
“진짜 게스 히팅이었어. 내가 장타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요즘 다들 인코스 승부를 꺼리지 않더라고. 그래서 이번 타석 전부터···”
이 말은 뭔가 좀 그럴듯하다.
“진짜 홈런을 노려서 쳤다구?”
“홈런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인코스를 노린 건 맞아. 전 타자들에게 한 볼 배합이···”
믿어준다. 운이든 노림수를 가졌든 결과로 증명해야 하는 동네에서 결과를 만들어 냈다.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일이다. 좋은 타이밍에 나온 좋은 홈런이었다.
메츠도 만만하게 물러나지 않았다. 끊임없이 드로이넨을 괴롭혔다. 매회 주자가 나가고 나가면 과감한 주루 플레이가 나온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팀이 수비 능력이 괜찮다는 건 잘 알려져 있잖아요. 왜 저렇게 적극성을 보이는 걸까요? 지금까지는 별로 득이 없는 것 같은데···”
지금도 타자 주자가 한 베이스 더 가려다 죽을 뻔했다. 거의 잡을 뻔했는데 아쉽다.
“저렇게 이겨 왔으니까. 쟤네들은 아는 거야. 단기전에서 안정적으로 해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움츠려서 상대 기세를 올려주기 싫은 거지.”
“그래도 저러다 진짜로 주자가 죽어버렸으면 자기 기세를 스스로 꺾는 게 되는 거잖아요. 메츠는 그래도 감독이 뭐라고 안 하나 보죠?”
케빈의 설명을 들었지만, 얼핏 이해가 잘 안 된다.
“그게 경험이지. 과감한 플레이와 본헤드 플레이 사이의 경계를 본능적으로 조절하는 거야. 쟤들은 작년에 많이 겪었을 테니까. 우리 팀이 잘 못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야. 아주 안정적으로 실수 없이 잘하고 있어. 다만 그 이상이 없는 게···”
케빈은 우리 팀이 밀리고 있는 원인이 경험의 차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다.
‘알쏭달쏭하네. 그런 게 수치적으로 딱 보이는 것도 아니고···’
“쟤네들 작년 우승할 때 주축 멤버가 거의 그대로 다 있어.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 경험적으로 아는 거야. 벤치도 그걸 믿고 많은 부분을 선수들에게 맡겨두는 것 같아. 지금 장면도 타자 주자가 즉흥적으로 판단한 걸 거야.”
우익수 쪽에 떨어지는 짧은 안타에 2루까지 달렸다. 우리 수비의 실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통상적이고 안정적으로 플레이를 했을 뿐이다. 그 틈을 잘 파고들었다.
내가 듣기로는 우리 팀이 포스트 시즌 경기를 마지막으로 치러본 건 7년 전이라고 한다. 그때 선수 중 팀에 남아 있는 건 케빈뿐이다. 그런 그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게 있는가 보다 하는 거지 사실 잘 모르겠다.
“우리 팀에도 트레이드나 FA로 영입된 선수들은 포스트 시즌 경기를 경험했지만, 그건 다른 팀이었지. 팀 케미란 게 그런 개별적 경험으로는 잘 만들어지기가 힘들어. 이번 시즌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내년에는 분명히 올 시즌보다 나을 거야. 거기 내가 낄 수 없어서 많이 아쉽다네.”
그는 은퇴 결심을 굳힌 것 같다.
“어제 던지는 것 보니까 조금 더 해도 될 것 같던데 이제 그만하고 싶은 거예요?”
“계속 던지고 싶어. 이번에 재활하면서 한두 해 더 해볼 결심을 하기도 했었지. 하지만,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어제 던지면서 절실하게 느꼈어. 그렇게 오래 준비를 하고 오른 마운드였는데 정상적으로 던진 건 3회까지였지. 나머지 두 이닝은 온갖 꼼수로 겨우 버틴 거야.”
그 말은 인정한다. 그랬던 건 어제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
“선발이 힘들다면 불펜을 할 수도 있잖아요? 케빈이 꺼리는 일일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절실하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가 이대로 은퇴하는 건 많이 아쉽다. 그에게는 투구 이외에도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 늦게 친해졌다.
“이제 회복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연투는 고사하고 지금 몸 상태라면 짧게 던져도 2~3일은 쉬어야 할 것 같아. 그런 불펜 투수가 경쟁력이 있겠나? 자네도 몸 관리 잘하라구. 올 초만 해도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딱-
‘하아! 외야 플라이긴 한데···’
3루 주자의 태그 업(tag up)으로 메츠가 한 점 더 도망갔다. 이제 3:1이다.
‘이렇게 되면 단타성의 타구로 2루까지 억지로 간 게 점수가 된 꼴이네.’
무사 2루, 진루타로 1사 3루, 희생플라이로 득점. 우리 팀이 별다른 실수를 한 것도 없는데 메츠는 무리 없이 한 점을 더 가져가 버렸다.
‘이런 점수는 어쩔 수 없잖아. 드로이넨은 충분히 잘 던졌어.’
언제나 그랬듯이 그는 다음 타자를 범타로 무난하게 막아냈다. 마크는 여기까지다. 이제 투구 수가 너무 많아졌다.
마크 드로이넨. 5이닝 3실점. 1회 홈런을 제외하고는 별로 실투가 없었던 것 같은데 결과가 이렇게 나와 버렸다.
우리는 뒤가 없었다. 6회부터 내일 선발로 예정되어 있던 로저스를 올렸다. 감독이 여기서 한두 점 더 준다면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내일은 누굴 내려고 이러는 걸까요? 하긴 오늘 지면 내일은 없겠지만.”
지금 이렇게 되면 선발로 쓸 수 있는 애덤, 드로이네, 로저스까지 다 쓰게 된다. 다른 투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들에 비해서는 무게감이 확 떨어졌다.
“오늘 소르카가 왜 없겠어. 대충 짐작이 되지 않나?”
설마 하던 일이 현실이 되어가려 한다.
‘감독이 휴식 간격 지켜준다고 하지 않았었나? 급해지면 할 수 없는 건가?’
미리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2이닝을 잘 버티던 로저스가 8회에 터져 버렸다.
내 첫 포스트 시즌은 한 번 등판해보지도 못하고 이르게 끝나고 말았다. 몹시 기분이 더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