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기세 싸움
“정규시즌이 끝났는데도 영감님이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시네. 난 힘 떨어지면 그냥 조용히 은퇴하려고 했었는데··· 거 참!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드로이넨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감이 왔다.
‘아! 케빈이 이렇게 미화되는 거야? 어이! 이보세요. 마크. 당신이나 나나 나이 차이 별로 없다고··· 이제 풀타임 첫 시즌 치른 사람 앞에서 은퇴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 난 아직 할 거 많다고. 이제 시작이야.’
만 29세라는 나이가 부담스러워졌다.
‘29세 맞어. 아직 생일 지나기 전이야.’
케빈 데스클레니는 기대 이상의 역투를 거듭하고 있었다. 4이닝 1실점. 듣기로는 오프너의 역할만 해내면 성공이라 생각하고 투입했다 하는데 이미 그 역할은 충분히 다 해냈고 이젠 승리 투수가 눈앞에 있다.
‘그가 38세였나? 39세?’
안타도 매회 맞고 볼넷도 가끔 줬지만, 결정타를 피하며 실점을 최소화하고 있다. 일반적인 구위와는 다른 그 무엇이 그를 지탱한다.
‘집념인가? 이거 잘하면 이길 수도··· 흠흠. 아직은···’
가벼운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봤었는데 갈수록 편하게 보기가 어렵다.
5회 말 현재 2:1의 스코어로 리드 중이다. 투아웃에 주자 2루. 투 볼 노 스트라이크.
마운드를 방문했던 감독이 그냥 내려왔다.
‘안 바꿔? 힘 떨어졌잖아. 바꿔줘야··· 아! 그냥 이 타자는 볼넷으로 보내고 다음 타자에 바꾸려는 건가?’
케빈은 제 몫을 다했다. 감독이 뭘 더 기대하는지 모르겠다. 투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오프너가 내려오면 애덤이 선발의 역할을 준비하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로저스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스트라익.”
‘하! 노인네 여기서 빠르지도 않은 패스트볼로 정면 승부를 해? 1루 비었잖아. 유인구를 던져야···’
감독이 뭐라고 했는데 이러는지 모르겠다. 지금 감독은 팔짱을 끼고 무표정하게 서서 마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든 아주 심각한 아우라가 주변을 조금씩 물들여간다.
“스트라익.”
또 패스트볼이다.
‘미치겠네. 베그웰 이 자식 넌 왜 이러는 거야. 너라도 중심 잡아야···’
아슬아슬해서 차마 못 보겠다.
“케빈 한 방 먹여.”
덕아웃 어디선가 큰 소리가 났다. 이 상황에서 그따위 말은 많이 곤란하다.
‘누구야?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금··· 뭐! 지금이 어때서···’
이어져 가던 생각이 순간 멈칫했다. 바로 현타가 왔다.
‘하아! 질 때 지더라도 이런 식은··· 1점 더 줘봐야 동점이잖아. 정작 곤란한 건 내 생각이었나?’
누군가의 외침이 모두의 긴장감을 풀어버린 것 같았다. 숨죽었던 덕아웃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크크큭. 영감님. 다친다구. 살살 던져요. 그래도 쟤들 못 칠 거야.”
“허리 아프다고 올라가기 전부터 골골거리더니 잘만 던지면서,”
“까짓거 맞으면 맞는 거지. 한복판으로 꽂아 버려.‘
위기 상황인데도 왠지 모르게 선수들 기가 살아났다. 생각해보니까 괜히 쫄았다.
‘지면 지는 거지. 어쩌란 말이야. 애초에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했었잖아. 밑져야 본전인 건데 기까지 죽을 필요는 없잖아.’
지금 보니까 엄숙한 덕아웃은 우리 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좋아. 여기서 끝내요.”
나도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관중석은 이미 흥분이 넘쳐흐르고, 빤히 건너 보이는 메츠의 덕아웃도 소란스럽다.
“뭔가 보여준다고 했잖아.”
무엇인가 잘못된다고 해도 우리 팀은 잃을 것이 없다.
‘자! 이제 하나만 더···’
틱-
‘헐! 이 여우 같은 노친네. 음흉하게 분위기 다 달궈 놓고 여기서 유인구를···’
곧 죽어도 정면 승부할 것처럼 별로 빠르지도 않은 페스트볼을 팡팡 꽂아 넣던 케빈이 체인지업으로 유인구를 가져갔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여기서 당연한 볼 배합인데 조금 전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정말 지리는 연기력이다.
빗맞은 타구는 높이 솟아올랐다. 베그웰이 여유 있게 볼을 쫓고 있다. 포수 파울플라이 아웃. 삼자범퇴.
그동안 마운드에서 무표정을 고수하던 케빈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한 손을 번쩍 쳐들었다. 당연히 반응은 바닥이었다. 여긴 우리 홈이 아니다.
‘적진에서 환호를 받을 수 있는 건 나 정도는 되어야···’
“하핫. 그래 그거지.”
“오늘 경기 끝났어.”
관중은 야유를 날렸지만, 우리 선수들의 환호를 받으며 케빈은 당당하게 덕아웃으로 귀환했다.
“케빈!”
“케빈!”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주르르 늘어서서 손을 마주치고 물을 건네주고, 완전히 난세의 영웅이다. 선수들이 다 미쳐버린 것 같다.
‘어휴! 누가 보면 게임 끝난 줄 알겠네. 하긴 케빈에게는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마지막 모습으로 어떤 것이 멋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모습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흐흣. So. 나 좀 괜찮지 않았어?”
이윽고 환영 행렬의 끝에 있던 내 앞까지 온 케빈은 의뭉스럽게 웃었다.
“아이싱이나 잘 받아요. 나중에 손자들 안아주려면 팔 아프면 안 되잖아요. 음. 그렇죠.”
당황스럽게 신체적 이상 반응이 온다. 순간적으로 수의근이 불수의근으로 바뀌는 이 신체 반응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포옹은 생략했다. 갑자기 닥쳐온 데자뷔 때문에 두렵다.
“어이! So. 혹시 기분이 막 좋았다가 다운되고 그러는 거야?”
케빈이 굉장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생사람 잡지 마요.”
나는 냉정한 이성을 24시간 유지할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다. 비록 과거 잠깐의 실수로 많은 오해를 받고 있지만, 묵묵히 지내다 보면 그 또한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론 눈가에 경련이 있고 눈동자에 붉은 기가 나타나면··· 그거 아니야?”
“무슨 말을··· 내가 언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어하기 힘든 신체 반응이 오는 순간이 있다. 이건 아주 자연스러운 거다.
“내가 사람에게 좀 감동을 주긴 하지. 너무 부끄러워 안 해도 돼. 내 나이쯤 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구. 우리도 다큐멘터리 하나 찍어야 하는 건데··· 축구는 찍으면서 왜 야구는 그런 것 왜 안 하는지 모르겠어. 감동의 휴먼 스토리가 될 텐데··· 땀과 눈물의···”
이 아저씨 너무 오버한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정말 진심을 담아서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 그래. 니 말이 다 맞아. 절대로 아니지. 사나이는 팔꿈치로 눈물을 닦는 법인데 그럴 리가 없지. 케빈이 잘못 본 게 틀림없어.”
한편인 줄 알았는데 소르카 이놈이 더 나쁜 놈이다. 사람을 멕이고 있다.
“왜 그래? 감성적인 선수가 난 좋아.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드로이넨까지 거들고 나섰다. 모두 날 놀리기 동맹이라도 맺은 것 같다.
“무슨 일이야.”
감독이다.
“감독님. 하아! 제가··· 전 절대로···”
너무 열이 올라 설명이 잘 안 된다.
“아! 그런 거 가지고··· 나도 케빈이 들어오는데 좀 울컥하더라고 사람이면 다 가지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가지고 너무 놀리면 그건 옳지 못한 일이지.”
다 한편이다. 여기서 화내면 더 바보 꼴이 될 뿐이다.
‘다 똑같은 X··· 어이구, 진짜··· 감독이라서 욕은 차마 못 하겠고 내가 참고 말아야지.’
“하아! 네. 그렇죠.”
뭐가 되었던 우리는 게임을 이기고 있고 이대로 끝까지 이겨 낼 거다.
‘이기고 나면 있는 눈물을 다 짜내서 시원하게··· 에고, 팀의 단합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불사르겠다는 그런 의지의 표현이었어.’
“아아···”
“이런···”
유감스럽게도 시원하게 분풀이할 순간은 오지 않았다. 안드레가 맞아 버렸다.
“2연속 블론을···”
나도 모르게 이상한 말이 입 밖으로 흘러 나간다.
“포스트 시즌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안드레 들어오잖아. 티 내지 마. 아직 끝나지 않았어. 우린 내일 또 게임을 해야 해.”
내게 경고를 날린 케빈이 나서서 늘어져 버린 투수들의 분위기를 추스르기 시작했다.
“역전패라니 할 말이 없네. 이번 시즌 막판에 우리도 많이 했잖아. 이게 야구지 어쩌겠어. 그렇게 진 팀들도 다음 날 다들 멀쩡하게 게임했어.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는 거야. 내일은 이길 수 있어.”
아마 케빈은 은퇴 경기를 아주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케빈. 내일은 새로운 태양이 뜨겠지만 오늘 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렇게 묻고 싶었지만 이건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되는 말이다.
9회 말 정말 어이없게 게임이 뒤집혀 버렸다. 3:2가 3:4로 바뀌는 데 메츠에겐 아웃 카운트 하나도 필요하지 않았다. 간단했다. 1단타 1홈런 바로 2실점.
무표정한 얼굴로 안드레가 덕아웃으로 들어왔다. 아무도 다가서지 않는다. 이럴 때가 제일 곤란하다. 뭐라고 할 말이 마땅치 않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더라도 모두 부정적인 의미가 되어 버린다.
‘어쩌면 지금 제일 괴로운 건 그일 텐데···’
참 쉽지 않다.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은 불안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포스트 시즌은 이게 지랄이네.’
정규 시즌의 패배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때는 지더라도 숙소에 돌아가기 전쯤이면 어느 정도 평소의 분위기가 돌아왔다.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린 내일 지면 탈락이다.
“1994년에 와일드카드 제도가 처음 생겼는데 2002년에 우리 팀이 와일드카드 팀으로는 처음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었지. 한 칸씩 올라갈 때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참 힘들었었어.”
라드 감독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버스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너무 귀에 잘 들어왔다.
“그런데 어찌어찌 계속 이겨나갔어. 기세를 탔지. 어느 순간 정신 차리니까 월드 시리즈에 도착해 있는 거야. 그래서 에너하임이랑 음. 그게 지금 에인절스야. 암튼 그랬는데 결국 3승 4패로 졌어. 우리가 왜 졌는지 아는 사람 있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감독의 추가 설명이 이어졌다.
“그때 우린 본즈가 있었지. 그는 월드시리즈 내내 맹타를 휘둘렀어. 7경기 17타수 8안타 4홈런 6타점 13볼넷, 타율 0.471, 출루율 7할, 장타율 1.294, OPS 1.994 사람이 아니었지. 그런데도 졌어.”
이상한 일이긴 하다. 단기전에 그렇게 미친 활약을 보이는 타자가 있는데 지다니 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우린 와일드카드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는 기세를 탔지만, 우리 상대인 에너하임 에인절스도 와일드카드 진출 팀이었어. 똑같이 바닥에서 치고 올라왔던 거야. 그들은 결국 와일드카드 최초 월드시리즈 우승팀이 되었지.”
‘와일드카드 진출 두 팀이 월드시리즈를? 그런 일이 있었나?’
“그때 우리 팀이 진 이유는 간단해. 우리보다 그들의 기세가 강했어. 그들의 바닥이 좀 더 깊었나 봐. 포스트 시즌 진출 팀의 전력은 큰 차이가 없어. 각 팀마다 장단점이 있을 뿐이야. 우리 기세가 죽지 않는다면 내일 게임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이상이야. 빨리 방으로 꺼져. 쉬어. 쉬라고. 내일은 눈빛이 좀 달라져 있길 기대하지.”
곧 버스는 숙소 호텔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