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편안한데 불편하다
“한국에서 가족이 왔다며···”
유니폼을 갈아입으려고 락커에 들렀는데 소르카가 반겨준다.
“응. 아버지가 오셨어. 졸려 죽겠네.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 태워드리고 하느라 일찍부터 좀 바쁘게 움직였더니···”
겨우 게임이 시작하기 전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잠자리에 든 시간이 새벽이었고 이리저리 시간 맞추느라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그래도 늦지 않아 다행이다. 이렇게라도 도착하니까 겨우 마음이 놓인다.
“왜 벌써 왔어. 이번 시리즈에 등판도 안 할 거면서··· 하루 정도는 더 같이 있다 와도 되잖아.”
그의 말이 단순하지 않게 느껴진다.
‘2연패를 당해 탈락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시즌 마지막에만 함께하면 된다?’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내가 너무 민감한 걸지도 모른다. 게임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런 생각은 금기 사항이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아직 시즌이 안 끝났잖아. 마음이 불안해서 안 되겠더라구. 아버지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즌 끝나고 시간을 보내도 되는 거니까···”
모르는 척 평범하게 넘겼다. 아니, 원래 별 뜻 없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 내가 민감한 탓이다.
“그렇기도 하겠네. 나도 이게 얼마만의 포스트 시즌 경기인지··· 멋있게 잘할 수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등판을 못하네. 이것 참!”
표현이 직접적이지는 않았지만, 승리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은 충분히 느껴졌다.
“잘하겠지. 이길 거야. 디비전 시리즈에 올라가면 우리도 ···”
이렇게밖에 이야기하지 못하는 내 마음도 답답하다.
“선수들은 그라운드로 다 나간 모양이지?”
“벌써 다 나갔지. 나도 나갔다 뭘 좀 가지러 온 거야. 이거···”
소르카가 락커에서 스포츠 테이핑을 할 때 쓰는 테이프를 들어 보여준다.
“그거 트레이너가 가지고 다니지 않아?”
“마침 떨어졌다고 하더군. 내가 예전에 쓰던 게 있어서···”
탄성 있는 테이프를 관절, 근육, 인대 등의 불편한 신체 부위에 감아 주변 근육을 지지해 주면 운동 시 부상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누군지 몰라도 그냥 좀 쉬면 괜찮아질 텐데 굳이 그렇게 해 가면서까지···”
“포스트 시즌이잖아. 너 들었어? 오늘 우리 선발이 케빈이야.”
“뭐라고?”
‘하! 노친네. 기어이 나오셨네. 소르카가 테이프 가지러 올 만했네.’
말만 들어도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등판도 하기 전부터 몸이 삐걱대는 것 같은데 우리 팀도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다.
‘아이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지. 별생각을 다 하네. 다들 알아서 하겠지.’
MLB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팀 수는 2012년까지 8개 팀이었다가 10개 팀으로 늘어났고, 그때부터 10년 만인 2022년에 12개 팀이 되었다.
양대 리그의 각 3개 지구 우승팀 중 승률이 높은 2팀은 부전승으로 디비전 시리즈에 직행한다. 지구 우승팀 중 승률이 가장 낮은 팀과 와일드카드 3팀이 3전 2승제로 와일드카드 시리즈를 벌여 디비전 시리즈에 진출할 2팀이 결정된다.
지구 우승을 한 3팀 중 가장 승률이 낮은 팀과 와일드카드 3위, 와일드카드 1위와 2위가 각각 맞붙는 방식으로 두 팀을 뽑고, 부전승으로 디비전 시리즈에 선착한 지구 우승팀 가운데 승률이 가장 높은 팀이 와일드카드 1·2위 승자와 2위가 남은 한 팀과 디비전 시리즈를 가지게 된다.
와일드카드 3위인 우리 팀이 오늘 싸워야 하는 상대는 동부 지구 우승팀인 메츠다.
2015년과 2016년의 짧은 전성기를 뒤로하고 어메이징 메츠의 재현으로 오락가락하던 메츠는 2021년 새로운 구단주를 맞이하면서 달라졌다. 지난 몇 년간 꾸준한 투자의 결과는 바로 전 시즌인 2028년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근래 몇 년간 꾸준히 동부 지구를 대표하는 강팀이었다.
메츠의 홈구장 시티 필드는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메츠의 월드시리즈 2연패를 외치는 팬들로 뜨겁다 못해 폭발할 것 같다. 특히 외야 쪽이···
“난리 났네. 난리 났어.”
The 7 Line Army라는 게 있다. 메츠의 공식적 응원단과 같은 모임이라는데 보통은 외야 300석 정도를 지정해 자신들의 구역을 만들어 응원한다. 오늘은 척 봐도 300명보다 훨씬 많아 보이는 오렌지색 물결이 외야 한편을 덮고 있었다.
‘본 적이 있긴 하지만 오늘 느낌이 새롭네. 주황색 옷과 풍선 막대기라···’
“저 티셔츠는 각자 그냥 입고 오는 건가?”
“모임에 가입하면 아마 주지 않겠어?”
“저기도 가입해야 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거겠지?”
“그렇겠지.”
대답에 자신이 없어 보이는 게 소르카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건 말이지. 2009년에 몇몇 메츠 팬들이 ‘난 살아 남았다’라는 문구를 넣어서 티셔츠를 만들었는데 계속 루징 시즌을 되풀이하던 팀을 자조하는 의미로 해석되면서 인기를 끌었어. 그러다 거기에 디자이너도 붙고 하면서 The 7 Line이란 브랜드가 됐지.”
대화를 듣고만 있던 드로이넨이 끼어들었다.
“그럼 쟤들이 그 회사원이란 말이야?”
“그건 아니고 시작이 그랬다는 거야. 지금은 누구나 지역 등에 상관없이 가입할 수 있어. 브랜드 네임 뒤에 Army를 붙여 활동하지. 브랜드는 후원자의 역할도 하고 응원 기획을 해. 메츠 굿즈나 의류를 만들지만, 메이저리그에 새로운 응원문화를 도입하는 선구자가 되어버린 거야.”
그와는 별로 대화를 안 해봐서 이렇게 박식한 줄은 몰랐다.
무엇을 좀 알고 나서 다시 보니까 좀 다르게 보인다. 오렌지색 응원 티셔츠를 입고 같은 색의 응원 막대기를 두들기면서 응원하는 모습이 과거 내가 갈 뻔한 어떤 항구도시의 팬들을 생각나게 한다.
‘만약에 내가 거기 갔으면 지금쯤···’
적어도 지금 처지 같지 않을 거라는 건 확실하다. 난 단기간에 부와 명예를 얻어냈다. 기회가 주어졌고 그걸 놓치지 않았다.
‘흐흣. 5년 6천만 불이면 FA에 마음 조이지 않아도 되고, 올 시즌 이 정도 기록이라면 훗날 명예의 전당에 갈지도 모르지. 훗날? 당장은···’
사이영 상을 잊고 있었다. 올 시즌 내 최종 성적은 198이닝 17승 4패 ERA 1.68이다. 보통 때 같으면 가볍게 수상이 가능한 성적인데 올해 보통이 아닌 인간이 하나 있었다. 퍼펙트 한 게임으로 넘을 수 있는 벽이 아니었다.
카디널스의 잭 플라티니란 투수가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 그의 수상이 거의 확실시 되었기에 거의 반강제적으로 난 마음을 비울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아니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이제 가능성이···’
그런데 이제 새로운 임펙트가 생겼다. 한 게임이 아니라 두 게임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에 유일한 대기록이다. 급이 달라졌다. 상황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란 기대감이 솔솔 올라온다.
“저기 마크. 혹시 잭 플라티니 올 시즌 최종 성적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
휴대폰이 있다면 검색해 보면 간단한데 덕아웃에 가져올 수 없는 물건이다. 대충은 아는데 지금은 대충이 아니라 정확한 기록을 알아야 했다. 당장의 궁금함을 경기 끝날 때까지 도저히 참을 자신이 없다. 박식한 드로이넨이라면 알 것 같았다.
“하핫. 너도 슬슬 사이영 상에 관심이 생기나 보지?”
“굳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이렇게 대답을 하려니 좀 멋쩍기는 하다.
“22승 5패 ERA 1.88로 끝냈지. 총 투구 이닝은 212이닝.”
역시 드로이넨은 알고 있었다.
“네 생각엔 내 성적이 경쟁력이 있을까?”
무게추가 쏠릴 방향이 확실한 내 생각보다는 객관적 의견을 들어 보고 싶었다.
“소르카. 당신 생각은 어때? So가 사이영 상을 탈 수 있을까?”
‘그냥 말해주면 되지. 뭘 또 다른 사람에게 되묻고 그러는 거야? 괜히 부끄럽게···’
“내 성적하고 비교되어서 짜증 나. 말해주기 싫은데··· 하핫. 답이야 뻔하지 않아? 누가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가 내 답이야.”
소르카는 웃는 얼굴이긴 한데, 농담이 농담처럼 들리지가 않는다.
“오호! 우리 1선발께서 자존심이 좀 상하셨나 보군요.”
“내년에 다시 질문 부탁해. 그때는 확실하게 대답해 줄 테니··· 마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So의 수상 가능성이 있을까?”
“제게 투표권이 있다면 So에게 1위 표를 주고 싶긴 하지요. 그런데 기자 양반들은 보수적인 경향이 강해서 아무리 퍼펙트 2회라는 임펙트가 강해도 1위 표를 많이 받기는 어렵지 않을까란 게 솔직한 생각이에요.”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답이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많이 아쉽긴 하다.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잖아. 받아본들 뭐가 크게 달라지겠어. 실속은 다 챙겼고 그다지··· 1위가 아니라면 2, 3위 표라도 좀 나오겠지?’
신포도는 맛이 없겠지만 난 신맛도 좋아한다.
“과거 2015시즌인가에 잭 그레인키가 222이닝 19승 3패 ERA 1.66을 기록했지. 이건 역대로 따져도 어떤 투수의 커리어 하이 시즌에 비교하더라도 꿀리지 않는 성적이야. 퍼펙트나 노히트는 없었지만 45와 2/3 이닝 무실점이라는 임펙트도 있었어.”
‘정말 오지게 잘 던졌네. 그런데 그게 왜?’
느닷없이 그레인키 이야기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이영 상을 받지는 못했지.”
“기억나는군. 그 해 사이영 상을 받은 건 아리에타였었어. 아마 그레인키가 역대 2위 중 최고 성적이 아닐까 싶어.”
마크의 말에 소르카도 동조를 했다.
“그 시즌 아리에타도 대단하긴 했어. 214이닝 22승 6패에 ERA 1.77이었으니. So. 수상 가능성은 있어. 하지만 혹시 못 받게 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는 마. 그레인키도 커리어 하이 시즌에는 그렇게 되었지만, 그의 커리어 중에 사이영 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구.”
메이저리그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자기 자리를 만들어 낸 투수들답게 굉장히 공감이 되는 말을 해준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빅리그에 적응해 가면서 난 어느 순간부터 굉장히 수동적이 되었거든. 이번 시즌에 새롭게 느끼는 게 좀 많았지. 이모저모로 괜찮은 시즌이었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닌 것 같네.”
소르카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웬 고해성사 같은 말을 하는 거야?’
드로이넨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전혀 엉뚱한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들의 시선은 이제 그라운드를 향해 있었다.
‘뭘 그렇게 진지하게··· 아! 그렇지. 우리 게임 중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