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누가 갑일까?
“고. 왜 아직까지 정리를 안 하고··· 무슨 일이에요?”
마일리의 뾰족한 음성이 예고 없이 열린 사무실 문과 함께 고 감독에게 밀어닥쳤다. 고 감독은 숙소로 쓰는 이 층으로 퇴근했다 다시 내려와 사무실에서 오늘 경기 분석을 하면서 계속 소영수에게 통화를 시도 중이었다.
마일리에게 사무실에 잊은 것이 있어 잠시 다녀온다고 하고 왔었는데 의식하지 못한 사이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 것 같았다. 사실 가슴이 떨려 집에서 편안히 쉴 수가 없었다. 오늘 일어난 엄청난 일들은 그에게도 충격적이었다.
“So. 이 자식이 전화를 안 받잖아. 메세지를 보냈는데 읽지도 않고···”
마일리에게 이게 변명이 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밀어붙였다.
“피곤해서 일찍 잠들었겠죠. 오늘이 So의 공식 경기 중에서 투구 수가 제일 많았잖아요. 100구를 넘긴 경기가 처음이었는데 많이 피곤했을 거예요. 그리고 기록 문제도 있고 정신 소모가 평소 등판의 배는 되지 않았을까요?”
다행히 통했다. 마일리의 그 생각은 고 감독도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무엇인지 모르게 많이 찜찜했다.
오늘 경기 중계를 보면서부터 너무 이상했었다. 소영수는 분명히 7회쯤 집중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 허깨비처럼 보일 지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만들어 냈다.
“오늘 경기가 너무 이상해서··· 억지로 이해를 해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하겠어. 분석을 다시 해봐도 모르겠어. 분명히 무슨 문제가 있었는데··· 지금 통화를 꼭 해보고 싶어서···”
마일리에게 논리적으로 이해를 구해보려 했지만, 스스로도 그렇게 납득되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So가 애는 아니잖아요. 그는 프로 선수지 이제 학생이 아니에요. 그가 밝히려고 하지 않는 부분까지 고가 관여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는 안 돼요. 그건 그가 알아서 해야 하는 몫이겠지요. 뭘 그렇게 모든 걸 관리 감독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게··· 그건 당신 말이 맞는데··· 너무 그렇게 딱 잘라서 공사 구분을 하기에는 나와 그의 관계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지만 신경 쓸 대상이 이젠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마일리의 눈짓 한 번에 고 감독은 손에서 전화기를 떨어트릴 뻔했다.
“어··· 이대로는··· 전화 몇 번만 더해보고··· 이대로는 잠이 안 올 것 같아. 당신은 내일 재계약 논의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바쁠 거잖아. 일찍 쉬어야지.”
“적당히 하고 빨리 와요.”
“으응. 금방 갈게.”
고 감독은 얼렁뚱땅 마일리를 다시 돌려보내고 마치 큰일이라도 치른 것처럼 두근대는 가슴을 억눌렀다.
“아! 이 자식은 요즘 빠져 가지고, 다음 경기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소영수는 선발 투수로 한 시즌을 잘 치러냈다. 물론 올해 다음 등판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야구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기세를 탄 자이언츠가 다음 상대를 이겨낼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야구다.
“에잇, 전화 좀 받아.”
오늘은 분명히 소영수에게 아주 일진이 좋은 날이었다.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 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마음이 드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고 감독은 계속 전화기의 통화 버튼을 눌러 대고 있었다.
“나도 정말 모르겠어. 내가 왜 이러는 건지···”
***
인터뷰는 자정이 지나서 끝났다. 상대는 벨트라인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마구 펀치를 휘둘렀다. 선을 계속 넘나들었다.
아마 3년 전 어수룩했던 자신이었다면 견뎌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젠 나도 제법 세상을 겪었다. 그래서 마지막엔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악수로 마무리를 깔끔히 할 만큼의 경험과 여유를 가졌다.
“이 정도면 만족하세요?”
“그게···”
아버지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이제야 내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드시는 건가? 어휴! 그걸 따져서 뭐 하겠어. 끝났으면 끝난 거지.’
인터뷰를 가장한 난투극으로 어지러웠던 시간은 지났고 기자들은 다 돌려보냈다. 아버지가 그와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 이어가든 여기에서 단절을 하든지 이제부터는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다. 내 할 도리는 했다고 생각한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예요. 이번 일은 특별한 경우였으니까.”
이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지만,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도 네 엄마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말을··· 아니다. 애썼다. 다 내가 못나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텐데도 아버지는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뭐 그렇다구요. 그렇게 자책하실 거 없어요.”
이제 현실을 생각해야 할 시간이다. 아버지의 거취를 임시방편이지만 정리해 둬야 한다.
“고 감독님 아시죠.”
“너 대학 때 감독하던 그 양반?”
어찌 되었든 이제부터 내가 아버지를 모셔야 할 텐데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예. 그분이 샌프란시스코에 계세요. 제 에이전트 일도 하시고 다른 것도 이것저것 도와주시죠. 당분간 거기 좀 가 계셔야 할 것 같아요. 저 아직 호텔에 살아서 집이 없어요. 그리고 당장 내일부터 다시 게임이 있어서 아직 팀과 떨어져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어요.”
우리 팀은 이미 다음 경기가 치러질 뉴욕으로 이동을 했다. 감독에게 사정을 간단히 이야기하고 난 내일 합류하는 것으로 양해를 받았다.
“오늘은 여기서 쉬시고, 불편하겠지만 내일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당분간 고 감독님과 함께 지내셨으면 해요. 포스트 시즌 마무리되면 다시 만나서 집도 구하고 그러면 될 것 같아요.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어요. 이제 별일 없을 거예요.”
“그게··· 너한테는 할 말이 없구나.”
아버지는 뭔가 더 말씀하시려다 그냥 말문을 닫았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세상에는 해서 안 될 말도 많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어떤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덮을 것은 덮고 거북한 이야기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단 하나의 가족이니까. 오늘은 이산가족 상봉을 이룬 기쁜 날이다.
‘에고, 고 감독에게 연락을 했었어야··· 생각도 못했어.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어서 연락을 하기가··· 아! 시차가 있었지.’
필라델피아는 샌프란시스코보다 3시간이 빠르다. 여긴 자정이 넘어 1시가 되었지만, 그쪽은 아직 밤 10시다. 통화해도 괜찮을 것 같은 시간이다.
“잠시만요. 고 감독님이랑 통화를 좀 할게요.”
인터뷰 때문에 전화기의 진동 기능도 끄고 무음으로 해 놓았는데 지금 보니까 고 감독에게 연락이 아주 많이 왔었다.
‘어이쿠. 이제 전화하면 잔소리 깨나 할 거 같은데···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한 거야. 적당히 좀 하지. 한두 개만 찍혀도 내가 연락 온 거 보게 되면 어련히 안 할까. 이렇게까지 여러 번 할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지금 전화하면 귀가 따갑게 퍼부어댈 게 뻔하지만, 아버지 건 때문이라도 지금 무조건 통화는 해야 할 것 같다. 전화기 기능을 다시 돌리고 발신 버튼을 눌렀다.
“어! 영수냐? 별일 없지?”
너무 뜻밖이다.
‘이거 뭐야? 잘못 걸었나?’
욕부터 한 바가지 먹을 각오를 했는데 말이 너무 부드럽게 나온다. 별일은 저쪽에 있는 것 같다.
“아! 예. 별일은 없었는데 아버지가 오셨어요.”
“뭐라고? 그 양반이 어떻게···”
“이야기가 좀 길어요.”
“그 긴 이야기 자세히 좀 해봐. 나 시간 많다.”
과거부터 고 감독은 털털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세심한 면이 많았다. 본인이 궁금하면 시시콜콜하게 다 따져 묻는다. 거기에 일일이 답하다가 머리가 쪼개질 뻔했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별로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서 대충 이야기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역시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묻기 시작했다.
“그랬단 말이지. 팀에는 뭐라고 했어?”
“한국에서 아버지가 오셨다고 했죠. 아니 먼저 알고 있었어요. 기자란 사람이 클러비를 통해서 연락을 했거든요. 그가 보고를 했었나 봐요. 맞냐고 묻길래 오신 거 맞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래서라뇨. 아버지 만난다는데 구단이 뭐라고 하겠어요. 좋은 시간 보내라고 하더라구요. 내일 이동하겠다고 했더니 직원 하나 남겨두고 뉴욕으로 갔어요. 선발 투수가 현지에서 합류하는 일이 별로 드문 일도 아니고··· 그 정도 편의를 봐주는 거야 당연하죠.”
사실은 이번 시리즈에 등판하지도 않는 내가 팀이 게임 준비에 정신없는데 일을 보태 더 복잡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한테는 왜 이제야 연락하는 거야? 바로 연락을 했으면···”
“아버지 만나는 일까지 에이전트 허락이 있어야 하는 거예요?”
이건 고 감독이 많이 오버하는 것 같다. 공식적으로 갑은 나고 에이전트는 을이다. 그런 건 의무 사항이 아니고 선택 사항이다.
“음. 그건 아니다만··· 그럼 인터뷰했다는 건 뭐냐?”
“처음엔 기자인 줄 몰랐죠. 그냥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길래 아버지 지인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만나고 보니까 아버지가 미국 오시기까지 좀 복잡한 사정이 있었더라구요. 그래서 이모저모로 생각해보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끌어들이는 것보다 단순하게 처리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별다른 일은 없었고 마지막엔 웃으면서 헤어졌어요.”
“언론 인터뷰 같은 건 구단 허락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거야 형식적인 거죠. 선수가 하겠다는데 안 된다고 막는 구단이 어디 있겠어요. 아주 특별한 사정이라면 모르겠지만, 사실은 선수가 말하기 곤란할 때 써먹는 방패막이 같은 거라는 건 잘 아시잖아요.”
뭘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일이 있었고 복잡해질 것 같아 단순하게 처리했다. 만약 복잡해지면 그때가 그들이 나서야 할 때다. 그렇게 처리하면 된다.
‘사람이 미래를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어. 예기치 않은 일은 늘 생기는데 어떻게 그걸 조심조심 다 피해 가냐구. 그런 소극적인 생활 태도 자체가 스트레스야.’
이제는 웬만한 일로 넘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에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미리 나서려고 하는 건 많이 오버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고 감독이 나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공식적인 관계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지금 대화는 공사 중 사에 속하는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이해하고 넘어가는 거다.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지금 아직 제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아버지하고 계속 같이 있을 수도 없고 그래서 아버지 먼저 내일 샌프란시스코로 가셨으면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그거야 당연히 해야지. 내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일단 내일···”
고 감독과 이야기는 잘 끝났다. 많이 고맙다. 서로 기본적인 신뢰가 있다는 건 언제나 마음 든든하다.
이래저래 걱정이 많으신 아버지를 달래가며 방을 하나 더 열고 하다 보니까 이젠 새벽이다. 좋고도 복잡했던 아주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