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호사다마는 상식이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해. 깨끗하게 끝내라구.”
“주님이 벌을 내리시는 거야. 멍청한 필리스 놈들에게.”
“병신들 죽어 버려라.”
조금씩 악다구니 쓰는 관중들이 다시 나타났지만, 그들이 외침이 나로서 무슨 뜻인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내용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지러웠는데 뜻을 생각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멍해진다.
‘아! 베그웰. 싱커 아웃코스 낮게. 좋아.’
이게 복잡하지 않고 제일 좋다. 베그웰이라는 등불이 내 길을 비추어 준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어? 내가 이런 말을 어떻게 알았지? 어릴 때 주말 성경학교에서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이게 아마 무엇인가를 나누라는 뜻 아니었나?’
지금 내가 필리스에게 줄 수 있는 건 야구공뿐이다.
다시 싱커, 싱커 더 낮게, 하이 패스트볼.
주심이 뭐라고 외치는 것 같은데 그 소리는 관중의 맹렬한 함성과 박수에 묻혀버렸다.
‘왜 이러는 거야? 다들 미친 거야? 아! 정말 모를 일이네.’
다시 사방이 고요해지고 못 보던 얼굴이 타석에 서 있다.
‘쟨 또 누구야.’
뭔가를 생각하려고 하니까 또 머리가 아파온다. 이럴 땐 베그웰을 보면 된다. 그가 나의 구원이고 희망이다.
‘싱커? 좋아. 굴리면 되지.’
틱-
“파울.”
타구가 앞으로 뻗어 나가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야! 이 타자 놈아. 똑바로 안 칠래. 하나면 끝날 일을 사람 귀찮게 여러 번 던지게 하면 어쩌냐. 빨리 끝내자.’
틱-
‘이놈이 그래도···’
다시 파울이다. 하이 패스트볼을 던졌는데도 배트가 따라붙는다. 제법 치는 놈이다.
‘그래. 딱 좋아. 바로 이거지.’
베그웰의 볼 배합은 언제나 마음에 든다. 귀찮게 달라붙을 땐 못 치게 하면 된다.
부드럽게 던져진 나의 커브는 두둥실 떠올랐다. 타자의 배트가 미처 따라붙지 못하고 허공을 가른다.
구장이 떠나가라 울려 퍼지는 함성 속에 주심의 콜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요란한 몸짓이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내 커브는 솟는다구. 내 인생도 상향이야. 으아악!”
폭발해버렸다. 마음껏 외치고 싶었다. 우리 팀 선수들이 달려온다. 이 난리가 난 걸 보니 이겼나 보다.
“아··· 윽! 뭐···”
선수들의 동작이 너무 과격하다.
‘바디프레스에 이은 버스터. 그래도 살살하네. 역시 레슬링 기술은 쇼맨십이··· 악! 관절기는 안 돼.’
다행히 팔을 건드리던 손이 머리로 간다. 헤드락도 싫다.
‘그래도 이겼다는데 이 정도는 봐줘야지. 야! 이··· 여기서 F가 왜 나와. 너 목소리 기억했다. 이거 풀리면···’
아무래도 이 와중에 필리스 악성팬 하나가 난입한 것 같다. 우리 팀의 착한 꼬맹이가 나를 향해 그런 상스러운 표현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
땀내 나는 거구들에게 깔렸지만, 마음은 편안하다. 역시 승리는 만병통치약이다.
‘어? 뭔가를 잊은 것 같은데···’
분위기에 어울리고 싶지만 묘하게 거슬리는 무엇인가 있다.
“악! 아빠. 이것 좀 치워봐. 나 가야 해. 가야 한다구.”
고함을 지르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짐승 같은 거구들에 깔린 몸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우아아! 존경해. 존경한다고 넌 신이야.”
“holy sxxx. 로드. 저의 충성은···”
“병신. 마스터라니까.”
지랄도 풍년이다.
***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그렇지. 그냥 그럭저럭···”
아버지와의 만남은 우리 선수단이 숙소로 쓰는 호텔에서 이루어졌다.
만나면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다. 너무 어색하다.
‘전에도 내가 이런 식으로 말을 했었나? 존댓말을 안 썼던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나이 서른 먹어서 아빠니 이런 건 좀···’
원래 우리 아버지란 양반은 밝고 명랑한··· 추억보정인 것 같다.
‘내성적이지만 호들갑스럽게 보이는 분이었지.’
앞뒤가 맞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이 그랬다. 밖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도 잘하고 엉뚱한 유머 감각으로 밝음을 발산했다면 집에서는 무관심과 소심함이 범벅이 된 캐릭터였다.
‘나중에 누구한테 들으니까 성공한 아내를 둔 남편들이 잘못 풀리면 대개 그렇게 된다고 하던데···’
이거 의사에게 들은 이야기라서 틀림없을 거다. 내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그런 사람이 있다.
“부자 상봉이 너무 밋밋한 것 같습니다.”
‘동감이에요. 아마 당신이 없었다면 좀 더 나았을 것 같네요.’
아버지를 미국으로 모시고 온 기자란 사람이다. 기자는 쳐다보기도 싫었지만, 상황이 그를 마냥 멀리하기 어려운 쪽으로 흐르고 말았다. 아버지가 아주 고마운 사람이라며 편의를 봐줘야 한다고 얼마나 우겨대는지. 이런 어색한 자리는 질색이지만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최 기자 동생이 힘써줘서 오늘 이런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어. 정말 신세를 많이 졌네. 자네 입장이 곤란하지 않으려면 뭘 해주면 될까?”
‘아버지. 저기요. 그건 본인이 아닌 제가 뭘 해줘야 할 거 같은데 그러면 저한테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미치겠네. 저 기자란 작자가 뭘 어떻게 했길래 이러는 거야.’
아버지가 미국에 올 때까지 법률적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좀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서 도움을 많이 받았단다. 처음엔 개인적 친분 관계로 작은 도움을 받았다는데 일이 점점 커져서 최 기자라는 저 사람의 주선으로 신문사의 지원을 받고···
뭐 그렇고 그런 내막이 훤히 보이는 스토리에 코가 꿰였다. 정말 가족 일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조용히 살고 싶은데 세상이 날 내버려두지를 않는다.
“영수야. 사람이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으면 갚지는 못해도 갚는 시늉은 해야 하는 거잖니. 동생이 중간에 애를 많이 썼어. 네 허락도 없이 이런 자리를 만들어 미안하다만, 그땐 방법이 없었어. 너무 부끄럽고 구차한 이야기를 하려니···”
“별로 좋지도 않을 것 같은데 다 지난 이야기를 굳이 왜 하려고 그래요. 저 안 들어도 돼요.”
정말 미치겠다.
“세상사에 공짜가 어디 있겠니. 개인은 몰라도 회사 지원이란 게 그냥 말로만 고맙다고 해서 정리될 일이 아니잖아. 일이 되게 중간에서 애써준 최 기자 동생이 회사에서 면 상하지 않게 니가 좀 도와다오.”
너무나도 이르게 하시는 부탁 말씀에 뭐라고 대답할 말을 못 찾겠다. 순서가 아주 많이 잘못되었다. 당신께서 일을 다 벌여 놓고 나더러 수습하라 하신다.
‘원래 이런 양반이었지. 세상 모든 사람에게 호인이라고 불리면서 가족은 당연히 자기 입장을 세우기 위해 손해 봐도 문제없고···’
본인 뜻대로 일이 안 되면 소심하게 삐져서 말도 잘 안 하고 그랬었다. 맨날 그 뒤 봐주느라고 엄마가 머리를 깨나 썩였다. 어릴 때는 엄마에게 늘 구박당하는 이런 아빠가 불쌍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는데 나도 세상사를 좀 겪어보니까 단순히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어휴! 엄마 다음엔 내 차례인가?’
아버지를 다시 만난 지 채 한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효자 되기는 틀린 모양이다.
“이런 말씀은 예의에 어긋날지도 모르겠지만, 신문사나 최 기자님 개인이 금전적으로 손해 보신 것이 있다면 제가 다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여러 가지로 부담을 가지시는 것 같은데 많이 거북합니다. 제가 어떻게 보상을 해드리면 될까요?”
이제 나 돈 많다. 까짓거 물어주고 만다.
“그게··· 허헛. 상당히 직설적이시네요. 그렇게 물어보시니까 저도 하나 물어보죠. 요 앞 세븐 일레븐에서 파는 콜라와 북한산 꼭대기에서 파는 콜라가 같은 물건일까요?”
“음.”
“가령 과거 신문사가 1의 재화를 소모했다고 해서 지금 1을 갚는다면 그게 합당한 일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묘하게 말을 이끌어간다.
‘같은 콜라라도 다 같은 콜라가 아니다? 말로 먹고사는 놈이라서 그런지 말발은 좋네.’
“신문사가 대부 업체는 아니지 않습니까. 준다고 받을 생각이 있을 리가 없겠죠, 신문사는 취재비.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당신과의 인터뷰를 위해서 그 비용을 지출한 겁니다. 그건 단독기사 혹은 특종이라고 불릴 겁니다. 콜라값이 달라졌어요. 장소와 시기가 다르니까요.”
“그건 이해했습니다. 그쪽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럼 오늘 이 자리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건가요?”
차라리 이런 게 낫다. 핵심도 없이 말을 빙빙 돌리는 건 질색이다.
“일단은 그렇고 추후에 오늘 하신 말씀을 번복하셔서 기사 내용에 대한 공신력을 떨어뜨리는 행동만 피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모든 것은 정리되고 이 과정을 주선한 제 면을 세워 주시는 게 되는 겁니다.”
“그건 그렇게 하지요.”
이런 걸로 긴말하기 싫었다.
“그럼 그 말씀 믿겠습니다. 물론 오늘 인터뷰? 대담? 무엇이라고 불리든 오늘 이 자리에서 하시는 말씀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아버지를 도와주신 일은 경위를 떠나서 감사드립니다.”
서로 좋은 거래였다.
‘최 기자란 이 양반 보기보다 깔끔하네. 그 정도면 괜찮네. 뭐! 인터뷰 정도야 한번 해주지.’
흘깃 돌아보니 아버지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거면 된다.
‘오늘 밤이 좀 길 것 같긴 하지만 아무려면 어떻겠어.’
좋은 날이다. 아버지를 다시 만났고 퍼펙트를 다시 해냈다. 한 경기 20탈삼진 정도의 기록은 부스러기로 보일 지경이다. 후원 재계약을 생각하면 그냥 웃음이 나온다. 그래서인지 별로 피곤하지도 않다. 말로만 듣던 인생의 꽃길이 펼쳐졌다.
‘조금 불편한 일 정도야 있을 수 있지. 정리해야 하는 일이라면 한 번에··· 나중에 딴말하기만 해봐라.’
이미 내 핸드폰 녹음 기능을 켜둔 상태다. 나도 아무 생각 없이 살지는 않는다.
3전 2선승제의 플레이오프가 바로 이어서 있지만 여기서 내 등판은 없다. 포스트 시즌이라고 무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아까 감독이 말해줬다. 등판 간격을 철저히 지켜주겠단다. 프런트가 꼭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나도 이 상황에서 억지로 몸부림친다고 더 위로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4일 쉬고 나면 올해 내 등판이 더 있을지 없을지가 결정 나겠네. 이길 수 있을까? 소르카도 못 던지는데··· 애덤, 로저스, 드로이넨으로 가능할까?’
안타깝지만 다가온 플레이오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잘 쉬면서 응원하는 일밖에 없다. 다만, 적은 확률이지만 만약 이 고비를 넘길 수 있다면 디비전 시리즈에서 한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은 든다.
“그럼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빨리 끝내고 싶다. 어서 과거와 단절하고 싶다.
“예.”
사진 기자가 한 명 더 들어오고 앞 테이블에서 녹음 장치로 보이는 것이 돌아간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서 좀 긴장이 된다.
‘남들도 다 하는 건데 별걸 다···’
“예전 이야기를 좀 해보죠. 입시 사건이 터졌을 당시 국민적 비난 여론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어떤 마음이 들던가요?”
처음부터 너무 센 걸 묻는다. 단단히 작정한 것 같다.
“그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