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75화 (75/200)

75화. 비몽사몽(非夢似夢)

2:0의 스코어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제 7회다.

게임 시작 때부터 맹렬하게 퍼부어지던 관중석의 악다구니는 이제 띄엄띄엄한 목쉰 소리 몇몇만 남았다. 관중의 대부분은 탄식을 내뱉을 뿐이다. 가끔 그 사이를 가르는 찢어지는 목소리가 마치 죽어가는 야수의 비명처럼 느껴진다.

‘기묘한 앙상블이네. 무심한 척했지만 나도 사람인데 어떻게 영향이 없었겠어.’

그냥 참았다. 언제부터인가 난 무작정 맷집을 단련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것으로 상대를 질리게 만들었다. 속이 다 시원하다. 소중한 걸 배웠다. 몇 대 맞았다고 엉겨 붙어 같이 때려야만 마음이 풀리는 것은 아닌가 보다.

‘참고 또 참으면 좋아지는 때가 온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뭐였지? 이럴 때 그런 말을 팍 쓰면 폼이 좀 날 텐데 아쉽게 떠오르질 않네.’

청춘의 한때를 박제 당한 채 비룡이의 활약을 지식의 보고 삼아 지냈던 날들은 이토록 머리에 생생하게 남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세부내용이 산산이 흩어져버렸다.

‘추억한다거나 혹은 그립다. 그런 뜻은 절대로 아니야. 그냥 그런 기억이 있다고. 누가 그 짓을 또 하고 싶겠어. 아! 뭐였지? 고주망태? 이건 절대로 아니고···’

고로 시작되는 말은 그것과 고 감독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 급한 것부터 처리하고···’

“스트라익.”

지금 이 타자가 딱 21명째였다. 현재까지 기록은 무안타, 무볼넷, 무에러. 삼진 15개다.

‘투구 수가 좀 많아지긴 했네. 오늘 던지면 마지막인데 좀 많이 던질 수도 있는 거지. 어짜피 오늘 이겨야 플레이오프도 있는 거잖아.’

어제 역전 당한 경기의 충격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다. 내가 끝내지 않고 중간에 내려가면 그 일이 또 반복될 것 같은 불안감이 있다. 오늘은 절대로 안 된다. 지금 84구를 던졌지만, 내 한계 투구 수를 110개 정도로 본다면 충분히 완투가 가능할 것 같다.

‘가능은 무슨··· 무조건 던져야지.’

그런데도 감독은 투구 수 90개 이후 출루를 내주면 무조건 내리겠단다. 처음으로 거부했다. 감독은 절대로 안 된다며 완강히 고개를 저었고 그의 표정에서 모든 사정을 알아차렸다.

‘잠시 잊었어. 여기서는 감독도 일개 계약직 급여생활자란 걸.’

그냥 구단의 높으신 분께서 내 건강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기로 했다. 거부해 봐야 받아들여질 사안이 아니었다. 그런 관계에서 우리 감독은 생각보다 힘이 없다.

‘이런 순간을 가질 수 있는 투수가 된 것만으로도 아주 행복한 거지. 그럼.’

오늘 이 경기를 이길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방금 전 타자 마르쿠스는 생각보다 쉽게 범타 처리를 할 수 있었다. 이래서 자라나는 새싹은 기를 쓰고 밟아놓아야 한다.

‘눈에 힘주면 뭐 하냐고. 공을 눈으로 칠 수도 없는데···’

그의 평정심을 깨버린 효과가 한 타석 뒤에 나타났다. 이래서 야구는 멘탈게임이다. 내가 장담한다. 다음 시즌에도 마르쿠스는 나에게 힘 못 쓸 거다.

‘그런 허접한 놈 생각은 그만하고, 이놈이 아까 타석에서 내 기록을 깬 놈이었지.’

별생각 없이 사인만 보고 던져 원 스트라이크를 잘 잡았는데 문득 생각이 났다. 이놈이 아까 그놈이 맞다.

‘아까는 많이 아쉬웠지. 지금은 별로···’

그때는 맞고 지금은 아니다. 그런 아쉬움을 계속 가져가기엔 오늘 남은 것이 너무 많다.

‘한 게임 최대 탈삼진은 20개. 그 이름도 찬란한 로저 클레멘스, 케리 우드, 랜디 존슨이 가지고 있지. 클레멘스는 그걸 두 번이나 했고···’

오늘 게임에 이 타자를 포함하면 7명이 남아있다. 그들 중 5명을 삼진으로 잡으면 20개로 타이기록. 여섯 명이면 신기록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퍼펙트도 있다. 그건 내게 6천만 달러짜리다. 다시 이사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정신 좀 차려라. 아까 당해놓고 또 헛생각을 하네. 설레발은 뭐라고?’

아무리 마음을 추스르려 애써 봐도 의식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기록이야 마음을 비우고 열심히 던지다 보면 자연히···’

그런 이야기는 어렸을 때 코치들에게 좀 들어봤는데 내가 지금 이 상황이 되니까 다 멍멍이 소리처럼 생각된다.

‘그때 그 코치들은 지들이 못해봐서 그런 말을 했겠지. 그런 상황에 처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말만··· 오지게 떨린다고.’

전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아까까지는 어떻게든 오늘 경기 이기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이번 회에 들어오면서 마구니가 신경을 갉아먹고 있다.

사실 지금 좀 멍하다. 그냥 베그월의 사인만 보고 던지고 있다. 생각이 떠오르고 바뀌는 속도가 평소보다 한 템포가 늦어졌다.

‘오죽하면 타자에게 공 던지고 나서 어떤 타자인지가 생각나겠냐고.’

‘인코스 투심.’

틱-

‘헉.’

타자의 배트에 스친 공이 바로 심판 머리 오른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주심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움츠렸다 펴진다.

‘한 분 가실 뻔했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척하지만 아마 엄청나게 놀랐을 것이다. 진짜 한 방 맞았으면 놀라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스크 위라도 그 충격은 머릿속을 휘저어버린다.

‘비룡이가 쓰는 내가 장공에 맞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는 거지. 그래 격산타우(隔山打牛) 이건 바로 생각이 나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라고 하기도 하고···’

주심을 스치고 뒷그물을 때린 공 때문에 관중들도 많이 놀랐다. 음료를 쏟은 사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 아빠의 모습도 보인다.

‘어? 지금 뭐였지? 아빠? 아버지? 여기서 왜?’

발을 풀었다. 갑자기 울컥해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돌아가지 않던 머리가 이젠 서버렸다. 몇 번을 다시 봐도 분명한 것 같다.

‘어디 있다가··· 여기 어떻게··· 그동안은 왜 못 봤지?’

20초는 너무 짧다. 타임을 걸고 베그웰을 불렀다. 우리 덕아웃뿐만 아니라 필리스의 감독, 코치, 선수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관중석에서 가볍게 시작된 웅성거림이 점점 몸집을 키워나갔다. 내 머릿속도 같이 웅웅거렸다.

“왜 그래? 무슨 문제야?”

뛰듯이 다가온 베그웰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던 의식을 일깨웠다.

“별일 아니야.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잠시 시간 좀 끌어줘.”

정말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 모두가 바로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어디 봐. 많이 불편해?”

“그 정도는 아니야. 감독 이쪽으로 오려고 하는 것 같은데 올 필요 없다고 해.”

감독이 덕아웃 밖으로 나와 서성이는 게 눈에 들어온다. 머리도 안 돌아가는데 이 사람 저 사람 왜 이렇게 번거롭게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말하기도 어렵다.

“눈에 뭐가 들어갔답니다. 양해 좀 부탁드립니다. 금방 끝낼게요.”

베그웰이 주심에게 너스레를 떠는 소리가 들린다. 난 지금 마운드에서 뒤로 돌아 눈을 감고 있다. 감정이 흐르는 대로 마음을 맡기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무엇인가 너무 억울하다.

‘이렇게 멀쩡하게 있었으면서 그동안···’

왠지 모르게 서럽다. 복잡한 감정은 차오르고 경기는 해야 할 것 같고 어지럽지만 하다.

“So. 안약이야. 빨리 넣어서 씻어내.”

회한과 질곡의 소용돌이에 빠지기 전 다행히 베그웰의 목소리가 날 건져냈다.

“으음. 어! 고마···”

“So. 눈 좀 떠봐. 약 넣어야지.”

눈물이 맺혀 사방이 뿌옇게 보인다. 안약이 들어오는 차가운 느낌이 너무 상쾌하다.

안약과 눈물을 흘려내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한결 낫다. 이제야 주변이 좀 눈에 들어왔다. 나오지 말라고 했더니 감독이 기어이 나와 있었다.

“괜찮아요. 이제 잘 보여요.”

잠시 울컥했을 뿐이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고비가 넘어갔다. 다행히 예전 같지 않았다.

“날벌레가 갑자기 날아와서···”

아주 참신한 변명을 했다.

“라이트도 안 켰는데 웬 날벌레야. 필리스는 구장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이런 일이 생겨. 별걸로 다 괴롭히고 있어. 그만하길 다행이네. 투구에 지장 있을 것 같아?”

“아니요.”

내 의지는 확고하다. 여기서 내려갈 순 없다. 아버지야 경기 끝나고 만나면 된다. 여기까지 와 놓고 다시 사라지진 않을 거다. 종잡을 수 없는 분이긴 했지만, 그 정도···

‘하아! 그렇게 상식적인 사람이 아니잖아. 생각을 잘못했나? 지금이라도 저 자리를 찾아가야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럼 부탁하네. 타자들에게도 조심하라고 해야겠네. 더러운 필리스 놈들 이런 걸로···”

말을 번복할 틈도 주지 않고 감독은 투덜거림을 남기고 돌아서 덕아웃으로 향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란 생각이 들고 나서부터 다시 심장이 쿵쾅거린다.

“베그웰 아직 좀 멍하거든. 그냥 사인 한 번만 내. 그대로 던질게. 사실 좀 어지러워. 초점이 잘 안 잡혀서···”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란 생각은 들지만 나도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 알았어. 너무 무리하지는 마. 이상하면 바로 이야기하고.”

역시 베그웰은 최고의 포수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을 텐데도 긴말 없이 넘어가 준다. 뜻이 통해서 다행이다.

멍하니 공이 오면 받아 포수의 미트만 보고 던졌다. 그러다 보니 이닝이 끝나 있었다.

습관처럼 움직여 덕아웃 구석에 앉았다. 빨리 마운드에 오르고 싶다.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잡생각에 지쳐 쓰러질 것 같았다.

다시 나가서 던지고 들어와 앉고 고맙게도 그사이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또 나왔다.

‘이젠 귀도 먹었나?’

너무 조용하다. 간간이 터지던 악다구니조차 들리지 않는다. 시선이 닿는 어느 곳이든 모든 사람이 일어서 있다.

‘아빠 어디?’

갑자기 불안하다. 의식한 뒤로는 늘 보이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다니 무슨 일인가 싶다.

‘키 작은 동양 사람이라 앞 사람에 가려서··· 아! 그렇지. 마운드에선 베그웰을 봐야지. 슬라이더.’

“스트라익.”

‘왜 휘둘렀지? 커브.’

“스트라익.”

‘결정구로 사용하는 업슛을 2구에··· 이런 것도 먹힐까?’

베그웰의 사인을 따라가기가 바쁘다. 이런 유인구에 타자가 왜 자꾸 스윙을 하는지 모르겠다.

‘좀 천천히 해. 헷갈린다고. 하이 패스트볼.’

“배터 아웃.”

느닷없이 삼진콜이 나왔다.

‘볼을 두 개 던졌는데 왜 삼진이지? 아! 몰라. 내가 틀렸겠지 주심이 틀리겠어?’

관중이 난리 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맞나 보다.

“우와아아.”

그동안 들리지 않던 함성과 박수 소리가 구장에 메아리쳤다.

“하나 더.”

“하나 더.”

관중들이 미쳐 버린 것 같다. 뜻 모를 이상한 고함을 지른다.

‘뭐지? 지금 여기가 우리 홈구장이었나? 내가 정신이 없어서 헷갈린 건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생각을 좀 해보려고 했지만, 전혀 집중이 안 된다. 뇌가 굳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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