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74화 (74/200)

74화. 보는 눈이 다르다.

“푸하하하. 해냈어. 해냈다구요. 연속 삼진 11개. 홍보 담당과도 같이 올 걸 그랬나? 구단 홈페이지에다 당장 올려서···”

폴 해리스 자이언츠 야구부문 사장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그도 보고 있을 겁니다. 아주 좋은 일이지만 오늘 더 중요한 일이 남았잖습니까. 폴. 아직 게임은 반도 안 지났어요. 샴페인을 터트리기엔 너무 일러요,”

“하하핫. 역시 내 판단이 맞았어요. So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아주 특별한 느낌을 받았었죠.”

사장의 기분은 하늘에서 내려올 줄을 모른다. 자신이 발탁한 선수의 활약에 흥이 나는 걸 탓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동안 사장의 판단 잘못으로 실패한 사례들이 떠올라 윌리스 단장으로서는 마냥 같이 기뻐하기엔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어떤 야구 전문가라도 찍었던 모든 선수의 포텐이 터지지는 않는다라는 씁쓸한 사실을 위로 삼아 자위했지만, 윌리스 단장은 편안히 같이 웃어주기가 민망했다.

‘우리는 더 위로 갈 수 있을 겁니다. 찬란했던 자이언츠의 영광을 다시 한 번···’

2010, 2012, 2014년 우승을 윌리스는 자이언츠 직원으로 직접 경험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린스컴, 멧 케인, 범가너에 지금 투수진이 비교가 될까요? 마무리였던 브라이언 윌슨의 자리는···”

사장의 페이스에 말렸다고 윌리스는 생각했다. 지금 선수 구성을 그때에 비교하는 자신에게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그리고 일이 년만 더 지나면 비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우린 14시즌 동안 배리 본즈를 보유했었지만, 우승하지 못했었죠. 우리의 우승은 투수진이 완성되었을 때였습니다. 소르카, So, 로저스, 체이스가 말씀하신 그들보다 못할 거라는 생각은 안 드네요. 더군다나 베그웰이 포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너무 솔깃한 말이었다. 상당히 가능성 높은 일이라고 단장도 동의하고 싶었다.

“음.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죠. 이 페이스대로라면···”

사장의 강권으로 이곳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 따라오긴 했지만, 자이언츠 단장 윌리스는 못내 불안한 심정이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자이언츠의 중요 경기를 직관하지 않았다. 아마 그 영광의 시절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윌. 프론트 책임자가 징크스라니 좀 웃기지 않아요? 세상에 자기 팀 경기를 안 보는 단장이 어디 있답니까? 오늘 그 징크스는 깨질 겁니다. 저한테 감사하세요. 오늘 So의 컨디션으로 봐서는 도저히 맞을 것 같지가 않잖아요. 우리 타선도 잘해주고 있고···”

“그건 그렇긴 한데···”

윌리스는 아직도 자신이 이 경기를 직접 보고 있는 게 잘하는 짓인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왠지 많이 찝찝하다. 내외야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VIP룸은 쾌적하고도 답답했다.

“그 징크스가 포스트 시즌 경기를 보면서 시작되었다면서요?”

“시작은 그랬었죠.”

잊었다 생각한 현장에서 느끼는 흥분에 대한 기억이 오늘 이 순간 윌리스에게 조금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오늘은 포스트 시즌 경기가 아니니까 상관없잖아요. 처음엔 포스트 시즌 직관만 안 하다가 지금은 웬만큼 중요한 경기는 다 안 본다면서요. 그러다 아예 한 게임도 못 보게 되는 날이 오게 되면 어쩌려구요.”

단장도 그동안 보고 싶었다.

“그게 내가 보면 자꾸 지니까···”

“그러니까 이길 경기를 보자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린 절대로 안 져요. 왜냐하면 우리 투수는 무적이니까.”

“그런 판단은 아직 좀···”

조심스런 의견을 내기는 했지만, 윌리스도 So가 오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다. 12명의 타자를 상대해 삼진 11개를 잡아낸 투수를 염려한다면 세상이 걱정 안 될 선수가 없을 것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사실은 우리 팀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게임인 것 같아서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우린 이번 시즌 팀의 코어를 만들었어요. 오랜 기간 바라오던 일의 윤곽이 전 시즌에 걸쳐 조금씩 나타났었죠. 그 결정판이 이전 게임과 지금 이 게임인 것 같아요.”

사장이 진짜 내심을 슬쩍 내보였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그 말이 맞다고 윌리스도 내심 동의했다.

“저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내년엔 리빌딩과 윈나우가 동시에 이뤄질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올 시즌은 신참들의 약진을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그동안 팀의 기둥 역할을 해주었던 소르카의 계약이 4년이 더 남았고 팀 타선의 중심인 레블론과 필도 계약 기간이 차려면 아직 멀었다. 현재 전력의 누수는 앞으로 몇 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에 신예들까지 더해지면···

“So라는 절대적 에이스 역할을 해줄 수 있는 투수가 생겼죠. 로저스와 체이스는 생각대로 잘 자라 주었고 근래 들어 베리웰과 알버트까지 터졌죠. 내년에 우리 일 한번 내보자구요.”

“아직 올해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너무 먼 이야기를 하시는 것 아닌가요? 당장 오늘 이기면 플레이오프 확정인데···”

“저도 희망과 현실은 구별합니다. 오늘 이기겠죠. 다음 플레이오프는 힘들겠지만 어쩌면 이길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마도 그 정도까지가 현실적으로 바랄 수 있는 최대 기대치가 아닐까 합니다. 아직은 우리 전력이 그 이상을 바라기에는 약하잖아요.”

사장은 단정 짓지 않았지만, 올해는 여기까지로 만족한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내비쳤다.

“이번 스토브 리그 때 우리 신예들을 연장 계약으로 다 묶어 버리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어렵겠지요. 하지만 최대한 노력은 해볼 생각입니다. 안 된다고 하더라도 서비스 타임이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그것에 대해서는 윌리스 단장도 이견이 없었다.

“아마 So와 베그웰은 나이가 있으니까 연장 계약을 반길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린 친구들은 좀 기다렸다 자신의 가치 판단을 시장에 맡겨보고 싶을 겁니다. 일단 에이전트들이 그렇게 순순히 따르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올해까지만 쓰기로 마음먹으신 겁니까?”

“체이스의 페이스가 생각보다 빨리 올라왔네요. 굳이 비싼 돈 주면서 연장 옵션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그 돈은 우리 신참들 잡을 밑자금에 보태야겠죠.”

세부 사항은 좀 더 다듬어야겠지만 단장으로서도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는 조금 부족하다.

“타자 보강은 어쩌실 겁니까?”

“탐나는 친구들은 있는데 FA로 데려오기엔 너무 비싸서···”

“그렇다면···”

사장과 단장에게 오늘 게임은 더 이상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

“Oh. My Lord. 이리로··· 자리가 너무 누추합니다.”

로저스가 맛이 가버렸다. 내가 늘 앉던 덕아웃의 자리에는 두 겹 수건이 깔려 있고 옆에서 부채질이라도 해줄 자세로 수건을 들고 머리를 숙인다.

“그래. 내가 이제 시종을 하나 거느릴 때가 되었지. 내 오늘을 기념하여 로저스를 종자로 임명하노라.”

장난에는 장난으로 받아줘야 한다.

“야! 로저스. 용어가 너무 낡은 티가 나잖아. 로드가 뭐냐? So에게는 그런 건 안 어울려. 그렇지 않습니까? 마스터.”

이제는 체이스까지 난리를 친다. 이 둘이 우리 투수들 중 가장 어리다.

“오호라. 체이스. 어쩐 일로 이렇게 내게 친숙하게 구는 거요? 평소에는 본체만체하더니···”

“그동안 제가 눈이 어두워 밝음이 있어도 그것을 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시원한 넥타르를 준비했습니다. 일단 한 잔 드시지요.”

‘넥타르는 개뿔.’

그냥 생수다. 그래도 준비한 성의가 가상해 한 모금 마셔줬다.

“오, 그대가 로저스보다는 박식한 것 같구려. 넥타르라는 고급 용어를 아는 걸로 봐서는 고전 깨나 읽었나 보오.”

“그리스 로마 신화 정도는 초딩 때 누구나 다 읽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로저스는 안 읽었겠지만.”

그들의 사생활은 모르지만, 로저스는 한눈에 봐도 독서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야! 야구 선구가 야구 잘하면 되지. 책 볼 시간이 어디 있어. 내가 어릴 때는···”

애들하고 노니까 나름 재미있다.

“로저스 같이 수준 떨어지는 애를 가까이하시면 품위가 같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구려. 그럼 체이스도 종자로··· 크큭. 아니지. 수석 종자로 임명하겠소. 로저스는 앞으로 체이스의 말을 잘 들으시오.”

“무슨 말을···”

로저스가 발끈한다. 역시 애들은 인내심이 부족하다. 슬슬 농담을 접어야 할 타이밍이 된 것 같다.

“똑바로 안 해? 약속은 약속이잖아. 승부에 졌으면 지킬 건 지켜야지.”

갑자기 왕년의 2선발 산체스 옹의 호통이 터졌다. 그는 몹시 진지한 얼굴이었다. 이 희극을 그냥 재미 삼아 지켜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약속? 승부? 이게 무슨 말이야.’

“하하학. 크크컥.”

웃음을 참지 못한 소르카가 급기야 비명처럼 들리는 정체불명의 소리를 흘렸다,

“다음 회도 알지?”

“으음. 네.”

퉁퉁 부은 모습으로 로저스와 체이스가 반대쪽 구석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 있었어?”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은 소르카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를 물었다.

“크크큭. 그게 말이야···”

4회 투구가 이뤄지는 동안 덕아웃에서 내가 기록 달성을 할 수 있느냐를 두고 투수들 간에 내기가 있었다고 한다.

“오호. 그 녀석들이 아닌 쪽에 걸었단 말이지. 그래서 벌칙 수행하느라 이 호들갑을 떤 거고···”

“아무튼 벌칙 종료는 네가 오늘 등판을 끝낼 때까지야. 걔들 매회 마칠 때마다 수건과 물을 들고 기다릴 거야.”

애덤 산체스가 말을 더하며 한쪽 눈을 찡긋한다.

애덤은 캐빈과 함께 투수조의 최고참이었다. 대하기 사실 좀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불친절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묘한 거리감을 항상 느껴왔었다.

“아! 그렇군요.”

“이런 거 별로 불편하진 않지?”

친하지도 않은 사람의 이런 배려가 오히려 불편하다.

“전혀요, 재미있었어요.”

“열심히 응원할게. 오늘 잘해 봐. 오늘 시원하게 한 번 이겨 보자구.”

“예. 말씀 감사합니다.”

고마운 말이긴 한데 좀 얼떨떨하다. 그들은 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권위를 세워 후배를 이끌려 하지도 않았고 무엇이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갔다.

‘노친네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시즌 끝나면 밥이나 한번 같이 먹자고.”

“그러시죠.”

“그럼 쉬어. 난 이만.”

애덤이 뒤쪽 벤치로 물러났다.

“이거 좀 부러운데···”

소르카가 난데없는 말을 했다.

“뭐가 부럽다는 거야?”

“우리 최고참들이 은퇴를 앞두고 투수조의 리더로 널 밀려고 하는 것 같네. 난 쳐다보지도 않더니··· 이거 소외감이 확 들어.”

‘무슨 생각이라고?’

말이 안 된다.

“설마··· 난 외국인에 프랜차이즈도 아니고 이 팀에 와서 첫 시즌을 치르는 중이라고. 그런 거 하기에는 조건이 너무 아니지 않나?”

“그거야 생각하기 나름이고··· 섭섭하긴 한데 내 성격상 앞에 서고 그런 걸 하기는 힘들지. 그들의 생각에 동의해. 나도 So가 하면 딱 좋을 것 같아. 일단 이 게임 끝나고 나하고도 밥 한번 먹자고.”

기분이 몹시 희한하다. 부끄럽기도 하고 기쁜 것 같기도 하다.

‘이 상황이 아주 즐겁다는 생각이 들면 이상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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