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명(明)과 암(暗)
“심판 뭐 하는 거야. 똑바로 안 봐?”
“비디오··· 비디오 다시 봐야 해.”
“저게 어떻게 파울이야. 눈이··· Fxxx. Sxx ox bxxxx."
관중석이 난장판이 되었다.
‘거 참!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거기 출신이야? 그렇게 출산율 높은 해변이 있었다니··· 우리나라에도 그런 보물 같은 해변이 있어야 하는 건데···’
좀 많이 놀라긴 했던 것 같다. 생각이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앞뒤가 안 맞다니 뇌가 순간적으로 마비되었나 보다.
‘마르쿠스 이놈도 정말 기록으로는 측정이 안 되는 놈이었네.’
조심은 했지만, 자신은 있었다. 어떤 팀이든 그런 타자가 한둘은 있다. 난 대부분의 경우 상대 팀에게 악몽을 안겨주는 가해자의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이건···
‘안타 홈런 안 맞는 투수가 어디 있어. 맞게 되면 맞는 거지. 맞아봐야 1점이잖아.’
고 감독이 해준 말을 되씹으며 안정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한계에 닿았던 심장의 박동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필리스가 비디오 판독 요청을 했다. 쓸데없는 짓이다. 파울 확률이 99%이다. 마운드에서 보기에도 나간 것처럼 보였는데 라인에서 본 주심에게는 더 명확했을 것이다.
‘시간 끌기? 내 투구 리듬을 흔들어 보겠다 이거야? 이제 별별 태클이 다 들어오네.’
“파울.”
결론이 내려지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필리스도 별 기대는 안 했던 것 같다. 벤치와 타자 모두 실망한 표정이 아니다. 홈팬들만 열을 올리며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다.
관중의 반응이 너무 기분 좋다. 4만 명의 감정을 내 볼 하나로 조정할 수 있다니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 우쭐해진다. 그 바탕에 깔린 감정의 정체가 뭔지는 나도 모르겠다.
‘대중에 대한 복수? 단순히 위를 향하고 싶은 고양감? 어쩌면 내가 점점 더 미쳐가고 있는 걸지도···’
무엇이든 간에 어쨌든 이제 편안해졌다.
‘게임 속행합시다. 시간 끌지 말라고. 오호! 이러면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상대는 아깝고 불운이라 느끼겠지만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라인 밖이면 파울이다. 그게 룰이다.
‘여기선 내가 주체야. 니들은 내 뜻대로 내 뒤를 따라와야 하고··· 음. 이건 많이 오버인 것 같은데··· 설레발 치기엔 아직 좀 이르긴 하지. 이제 겨우 4회잖아.’
가슴 조이는 과정이 있었지만, 결론은 파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매조지되었다. 지금 상황은 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나보다는 타자가 마음이 급해지는 볼 카운트다.
‘유인구 세 개 던지면 하나는 걸리겠지. 삼진도 좋지만···’
그런 건 내 관심사가 아니다. 범타면 된다.
‘그렇지만 노리는 척은 할 수 있잖아. 일반적인 투수라면 그게 당연한 마음일 거고··· 내가 삼진을 노린다고 타자가 생각하면 좋은 것 아닌가? 내가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면···’
상당히 좋아진 기분과 함께 표정이 같이 풀린 건 아닐지 걱정스럽다. 대기록을 앞두고 긴장한 투수의 표정이 어떤 것일지 짐작이 안 간다.
‘대충 얼굴 좀 굳히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이럴 때를 대비해서 비시즌에 연기 학원이라도 다녀야 할 것 같다.
“플레이 볼.”
무표정한 얼굴과 욕망에 사로잡힌 눈으로 다급함을 표현하려 했지만 제대로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상대의 타오르는 눈빛은 마치 날 잡아먹을 듯 빛나고 있었다.
‘너무 확신에 찬 눈빛이네. 다음 공이 무조건 스트라이크일 거라는 생각이 막 들어?’
베그웰의 사인에 계속 고개를 흔들었다. 한두 번은 몰라도 이런 일은 올 시즌 한 번도 없었다.
‘타자는 더 혼란스럽지 않을까?’
나도 계속 생각이 바뀌고 있다. 조금 전까지는 유인구 승부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특별한 상황에선 특별한 공이 필요하다는.
‘그래. 그거···’
내 고갯짓에 계속 사인을 바꾸어 보내던 베그웰이 멈칫하더니 그냥 주먹을 쥐어 보였다. 원래 그런 사인은 없었다.
‘그거 맞아.’
애초부터 이 공을 지칭하는 사인은 만들지 않았었다.
‘던지지도 않을 공에 사인이 왜 필요하겠어. 그런 거 만들어 봐야 괜히 복잡하기만 하지.’
올 시즌 공식 경기에서 단 한 번도 던지지 않은 공이 있었다. 지금 던지는 슬라이더와 전혀 다른 공이.
슬라이더를 의도적으로 개량하기 전 던지던 오리지널. 그것에 대해서는 어떤 데이터도 있을 수 없다. 올 시즌 이전에도 메이저리그 아주 초창기에 한두 번 정도 사용했을 뿐이다.
‘눈 밝은 누군가 봤다고 해도 그 정도면 우연히 나타난 실투라고 생각했을 거야. 문제는 나도 그 공을 안 던져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투구 연습에서도 안 던졌다. 하지만 꼭 던져야 한다면 못 던질 것 같지는 않다.
‘볼 카운트 여유도 있고 주자도 없지. 와일드 피치가 나와서 빠져도 카운트 하나 손해 본 셈 치면 그뿐이야. 만약 타자가 맞으면···’
그런 것까지 걱정하면서 투구할 수는 없다. 맞으면 맞는 거다. 설마 이번에도 고의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다. 느린 변화구로 빈볼을 던지는 바보는 없다. 잘될지 모르겠지만, 비슷하게라도 들어가면 지금 한 번은 무조건 통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걸로 끝내자.’
최초로 이 공을 던질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XX대학교 운동장의 불펜. 그때의 흙냄새까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때는 막 제대하고 모든 것이 불확실했었어. 지금 생각하면 정말 대책 없고 앞이 안 보이던 시기였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진 채 떨리는 마음으로 이 공을 던졌었다.
‘많은 것이 달라졌잖아. 이제 두려워할 게 뭐가 있겠어. 안 들어가면 다음 공을 또 던질 수 있는데···’
지금 이 공이 생각대로만 들어가면 메이저리그에서 혼자만 가진 기록의 보유자가 된다. 최초라는 건 최고의 영예다. 비교 대상이 없는 독보적 영역에 발을 내딛게 된다.
가볍게 그립을 돌려 잡았다. 손가락에 닿는 실밥의 느낌이 익숙하다. 편안하게 공을 뿌렸다. 머리의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오호! 이거···’
릴리스 포인트에서 놓아진 직후부터 장궁처럼 휘어진 곡선이 타자의 옆구리를 향해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화들짝 놀란 타자가 급하게 뒤로 물러선다. 일단 성공.
난 퍼펙트 직전에도 빈볼을 던지는 미친놈으로 선수들에게 인식되어 있었다. 당연히 피한다. 미친놈과는 맞서는 게 아니다.
‘더 휘어.’
백구가 엉거주춤 뒤로 물러난 타자를 놀리듯 미묘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만. 그대로···’
더 휘면 존을 벗어난다.
백구는 아무런 방해 없이 그대로 아웃코스를 꿰뚫어 베그웰의 미트에 안착했다. 계획된 궤적을 따른 정확한 비행이었다. 훌륭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다.
‘들어간 것 같은데 심판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베그웰의 미트가 공을 마주한 지점은 스트라이크 존의 바깥이었다.
“저게 뭐야.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완전 미친놈이네. 저런 걸 던질 수 있다고?”
“저거 봐. 잡은 곳이 존 밖이잖아. 볼이야.”
야수의 비명이 터졌다. 느린 공이라 관중석에서도 휘는 각도가 바로 눈에 들어왔을 거다. 판정에 상관없이 일단 흐뭇하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잠시 얼어붙었던 주심의 손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올라갔다.
‘느린 볼의 장점인 건가? 확실하게 보였겠지.’
심판이 잠시 주저했던 건 존을 통과하는 것이 너무 명확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관성보다는 이성을 택했다.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포수의 볼 잡은 위치가 존의 바깥이라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기가 어렵다.
확신보다는 모험심으로 던졌는데 진짜로 들어가 버렸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짜릿함이 심장에서 온몸으로 번져간다.
‘이거지. 11개. 하핫. 오늘 스포츠란 첫머리에 내 얼굴이 나오겠네. 뭐!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나 더 해야겠지?’
억눌렀던 욕망이 꿈틀거리며 가슴을 휘젓는다. 메이저리그에서 그 누구도 다다르지 못한 곳에 섰다. 역사는 이루어졌다. 지금부터 디뎌질 내 한 발 한 발은 새로운 역사가 된다.
‘빨리 3번 나오라고 해. 마르쿠스 넌 빨리 안 들어가고 뭐 하냐. 끝났으면 빨랑 꺼져.’
베르쿠스는 어이가 없는 듯 시선을 허공에 둔 채 아직도 타석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쬐끔 불쌍하긴 해. 아이야. 세상사가 다 그런 거란다. 그동안 너도 약한 놈 잡아먹고 살았잖니.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성질내려다 참아주기로 했다. 원래 봐주는 건 강자만 할 수 있는 거다, 그렇지 않아도 억울해하는 약자를 너무 갈구는 건 내 품위에 흠이 될 수도 있다.
‘주심도 불쌍하니까 기다려 주잖아.’
이윽고 마음이 정리된 듯 마르쿠스의 눈빛이 돌아왔다. 살벌한 눈으로 날 한 번 쏘아보고 돌아선다. 상당히 불손한 태도다.
‘풋. 가오가 육체를 지배했네. 음. 이럴 때 비룡이가 뭐라고 했었는데··· 네 자로 뭐였더라. 지랄발광(知剌潑狂)? 지랄염병(知剌染病)?’
어느 것이 맞든 별로 긍정적인 뜻의 단어는 아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이럴 때 약자는 반항하면 안 되는 거야. 개기면 더 맞는다구.’
몹시 언짢다. 이 기분 그대로 연속 삼진을 이어가야 할 것 같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새로운 타자를 향해··· 새로운 역사의 이정표를 세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회심의 일 구가 날아갔다.
탁-
‘어? 에구구, 망했다.’
설레발은 필패라는 소중한 교훈을 되새겼어야 했다. 난 우쭐하면 안 된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바로 땅볼이 나왔다.
느리게 구르는 타구를 유격수가 침착하게 잡아 가볍게 1루에 송구해 이번 이닝의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잡았다.
관중석에서 힘 빠진 웅성임과 박수가 나왔다.
“빌어먹을··· 지금 이게 좋아할 일이야?”
“기록을 끊어도 기분 더럽네.”
인간의 욕망은 웬만해선 충족되지 않는다. 가볍게 삼자범퇴가 이루어졌는데도 이상하게 너무 많이 아쉽다. 공수교대를 위해 덕아웃으로 향하면서도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마운드에 올라 던지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정말 화장실 가기 전과 후가 다르다더니 별생각 없었는데 막상 스톱이 되니까 너무 아쉬워. 한두 개만 더했어도 나 은퇴하기 전까지는 독보적 존재로··· 응? 뭐지?.’
변했다. 덕아웃으로 향할 때마다 관중에게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던 저주의 주문이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나마 들려오는 소리도 내용이 아주 과격하진 않다.
F나 S로 시작하는 말을 좀 들어야 정신도 번쩍 들고 투쟁심 고양에도 도움이 되는데 관중이 벌써 이렇게 힘이 빠지면 곤란하다.
‘좀 서운하네. 연속 삼진이 끊어졌다고 봐주는 건가? 안 봐줘도 돼요. 나 같은 놈은 욕 좀 들어야 더 잘한다고.’
이제 4회가 지났을 뿐이다.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