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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72화 (72/200)

72화. 비우려 해도 비워지지 않더라

‘연속 삼진? 난 그런 거 안 해도 된다고. 여기서 그거 해 봐야 안티 4만 확정이야. 지금으로도 충분히 대우받고 살만한데 그거 한다고 더 좋은 투수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오늘 경기에서 이길 수만 있으면 난 충분히 만족스러워.’

그까짓 거보다는 오늘 게임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런 마음이었다. 지금까지는···

1루심은 주저 없이 주먹을 쥐었다.

“배터 아웃.”

콜과 함께 주심의 팔이 올라갔다. 그리고 OFF 되었던 음량 조절 스위치가 ON으로 다시 옮겨진다. 익숙한 소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병신 놈들. 그거 하나 맞추지도 못하냐.”

“나가 죽어.”

일관성 있는 욕설이 쏟아진다. 자꾸 듣다 보니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의견들이었다.

‘별로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굳이 시켜주겠다고 하네. 왜 이렇게까지 협조를 해주는 거야? 정말 이제 안 하면 관중이 섭섭해할 거 같은데···’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이건 절대로 고의적인 것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커뮤니케이션에 의한 감정의 발산이다.

‘음. 삼자범퇴를 구태여 삼진으로 마무리해주는데 내가 안 할 도리가 없잖아.’

“악마 같은 놈.”

"Fxxx. Sxx···"

덕아웃이 가까워질수록 질시와 저주가 커진다. 조금 전까지 필리스 선수들을 욕하더니 이제 대상이 나로 바뀌었다.

‘Oh. Thank you.’

감사하다. 그것은 나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준다. 난 요 몇 년간 그것을 양분 삼아 커왔다. 원망과 질시는 나의 힘이다. 새로운 의욕이 솟아나다 못해 넘칠 것 같다.

덕아웃에 들어왔는데도 관중의 목소리는 줄어들 줄 몰랐다. 그런데 미묘하게 내용이 좀 바뀐다. 타킷이 다시 옮겨졌다. 나에게로 집중되었던 저주가 필리스에게로 다시 옮겨붙었다. 선수뿐만 아니라 코칭 스탭, 프런트, 구단주··· 관중은 이제 모두 까기를 시전 중이었다.

“저런 이야기 신경 쓰지 마. 너만 흔들리지 않으면 곧 질시가 찬양으로 바뀔 거야.”

소르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이건 조언인가?’

“하핫. 그게 전혀···”

내 웃음과 동시에 감독의 고개가 확 돌았다. 그의 눈이 집요하게 내 얼굴을 살핀다.

“아! 오늘은 아니에요. 그냥 웃음이 나서···”

감독의 인상이 더 찌푸려졌다. 그때도 그랬었다. 오늘도 억지로 웃음을 멈춰보려고 했지만 잘 안 된다.

‘아! 미치겠다. 이젠 웃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 거야? 이 모든 게 자업자득. 이게 맞나?’

갑자기 비룡이가 보고 싶다. 덕아웃 구석에서 마인드 컨트롤을 강제 당해야 하는 내 신세가 처량하다.

필리스의 인내는 3회로 끝나 버렸다.

딱-

하던 대로 가볍게 초구를 던졌는데 배트가 벼락같은 움직임으로 맞이한다. 총알 같은 타구에 가슴이 섬뜩하다.

“파울.”

옆으로 지나가는 타구에 1루수가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른 타구였다.

‘놀랬잖아. 근데 아쉬워서 어쩌나. 쯧쯧쯧.’

잘 맞은 타구였지만, 라인 안으로 들어와야 유효하다.

‘입장 변화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일관성 그거 중요한 건데···’

그렇지만 이것도 괜찮다. 난 꼭 삼진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노볼 원 스트라이크. 자 이제 하나 굴려봐.’

조금 더 빠지는 유인구.

틱-

“파울.”

타자의 배팅 포인트가 이번엔 좀 틀어졌다.

‘오투 피치. 용어가 상큼하지? 투낫씽보다 이게 낫지.’

이제 내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보통 때라도 이런 볼 카운트라면 웬만한 유인구에도 타자의 배트가 끌려 나올 수밖에 없는데 지금은 연속 삼진을 저지해야 한다는 부담감까지 하나 더 있다.

베그웰의 사인이 마음에 꼭 들었다.

‘하나 던져야 할 때가 되긴 했지.’

관중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야수의 으르렁거림이 지금은 마치 신음 소리처럼 들린다. 상처 입은 야수의 심장을 향해 최고의 패스트볼을 던졌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타자는 허를 찔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주한 90마일이 마치 100마일의 속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연속 삼진 10개라. 달성자가 나까지 해서 네 명은 좀 많은 것 같은데···’

관중석의 반응이 조금 변했다. 탄식 속에 환호가 조금씩 섞여 들려온다. 하지만 대다수는 아직도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쩝. 이런 게 변태적 성향인가? 고통 속에서 환희를 느끼는 것과 비슷한 걸지도···’

사고 친 유명인들은 대개 종사하는 일로 불특정의 대중에게 보답하겠다는 사과 아닌 사과로 사고를 얼버무린다. 하지만 진짜로 무엇인가를 끝내주게 잘하면 사고 수습은 또 다른 불특정 다수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고는 그냥 사고로 끝나고 웬만해선 사건이 되지 않는다.

In fifteen minutes everybody will be famous. (15분 안에 모두가 유명해질 것이다)

앤디 워홀의 말이다. 자신과 함께 사진 찍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행렬을 보고 한 말이다. 정말 특별해지면 그 특별함의 장막 아래로 모이는 것만으로 그의 특별함을 나눠 가진다고 착각하는 많은 이들이 생긴다.

‘그게 나란 건 아니고··· 뭐 그렇다고. 지금도 봐. 조금 전까지 날 잡아먹을 것처럼 하던 사람들 중 일부가 변심했잖아.’

경기 시작 후 11번째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소위 말하는 중심 타선의 시작이다.

전통적인 타선 구성의 방법은 테이블 세터로 1, 2번을 놓고 클린업 트리오 3, 4, 5번으로 구성된다.

출루율 높고 발 빠른 1번과 빠르고 작전 수행 능력이 출중한 2번 이런 식이었다. 컨택 능력과 주력이 좋은 3번, 장타력과 찬스에 강한 4번, 타점 생산 능력이 뛰어난 5번··· 1번이 출루를 하면 2번은 진루타(번트) 클린업 트리오가 마무리는 짓는 시스템이 오랫동안 통용되었었다.

세이버메트릭스의 등장 이후 변화가 시작되었다. 제일 잘 치는 타자가 가장 기회를 많이 가져야 더 많은 득점을 올릴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번트처럼 아웃 카운트와 진루를 바꾸는 작전보다는 강한 타자에게 맡기는 편이 득점에 유리하다는 확률적 계산이 그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앞쪽에 강한 타자를 배치하면 하위 타순으로부터 시작되는 이닝도 잘 치는 타자가 기존의 클린업 트리오 역할을 해낼 수 있게 된다. 타순과 전통적 방식의 역할 구별은 득점에 특별한 영향이 없다는 통계치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메이저리그 각 팀이 페드로이아, 트라웃, 옐리치 등 최고의 타자들을 2번에 배치해 엄청난 성적을 내면서 그 주장을 증명했고 이제는 당연한 일이 되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고전적 클린업 트리오 개념이 2, 3, 4번으로 옮겨진 지 오래되었다.

필리스의 타순도 2번 타자가 가장 타율이 높다. 홈런도 30개 이상을 쳐낸 정확하고 파워 있는 타자다. 1회 때는 필리스가 이상한 작전을 들고나오는 바람에 편하게 상대할 수 있었는데 이제 봄날은 지나 버렸다.

‘호세 마르쿠스라··· 이런 타자를 상대로 의도적으로 삼진을 노리는 건 말이 안 되지.’

철저하게 유인구 승부를 가져갈 생각이다. 정면 승부도 선수 봐가면서 하는 거다. 이런 타자를 상대로 스트라이크 존에 퍽퍽 꽂아 넣는 건 내가 100마일, 아니 110마일을 던질 수 있게 되더라도 피해야 할 일이다.

‘이런 놈들은 120마일쯤 되는 페스트볼이라도 쳐낼지 몰라.’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던지는 투수가 없기 때문에 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이런 괴물들은 상상 이상의 동체 시력과 힘을 가졌다. 필요가 생기면 충분히 해내고도 남을 놈들이다.

이제 거의 두 시즌을 빅리그에서 보냈다. 그 경험으로 알게 된 건 메이저리그 선수라고 다 같지 않다는 것이다. 메이저에서 타율 3할과 30홈런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건 괴물들의 영역이다. 물론 그런 괴물이 메이저리그에 흔한 건 아니다.

‘타격 능력, 수비 능력 등 모든 것에 평균치라는 것이 없더라고. 메이저는 모든 것을 고르게 잘하는 선수도 있지만 그건 드물고 보통의 선수는 어떤 한 부문이 특별하면 한쪽은 처지더군.’

불펜이었을 때는 강약 조절 같은 것을 할 만한 경험이 쌓이기 전이었고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올 시즌 선발을 하면서는 그런 것이 꼭 필요해졌었다.

‘전력으로 던지면 한 60~70구 정도는 가능할까?’

실전에서 아직까지는 그렇게 던져본 적이 없다. 그 어떤 선발 투수도 그렇게 던지지는 않는다. 그렇게 던졌던 선수들은 이미 다 은퇴했다.

어느 순간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렇게 던질 수도 없고 던질 필요도 없다고···

‘삼진? 그냥 땅볼이면 족해.’

스스로 제약을 만들어가면서 상대할 수 있는 급의 선수가 아니다.

‘마르쿠스는 타격만 따지면 리그 최상급이야.’‘

틱-

“파울.”

초구부터 배트가 날카롭게 돌았다. 아마 존 안으로 들어가는 공이었으면 맞았을 것 같다.

“볼.”

유혹에 잘 넘어오지 않는다. 싱커의 각을 좀 더 키웠더니 티가 좀 났었나 보다.

‘하이 패스트볼?’

베그웰에게 좀 의외라고 생각되는 사인이 왔다. 좀 이른 것 같다.

‘바깥쪽으로 하나쯤 더 빼고 싶은데··· 이게 괜찮을까?’

나도 확신이 없으면서 베그월의 볼 배합을 굳이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다.

‘안 속으면 할 수 없지.’

타-악-

정타는 아니다. 막힌 듯 미묘한 타격음이 났다. 잡아낸 것 같다.

‘헐! 그럴 맞혔어?’

안도와 놀라움이 함께 왔다. 스트라이크 존에서 두 개 정도는 높은 볼이었다. 이런 것도 재수 없으면 안타가 된다. 빗맞은 타구라도 황당한 힘이 뒷받침되면 가끔 내야수를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일은 안 생길 것 같다.

별로 빨라 보이지 않는 타구가 하늘로 새카맣게 솟았다.

‘파울 라인 안이면 좌익수한테 잡히겠네.’

힘든 타자였는데 한고비 넘겼다. 연속 삼진은 깨지겠지만 좌익수 플라이면 아주 만족스럽다. 그런데···

‘어? 왜 안 떨어져. 이거 뭐야. 밖으로 나가.’

타구가 점점 더 뻗어나간다. 이곳 시티즌스 뱅크 파크는 왼쪽 폴대까지 100m다. 꽤 사이즈가 큰 구장이지만 펜스가 그리 높지 않아서 홈런이 잘 나오는 타자친화적 구장이다.

어느새 주심이 라인 가운데 걸치고 서서 타구의 방향을 주시하고 있다.

‘안 돼. 나가.’

타구는 느리게 느리게 왼쪽 펜스를 넘어갔다.

‘뭐야. 설마 IN은 아니겠지?’

“파울.”

주심이 라인 바깥쪽 손을 흔들며 파울을 선언했다.

‘에고, 놀래라. 어째 찝찝하더니만.’

빗맞은 공이 펜스를 넘기다니 내야를 넘어가는 건 아주 가끔 겪었던 일이지만 이런 일을 당하는 건 처음이다.

‘정말 사람 같지 않은 놈이네.’

혐오 표현은 아니다. 난 혐오를 싫어한다. 대상을 누구라고 꼭 지칭하진 않았다.

‘주어가 없었다고···’

들뜬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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