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단순한 게 좋아
“스트라익.”
투 스트라이크를 잡았다. 이제 타자의 커트 신공이 나올 차례다.
‘나도 머리란 게 있다고··· 비슷하면 건드린다 이거지?’
그래서 비슷하게 던졌다. 높은 코스를···
내 공은 이제까지 곡선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치솟는다. 배트가 나오다 어중간한 곳에서 억지로 멈췄다.
‘콜 하라고.’
주심이 즉각적인 콜 대신 고개를 돌려 1루심에게 판단을 묻는다. 1루심의 한 손이 천천히 올라가 주먹을 쥐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OK. 그래야지.’
“배터 아웃.”
주심에게서 기다리던 삼진콜이 나왔다.
‘크큭.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땅볼 유도뿐인 줄 알아. 원래 난 이런 투수였다고.’
내 커브가 스트라이크가 될 확률은 거의 없지만 투 스트라이크 이후 커트를 위해 배트 낼 것을 저렇게 미리 준비하고 있는 상태라면 판단하기 몹시 까다롭다. 의외성을 유지하기 위해 게임에서 사용 빈도를 줄여왔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많이 못 던질 이유가 없다.
‘오늘은 낮은 쪽보다 주로 높은 쪽으로 승부를 가져가면 되지. 내가 니들이 바라는 대로 해줄 것 같아?’
위닝샷은 빠른 투심과 업슛의 조합으로··· 이게 오늘의 주 레퍼토리다.
‘메뉴를 바꾸는 건 조금도 어렵지 않지.’
필리스의 감독이 참지 못하고 뛰어나와 체크 스윙에 대한 어필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의 판정에 별로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필리스가 지금 이 단순한 작전을 언제까지 가져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더 해줬으면 좋겠다.
“스트라익.”
보란 듯이 아웃코스 존에 딱 붙여서 느린 싱커를 집어넣었다. 이건 누가 봐도 애매하지 않은 스트라이크다.
‘오호! 제법 참는데? 그럼 이건?’
더 느린 싱커가 인코스로 정직하게 날아가 정확하게 존에 떨어진다.
“스트라익.”
타석에서 한 발 뺀 타자가 장갑을 다시 고쳐 낀다. 살짝 짜증이 보이는 것 같다.
‘이제 결정구를··· 다시 높게···’
“스트라익. 배터 아웃.”
3구까지 계속 지켜보던 타자는 루킹 삼진으로 물러났다. 내 커브가 안 치면 볼이라는 것 역시 이제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번 공은 솟지 않고 떨어졌다.
‘싱커를 낮게만 던지란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높게 던지면 유인이 잘 안 되니까 그렇게 안 던졌던 거지.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단순한 애들이라서 아주 편하네. 계속 좀 부탁해.’
상대의 노림수 따위는 이제 걱정하지 않는다. 2회 초 공격에서 우리 타선이 무려 2점이나 만들어냈다. 마음이 푸근하다.
‘1점 선취하고 무사 1, 3루에서 1점밖에 더 못 낸 건 좀 아쉽긴 했어. 그래도 그게 어디야. 하위 타선이라서 사실 별 기대도 안 했다고.’
다음 타자가 유격수 앞으로 가는 병살타를 쳤지만, 그 역시 타점이다. 과정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정말 소중한 득점이었다. 1점과 2점은 확실히 다르다.
‘이런 식으로 던질 수 있는 것도 다 그 덕분이지.’
지금 같은 패턴이 상대에게 익숙해지면 필리스에서 변화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벤치의 작전 변경이든 타자의 급작스러운 변덕이든 간에 순간적으로 한 방 먹을지도 모른다. 그 시점을 정확히 알고 대비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2점이라는 안전판이 있는 이상 두렵지 않다.
‘홈런? 맞으면 맞는 거지. 뜬금포 나오는 거야 어쩌겠어. 2:0이든 2:1이든 이기면 되는 거잖아.’
타선이 한두 점 더 내어 주면 더 과감하게 던질 생각이다.
6번 타자에게는 위닝샷으로 다시 커브를 던졌다. 관중석의 탄식이 나에게는 아름다운 화음처럼 느껴진다. 당황해하는 타자에게 썩소를 날렸다. 덕아웃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너무 가볍다.
‘아싸! 10구로 막았네.'
편하다. 너무 편해서 계속 이렇게 던질 수 있다면, 오늘 투구 수가 좀 늘어나도 끝까지 구위 유지가 가능할 것 같다.
“정말 필리스는 너무 좋은 팀인 것 같아. 할 수만 있다면 시즌 내내 필리스하고만 시합을 했으면 좋겠어.”
이건 솔직한 심정이다. 이 팀은 등판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투구가 편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서 더 아쉽다.
“그거 반가운 말이군. 나도 필리스를 다시 보게 됐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런 단순 무식한 작전을 들고나올 줄이야.”
소르카와의 대화가 이젠 별로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누가 그러더군. 마음이 급해지면 시야가 좁아져 바보짓을 하게 된다고. 그래서 필리스가 이렇게 하는 걸 거야. 거기 브랑코 감독이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닌데 이렇다는 건 그만큼 오늘 게임에 부담을 느낀다는 의미겠지.”
이번 회 우리 타순이 1번부터 시작이라 베그웰도 느긋하게 대화에 어울리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네.’
“베그웰. 그 사람 말은 한 70%만 믿으면 돼. 나쁜 사람은 아닌데 가끔 뒤통수를 친다고. 자기 이익에 얼마나 민감한 사람인 줄 알아? 조심해라.”
아무래도 베그웰은 고 감독의 마수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그의 말을 이럴 때 인용할 정도면 중증이다.
“그러는 너는 왜 늘 함께하는 거야? 자기는 사업적으로도 얽히고 그전에는 인스트럭터로 고용을 할 만큼 가깝게 지내면서 왜 내게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건지 모르겠어.”
고 감독에 대한 옹호가 바로 나온다.
‘나야 오래 접해서 항체가 생겼으니까. 내가 고 감독과 함께한 세월이 10년이야. 하아! 베그웰아. 니가 이 정도로 발끈할 말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
베그웰이 세상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답답하다.
‘그 사람이 얼마나··· 음. 지금까지 딱히 나쁘게 한 건 없지만···’
말과 행동을 좀 독하게 하고 가끔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특별한 악행은 아직까지 없었다.
‘아직까지라··· 앞으로는?’
우리 어머니 가라사대 어려움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과 성공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늘 같은 건 아니라고 하셨다. 두 경우를 모두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들었다. 고 감독은 어느 쪽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누구지? So가 개인 인스트럭터가 있었어?”
“아! Mr. Go라고 원래 인스터럭터였는데 지금은···‘
고하라 찬양가가 울려 퍼졌다. 이럴 때마다 어이가 없다.
‘이거··· 고 감독이 그동안 적성에 안 맞는 일을 하고 있었던 건가?’
잠깐 사이에 마일리와 베그웰을 홀린 걸로 봐서는 종교라도 창시하는 게 그의 진정한 재능에 어울리는 길이었을 것 같다.
‘가만, 론 허버트도 사이언톨로지를 만들었다는데 나라고··· 고 감독을 내세워서··· 교주 같은 건 머리 아프니까 난 그냥 재정 책임자 정도 하면···’
“베그웰. 우리 공격 거의 끝나간다. 나갈 준비 해야지.”
이쪽을 계속 주시하던 리우드 코치의 말에 생각이 끊겼다. 게임이 너무 마음먹은 대로 풀려 한가한 날이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얘들은 창의성이 모자라나 봐. 어쩌면 이렇게 초지일관할 수가 있지?’
초지일관 좋은 말이다.
‘그런데 이럴 때 쓰는 말이 맞긴 한 건가? 일편단심이라고 해야 하는 거 같기도 하고···’
오랫동안 비룡이를 멀리했더니 기억이 가물거린다.
다음 타자가 들어서는데 관중석에서 울려 퍼지던 저주의 웅성거림이 좀 더 또렷해졌다. 어떤 메시지가 구체화되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아직 3회잖아. 뭘 이 정도 가지고 벌써 그렇게 난리들이야. 왕년에 필리건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삼자범퇴 세 번 정도 가지고 쫄기는··· 관중들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당연히 해줘야지.’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염원해도 생각은 물리력이 없다. 그라운드에서 공에 물리력을 가할 수 있는 건 선수들뿐이다.
‘심리적 위축? 그런 건 나한테 해당 사항 없다니까. 내가 왕년에 백만 단위로 악플을 받아본 사람이야. 관중 4만 정도는 우습지.’
“삼진은 그만.”
이젠 또렷이 들린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니들이 바란다고··· 응? 삼진?’
3회에 투아웃. 이제 9번 타자다.
‘헐! 지금까지 땅볼이 없었잖아. 플라이도 없고···’
파울이 몇 개 있다 보니 그런 쪽으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하면 9타자 연속 삼진이 된다.
‘하핫. 이거 뭐야. 그런 거였어? 내가 왕년에 일본을 상대로 11타자 연속도 해봤었다고.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벌써 그러면 되겠어요?’
메이저에서 연속 탈삼진 기록은 10개다. 세 명이 가지고 있다. 톰 시버와 애런 놀라. 코빈 번스.
그중 애런 놀라는 필리스의 선수였다. 2021 시즌 메츠를 상대로 수십 년간 유일하던 기록을 유이(唯二)하게 만들었다. 같은 해 세 번째 선수가 나오긴 했지만.
그는 얼마 전 은퇴했다. 아주 짧은 전성기를 가졌던 투수였다. 10타자 연속 삼진을 해냈던 시즌도 9승 9패에 4점대 중반의 ERA를 기록했다. 이런 일회성의 기록이 좋은 투수의 척도는 아니다.
‘몇 년 전 일본의 어린 투수가 13개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걔는 메이저 안 오나? 올 때가 되긴 한 것 같은데···’
필리스가 지금처럼만 해주면 메이저 기록 경신도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흐흣. 이거 재미있게 되었네. 어이. 타자 선생 너도 버틸 거야? 그래 주면 난 좋지만··· 여기서 삼진당하면 너 필리스 선수 생활에 애로 사항이 생기지 않겠어?’
“스트라익.”
‘아! 고집 세네. 왜 그리 융통성이 없냐?’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구수한 F와 S 발음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타석에서 잠시 물러난 타자의 눈이 애타게 필리스 벤치를 향하다 다시 돌아왔다.
‘벤치에서 그냥 밀고 나가라는 모양이지? 거 참! 안타까운 일이야. 오늘 기록 한번 세워보겠네.’
“스트라익.”
타자가 다시 참았다. 팬보다는 감독이 무서운가 보다.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준 필리스 코칭 스탭의 도움으로 이런 대기록을 세우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경기 뒤에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가로지른다.
‘아무리 아메리카지만 좀 겸손 모드로 가야 하지 않을까?’
튀는 언행은 거기에 열광하는 매니아를 만들지만 안티 발생을 막을 수 없다. 통상적으로 매니아 보다 안티의 머릿수가 훨씬 많다.
‘그래. 그냥 팬들의 성원 덕분이라고 하는 게 무난하겠지. 음. 놀린다고 생각하려나?’
투 스트라이크다. 결정구 하나만 들어가면 이제 연속 삼진 아홉 개째가 된다. 투구 준비 동작과 동시에 저절로 얼굴이 엄숙해진다.
‘이건 어때?’
원래 나의 투구 패턴대로 아웃코스 존에서 낮은 쪽으로 빠져나가는 유인구를 던졌다. 높은 볼 승부를 앞 두 타자에게 했더니 세 번째 타자의 머릿속에서 이런 볼 배합은 지워졌던 모양이다.
‘단순하기는···’
갑자기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서 넘쳐나던 웅성임이 멎었다. 타자의 스윙도 완성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