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70화 (70/200)

70화. 이겨야 한다

“플레이 볼.”

‘눈 좀 깔아라. 아무리 우러러 보여도 그런 눈은 좀 그렇지 않니?’

타자가 너무 절실해 보여 부담스럽다.

오늘도 관중석은 만원이었다. 다수의 관중이 발산하는 저주의 눈빛 레이저와 나의 부진을 염원하는 웅성거림에 자극받아 피부가 따끔거릴 지경이다.

‘간절함은 알겠는데 바란다고 그게 다 현실에서 이뤄지지는 않더라고···’

그런 게 진짜 통한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없었다. 오늘 나는 저 거대한 군중의 의지를 거슬러 승리의 초석을 놓아야 한다. 자신 있다. 그렇게 해 왔었다.

1회 초 우리 팀 공격은 2사 후 볼넷을 하나 얻었지만, 점수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이제는 막아야 할 차례다.

“스트라익.”

살짝 애매했는데 주심이 순순히 스트라이크 콜을 했다. 타자는 스윙하지 않았다.

‘왜 안 쳤지?’

내 초구의 70% 이상이 스트라이크. 그 공의 90% 이상은 아웃코스. 이젠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통계에 의하면. 한 타자당 나의 투구 수가 많아질수록 안타 확률이 떨어졌다. 나의 피안타는 대개 초구와 2구에 몰려있었다.

그 결과 때문인지 나를 상대로 타자는 기다리지 않는다. 치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고 초구를 지켜보다니 이런 타자는 상당히 오랜만이다.

‘대개의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나를 공략하기 위해서 볼 카운트에 구애받지 말고 타자는 적극적인 배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데···’

간단한 이야기다. 기다리면 더 불리해지니까 배트를 과감하게 돌리라는 이야기다. 확률적으로 초구를 공략했을 때 어쩌고 하는 말은 내 생각엔 말짱 헛소리다.

공이 아웃코스를 향한다고 다 같지는 않다. 구질과 구속, 높낮이가 다르고, 존 밖으로 흘러나가기도 하다가 존에 걸치기도 한다. 그런 세밀한 제어가 가능하기에 80마일 초중반의 공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런 식의 생각은 오산이지. 특별히 초구라서 더 맞아 나가는 게 아니라 타자들이 가장 예측하기 쉬운 초구를 공략하는 빈도가 높아서 그렇게 된 건데···’

일반 사람들이야 그럴듯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야구밥 먹는 코칭 스탭과 선수들까지 왜 그런 이상한 생각에 동조하는지 굉장히 이상하게 느낀 적이 있었다. 아마 스윙 횟수 대비 안타가 되는 확률 같은 것을 계산한다면, 순서에 상관없이 일정하게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2구는 볼 3구는 스트라이크. 원 볼 투 스트라이크. 이렇게 될 때까지 타자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틱-

“파울.”

인코스를 하나 찔렀더니 그것에는 반응이 있다.

‘뭐야? 인코스를 노렸다고? 설마 그건 아니겠지?’

이건 말이 안 된다. 대부분의 공이 아웃코스를 향하는데 게스 히팅을 하려면 아웃코스여야지 인코스를 기다린다는 건 아웃 카운트를 하나 헌납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다.

‘혹시 하나만 걸려라 이건가?’

아직 무엇이라고 판단하기엔 이르다. 베그웰도 좀 이상한지 아웃코스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볼을 던지라는 사인이 나왔다. 그도 신중하다. 다시금 이 게임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틱-

정상적인 스윙이라기보다는 배트가 억지로 따라와서 스쳤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은 스윙이었다.

‘이거 뭐야? 그렇게 맞혀 가지고 내야나 넘어가겠어?’

요즘 타자들은 일반적으로 삼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게는 특히 그런 경향이 더했다. 연속 안타를 노리기보다는 한 방에 끝내려는 풀스윙이 타자들이 주로 나를 상대하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런 어정쩡한 스윙이라니···

‘투구 수를 늘리려고 하는 건가?’

첫 타자를 상대로 이제 여섯 개째를 던져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6회를 넘기기도 어렵다.

‘투 스트라이크까지는 지켜보다가 다음부터 비슷하면 무조건 커트를 하겠다 이거네.’

아직은 짐작일 뿐이다.

‘표본이 좀 더 있어야겠지. 한 타자로 판단하는 건 너무 성급해.’

유인구를 던지기가 갑자기 찝찝해졌다. 그래도 던져야 한다. 그건 피네스 피처의 숙명과 같은 거다.

‘마음 가라앉혀. 각자 잘하는 게 다른 거라고. 난 파워피처가 아니야. 그건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잖아.’

빠르게 더 빠르게는 내게 불가능한 일이다. 느리게 더 느리게 가야 한다. 그게 내 길이다.

이어 던져진 6구에 타자의 배트가 움찔하더니 스윙이 중간에 멈췄다.

‘빠졌나? 애매하네. 할 수 없지. 하나 더 던져야···’

“스트라익. 배터 아웃.”

주심의 콜이 한 템포 늦게 나왔다.

‘에고, 놀랐잖아.’

타자가 한번 슬쩍 뒤를 돌아보고 아무 말 없이 타석에서 물러났다.

‘그래. 그래. 잘 생각했어. 1회 첫 타자부터 주심을 긁기는 좀 그렇지,’

타자는 분명히 커트를 하려고 했었다. 타이밍에 맞춰 배트를 내다 빠진 것 같아 멈춘 것뿐이다.

‘첫 타자부터 여섯 개나 던졌네. 오늘도 투구 수 제한을 하려나?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이어서 맞이한 2번과 3번 타자도 비슷한 패턴으로 타격보다는 투구 수 늘리기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1회를 끝내는 데 17구나 던지고 말았다.

‘오늘 완봉을 해야 하는데 이건 좀··· 다시 생각 좀 해봐야겠어.’

딱-

깨끗한 타격음이다.

‘필 아저씨 웬일이세요? 이렇게 일찍···’

2회 초 선두 타자가 안타를 때려냈다. 환호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선발 투수가 감정을 심하게 드러내는 건 다음 이닝 투구를 위해 자제해야 한다. 피처는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아! 몰라.”

박수 정도야 어떻겠나 싶다. 벌떡 일어나 열렬한 박수로 응원을 대신했다.

‘속으로 앓는 것보다 이게 낫겠지. 저 봐. 감독도 아무 말 안 하잖아.’

감독은 그냥 한 번 쓱 쳐다보다니 웃고만 있다.

“오늘도 기운이 넘치나 보네.”

별안간 소르카가 말을 건다. 이 사람은 사실 나하고 동갑인데 상당히 연상 같은 느낌이 있었다.

‘과묵의 화신이 어제부터 왜 자꾸 나한테 이러는 거야?’

소르카는 괜히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그가 무표정하게 파란 눈으로 지그시 쳐다만 봐도 가슴 한쪽이 조여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야. 다른 선수들도 대개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더라구.’

“언제나 똑같지. 아니, 오늘은 좀 더 중요한 게임이니까 좀 더 활발하게 해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제 기죽지 않는다. 나도 이제 팀에서 자리를 잡았다. 팀원들에게 존중받고···

“난 좋은데··· 저기 불안해하는 사람이 하나 있는 것 같아서···”

슬쩍 턱으로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누가··· 하아! 내가 잘못했네.’

잘 느끼지 못했는데 소르카의 말을 듣고 다시 본 리우드 투수 코치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해바라기 씨가 그의 손가락에 눌려 박살 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 정도면 날 불러 뭐라고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참고 있는 것이 용하다.

덕아웃의 평화를 위해 앉았다.

눈치 본 건 아니다. 내 기분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준다면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리우드 코치가 내 눈치를 본 건가? 코치도 편하게 말하기 어려운 거물급 선수가 된··· 음.’

메이저리그도 코치와 선수 간의 관계는 수평인 듯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수직이다. 코치는 관리자다. 만약 선수가 코치한테 찍힌다면 정기적으로 프런트에 올라가는 보고서에 ‘가르치기 어려운 선수다’,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쓰게 된다.

그런 선수가 정상적으로 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는 어렵다. 그런 권력 구조가 작동하는 관계에서 당연히 선수와 코치는 사무적이고 딱딱한 사이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수가 너무 커버리면 그 관계는 역전된다.

주로 FA선수들에게 일어나는 일인데 그런 선수와 코치가 어떤 일로 부딪치게 되면 구단은 당연히 선수의 손을 들어준다.

투자 대비 기대 수익이 너무 다르다. 대체할 수 있는 코치는 넘친다. 이곳도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가 통용되는 세계다. 그렇게 권위를 잃어버린 코치의 앞날은 뻔하다. 그래서 코치들도 그런 선수와는 되도록 부딪치는 걸 피한다.

‘내가 아직 그 정도 급은 아닌 것 같은데···’

6번 타자는 알버트다. 쟤야말로 이번 시즌의 진정한 승리자이다. 확장 로스터로 올라와 짧은 기간의 활약으로 이런 중요한 경기에서 6번으로 나올 만큼 신임받는 선수가 되었다.

‘역시 임펙트가 있어야 해. 중요한 게임 대타 두 번으로 눈도장을 확실히 받았잖아.’

이 정도 무게의 게임에 선발로 기용될 정도라면 내년 26인 로스터의 한 자리는 거의 예약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타악-

역시 잘 친다. 타율도 높지만, 기회에 강하다. 이때다 싶은 순간에 어김없이 기대에 부응한다. 연속 안타로 무사 1, 2루가 되었다.

이제 베그웰이다. 그는 지난 한 달간 완전히 미쳐 날뛰었다. 장타는 부족했지만, 그 기간 타율이 4할에 가깝다. 아마 포수가 아니었다면 상위 타선에 배치되었을 거다.

‘어제 그 사건으로 프레디도 완전히 맛이 간 거 같고···’

팀으로서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베그웰 개인으로서는 어제가 축복받은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제도 7회까지는 포수가 베그웰이었다. 안드레가 올라오면서 포수를 프레디로 바꿨다. 이기고 있었고 바로 끝내면 되는 장면이었으니까. 그리고 9회에 그 일이 일어났다.

아무도 어제 일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지만, 모두의 머릿속에 프레디의 이미지가 새겨졌다. 이제 감독은 웬만해선 포수를 바꿀 생각 자체를 못할 거다.

‘여기서 한 방 쳐주면··· 어?’

필리스가 투수 교체를 하려는 것 같다.

“뭐 하자는 거야? 2회에 투수를 바꿔?”

나도 모르게 입으로 머릿속의 말이 새어 나왔다.

“포스트 시즌처럼 경기를 하네. 가차 없이 바꾸는 걸 보니까 필리스도 여기가 승부처라고 생각하는 것 같군.”

“허!”

소르카가 이렇게 말을 길게 하는 걸 처음 들었다.

‘잘 모를 수밖에 없었지. 원래 얼굴 보기가 힘든 사람이었으니까.’

이 사람은 자기 등판 순서가 아니라면 덕아웃에 잘 앉아 있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등판 다음 날은 회복 훈련한다고 안 나오고, 등판 전날은 컨디션 조절한다고 안 왔다. 중간 이틀도 정상적으로 나오는 날이 드물었다.

구단 역대급 FA계약과 확실한 성적으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했다면 욕 깨나 먹었을 스타일의 선수였다. 딱히 친하게 지내는 선수도 없었다. 포수도 가리지 않았다. 그냥 혼자서 또박또박 주어진 역할만 충실히 해내는 상당히 재미없는 선수였다.

“투수 질에서 안 되니까 물량으로 맞서기로 했나 봐.”

“아! 그렇군.”

당황스럽다. 뭐라고 상대를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타악-

‘만세.’

베그웰이 해냈다. 바뀐 투수의 초구를 날려버렸다.

“빠져. 빠져라.”

강하게 밀어 친 타구가 1루수를 넘어 우익수 옆으로 날아간다. 우익수가 잡아내지 못해 공이 펜스 쪽으로 구르면 곧바로 두 점이 들어온다.

“아이고, 막았네.”

필피스 우익수가 몸을 던져 공을 멈춰 세웠다. 뒤로 빠지지 않았다. 조금 아쉽다.

선수들에게서 짧은 탄식이 터졌지만, 곧 미친 듯 달려 홈으로 들어온 2루 주자 필을 환영하는 함성에 묻혀버렸다.

‘1점 들어오고 무사 1, 3루.’

오늘 이긴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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