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한 걸음만 더
“아웃.”
간절한 희망을 담은 고함이 우리 선수들에서 터져 나왔다. 모두 일어서 애타는 눈으로 홈 플레이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이프.”
필리스 관중들의 외침이 마치 명령을 내리듯 그라운드를 덮었다.
9회 말 투아웃 스코어는 2:2 판정 하나로 승패가 결정된다. 아웃이면 연장이다.
‘연장만 가면···’
우린 근래 연장전에서 져본 적이 없다.
“세이프.”
잠시 주저하던 심판의 판정이 내려졌다.
‘헐!’
“무슨 소리야. 아웃. 아웃이라고. 눈 뜨고 본 거 맞아?”
“오심이야. 이런 판정 인정할 수 없어.”
“비디오 판독을 해야 해. 자세히 다시 좀 보라고.”
순식간에 터져 나온 불만 어린 고함 같은 항의가 덕아웃을 들끓게 만들었다. 감독의 다급한 재검증 요청이 뒤따랐다.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우리 팀은 조금 전까지 2:1로 이기고 있었다. 소르카는 팀의 1선발다운 최고의 피칭을 보여주었다. 플레이오프가 거의 손안에 들어온 것처럼 느꼈었다.
‘열 받은 건가?’
소르카는 벤치 한쪽을 차지하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고요한 눈빛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안 된다. 그는 절대로 먼저 나서지도 않고 자기 몫의 역할을 소리 없이 해내 왔다. 오늘도 어김없이 충분히 잘 던졌다.
소르카가 7회를 마지막으로 물러난 후 결판을 내기 위해 체이스를 건너뛰어 클로저 안드레를 바로 8회에 올렸다. 체이스가 연투로 정상 컨디션이 아닌 사정이 고려되었겠지만, 오늘 끝내려는 우리 팀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래도 평소처럼 했었어야 했나? 마지막에 이 꼴이 나다니··· ’
기세 좋게 출격한 안드레는 8회를 잘 막아냈다. 그러다 9회 선두 타자에게 홈런으로 동점을 허용했다.
‘그건 그럴 수 있지. 뭐! 뜬금없이 나오는 홈런이야 어쩌겠어.’
상대는 오늘 지면 시즌이 끝나 버린다. 필리스는 마지막 공격 기회에서 정말 죽기 살기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잘 던진 공을 잘 받아쳐 나오는 홈런이야 불가항력이다.
거기까진 그럴 수 있었다. 안드레는 홈런 후 재빨리 마음을 다잡은 듯 다음 타자들을 잘 잡아냈다. 투아웃까지는.
악몽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애매한 볼넷으로 출루를 허용하고 잇달아 장타를 맞았다. 이건 많이 곤란하다. 클로저는 팀 최후의 보루다. 이닝의 마무리 과정이 너무 안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기회가 다시 왔다. 1루 주자가 다소 무리해 보이는 주루로 홈까지 파고들었다.
우리 야수들의 매끄러운 중계플레이가 이어졌고, 홈으로 송구도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분명히 태그가 먼저일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는데 세이프라니 말도 안 되는 판정이다. 당연히 아웃이다. 심판이 잘못 본 게 틀림없다.
‘확실히 우리 팀 야수들이 빳따질은 좀 그래도 수비 하나는 죽이지.’
‘허! 저게 뭐야.’
구장 전광판에 리플레이 장면이 천천히 재생되고 있었다.
“아! 이건···”
정말 사람 눈은 확실히 불완전하다.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은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 화면상으로는 포수의 태그와 주자가 홈 플레이트 짚는 것이 거의 동시처럼 보여진다. 어떤 판정이 내려져도 이제 심판 탓은 못하겠다.
‘하아! 포수의 미스였나?’
완벽한 아웃 타이밍에서 주자를 잡아내지 못했다면 그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다. 시빗거리를 만드는 건 근본적으로 잘못된 플레이다.
숨 쉬는 것도 조심했던 짧지만 긴 기다림이 끝났다. 열렬히 세이프를 외치던 관중도 숨을 죽였다.
마이크를 든 심판이 홈 플레이트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앞에 섰다.
“세이프.”
짧은 한 단어였지만 그 뜻은 명백했다. 9회 역전 끝내기 패배를 당해버렸다.
‘하핫. 나 참! 일이 이렇게 꼬이나!’
오늘 이겼다면 내일 경기의 승패에 상관없이 플레이오프 진출 확정이었다. 이젠 상황이 많이 복잡해졌다.
‘내일 등판 준비나 할 걸 괜히 보러 나왔어.’
그라운드에선 홈 관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필리스 선수들이 역전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나는 믿었었다, 우리 팀이 5연승으로 머리 아픈 계산 할 필요 없이 깨끗하게 와일드카드를 손에 넣을 줄 알았다.
‘하! 설마 내가 직관을 해서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이런 일까지 드라마틱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제 내일 진짜 드라마를 찍어야 한다. 제발 해피엔딩이길 기원한다.
우리 선수들은 얼이 빠진 듯 덕아웃으로 들어올 생각도 못하고 수비 위치에서 넋을 놓고 있었다. 안드레는 나라 잃은 표정으로 마운드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포수 프레디는 홈 플레이트 위에 엎드린 채 미동도 없다.
그 사이를 필리스 선수들이 기쁨에 넘쳐 뛰어다니고 있었다. 실의 사이로 기쁨이 얼핏얼핏 보일 때마다 가슴엔 찬바람이 일었다.
‘정말 지랄 같은 기분이네.’
누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고 했다는데 지금 이 광경을 봤으면 말이 좀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로소 긴 악몽에서 깨어난 듯 우리 선수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하나둘씩 덕아웃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참! 걱정이야. 이래 가지고 내일 경기를 어떻게···’
“어깨 펴. 아직 안 끝났어. 내일 이기면 돼. 내일 우리 투수는 So야. 결말이 하루 미뤄졌을 뿐이야. 우리가 내일 어떻게 지겠어. So의 이번 시즌 ERA는 1.74잖아. 우리는 내일 2점만 내면 승리 확정이라고.”
감독이 애써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노력했지만, 선수들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분위기 끝내주네. 다들 뭘 걱정해? 내일 기본이 완봉인데 2점은 무슨 2점이야? 1점만 내라구. 내가 내일 필리스 타자들 다 씹어 먹을 테니까.”
과장을 좀 보태서 우쭐거리듯 질러 버렸다. 나서고 싶진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야! 넌 내일 빈볼이나 던지지 마. 너만 퇴장 안 당하면 우리가 이기긴 이기겠지. 필리스에게 이따위로 당하는 건 짜증 난다고. 저것들을···”
레블론이 겨우 맞장구를 쳐준다. 그는 시즌 막바지에 복귀해 큰 힘이 되어주었다. 팀의 4연승은 지난 며칠간 그의 맹타 덕분일지도 모른다. 오늘도 타점을 올렸다. 그도 자신에게 상해를 가했던 필리스를 박살 내고 싶었을 거다.
“크큭. 심판들이 너 찍었다는 소문이 있어. 컨트롤 하나는 리그 최고라고. 글래빈보다 나은 것 같다고 했다네. 조심해. 넌 빈볼 던지면 바로 퇴장이야.”
필도 기분을 털어내려는 듯 말장난에 끼어들었다.
“비교 대상이 적당하지 않잖아요. 페드로라면 몰라도 글래빈은···”
선수들은 우스갯소리로 듣겠지만 이건 진심이다. 나의 비교 대상은 쿠펙스, 페드로 정도는 되어야 한다.
자화자찬을 하려니 얼굴이 뜨겁지만, 분위기 전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다.
“90마일도 제대로 못 던지는 페드로가 어디 있어? 페드로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So는 내일 페드로처럼 던질 거야. 물론 스타일은 매덕스지만.”
겨우 분위기가 좀 돌아온다. 차라리 9이닝 완봉이 낫지 이건 너무 힘들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내일 안타나 몇 개 쳐줘요. 홈런이면 더 좋고···”
“하핫.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따져보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마구 지껄인 셈이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 이 분위기를 내일까지 끌고 가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공감대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숨 돌렸다.
“So."
겨우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락커로 가려는데 누가 날 부른다.
‘허! 오늘 정말···’
정말 놀랐다. 과묵한 에이스 소르카가 나를 먼저 부르다니 별일 다 생기는 날이다.
“내일 부탁해.”
간단한 말이지만 수많은 의미가 느껴진다.
“걱정 마. 내일은 이길 거야.”
우리 1선발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진짜 나도 많이 컸다.
***
1위 백스 91승 70패 승률 0.562 잔여 경기 자이언츠 로키스 2승 3패 - 와일드카드 확정
2위 파드리스 91승 70패 승률 0.562 잔여 경기 로키스, 컵스 3승 2패 - 와일드카드 확정
3위 자이언츠 89승 72패 승률 0.555 잔여 경기 백스, 필리스 4승 1패
4위 필리스 88승 73패 승률 0.546 잔여 경기 메츠, 자이언츠 1승 4패
5위 컵스 88승 73패 승률 0.546 잔여 경기 카디널즈, 파드리스 2승 3패
와일드카드 후보의 지난 5경기 성적이다. 이제 모든 팀이 단 한 경기만을 남기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 게임에서 가려지게 되었다. 만약 내일 지면 와일드카드 결정전을 다시 치러야 한다. 컵스가 이기면 3팀이 동률이 된다. 그건 진짜 최악이다.
오늘 이겼어야 했다. 그랬다면 모든 것이 순조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해리스의 머릿속에서 자꾸 되풀이되고 있었다.
“오늘 너무 아쉽네요. 9회 말에··· 휴우! 정말 마음대로 안 되네요. 내가 안드레는 2이닝 쓰면 안 된다고 얼마나 이야기를 했는데 감독이 무슨 투수 운용을 그따위로··· 어휴!”
해리스 사장은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라드 감독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죠. 우리가 보내준 자료를 그도 다 알고 있었는데 그랬다는 건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한 번 졌을 뿐입니다. 이번 주 뚝심 있게 4연승을 해냈잖습니까? 한 번 맡겼으면 끝까지 믿어 봐야겠죠.”
“저도 억지로 참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이겼으면 그냥 끝나는 건데··· 플레이오프에서 투수 로테이션도···”
오늘 이겼더라면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아주 커졌을 텐데 정말 아쉽다. 단기전의 최종병기라는 절대적인 에이스 두 명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막상 플레이오프에 진출해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일이 결국 꼬이고 말았다.
해리스는 마음이 자꾸 급해졌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자신이 사장에 취임한 이후 최고의 날이 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마지막 한 이닝에 날아가 버린 아쉬움이 잘 극복되지 않는다.
“내일은 이길 수 있습니다. 필리스는 어제와 오늘 1, 2선발을 다 소모했지요. 매 게임 총력전을 펼쳐 불펜의 소모도 많았습니다. 내일 우리 선발 So를 생각한다면 절대적으로 우리가 우세합니다.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포스트 시즌에 절대란 것은 없다. 수많은 세월 속에서 수없이 겪은 일이었지만, 윌리스는 그 사실을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삼자 동률 상황이 나오게 되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이깁니다.”
단장은 사장의 말을 사정없이 잘라 버렸다.
“흐흣. 윌. 이깁시다. 그렇게 믿겠습니다. 그리고 내년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타자 보강을 해야겠습니다.”
해리스 사장은 이빨을 악물었다.
“시즌 후반에 가능성을 보여준 신참들이 좀 있지 않았습니까? 베그웰도 많이 성장했지요. 다음 시즌에 더 나은 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말씀대로 타자 한둘만 보강하면···”
이 고비만 넘기면 무엇인가 이루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윌리스 단장의 몸을 떨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