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분위기 묘하네
마크는 평소 그대로였다. 어젯밤 투구 준비 루틴에 어긋나는 일을 한 게 틀림없는데 아무 상관없다는 듯 또박또박 자기 공을 던지고 있었다.
‘6이닝 3실점이면···’
은근히 신경 쓰였는데 다행이다.
우리 타선은 평소와 다름없다.
‘당연하지. 단합대회 한 번 했다고 갑자기 타격이 어떻게 확 바뀌겠어.’
1:3으로 경기는 끌려가고 있었다. 뜬금포 한 방으로 1점을 내긴 했지만 2안타밖에 못 쳐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별거 아닌 상대 투수에게 꽁꽁 묶여있다.
팀이 확 바뀌진 않았지만, 변화는 내게 있었다. 덕아웃에서 대화상대가 되어주던 베그웰이 선발 출장했지만 별로 심심하지 않았다. 어젯밤 만났던 선수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이것도 괜찮네. 게임이야··· 음. 베그웰이 출장 기회를 얻었으면 됐지. 어제 결승타를 친 게 효과가 있는 건가?’
누구라도 잘되면 된다. 지금도 6회 말 선두 타자로 나서 안타를··· 오늘 2타수 2안타다.
‘헉! 이게 무슨 일이야? 베그웰이 이럴 수가··· 오늘이 누구든 평생에 한 번은 찾아온다는 그날인가?’
그가 한 게임에서 2안타 치는 건 그를 안 이후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래 이제 좀 칠 때가 되긴 됐어. 타격감 죽이지 말고 내일도··· 그런데 출장할 수 있을까?’
주전 포수 프레디는 덕아웃 중앙 난간에 기대어 베그웰의 안타에 여유만만하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 정도 상황에 구태여 그를 찾아본 내가 부끄럽다.
‘에고, 베그웰 저 사람에게 넌 아직 경쟁자가 아닌 모양이야.’
타석에 나선 타자들이 어제와는 달리 좀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진루타를 하나 쳐내 주자를 2루에 보낸 것으로 벌써 투 아웃이다. 그것도 자칫했으면 더블플레이가 될 뻔했다.
‘애는 쓰는 것 같은데 참 안타깝네.’
타악-
“헐!”
평소에 5번을 치다가 오늘은 3번 타자로 나선 필이 해냈다. 맞으면 장타가 나오지만 대부분 선풍기 돌리다 끝나는 게 일상인 무늬만 좋은 파워 타자였는데 웬일로 욕심내지 않고 밀어서 깨끗한 우전 안타를 만들었다. 시프트가 없었다면 2루 땅볼이기는 했지만.
‘이럴 수가 있나? 어제 공 맞은 부위가 머리였던 거 아니야?’
데뷔시즌부터 내셔널 리그 7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던 랄프 카이너라는 이름은 대개의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그가 한 말은 아주 잘 알려져 있다.
‘홈런왕은 캐딜락을 타고, 타격왕은 포드를 탄다.’ 이 말은 많이 회자된다. 카이너는 부상으로 긴 선수 생활을 하지는 못했지만, 단기간의 임펙트만으로는 여느 타자 못지않다. 그는 통산 14.11타수당 1개의 홈런을 쳐냈다. 이건 역대 5위의 기록이다.
‘테드 윌리암스, 행크 아론도 한참 뒤에 있지.’
필은 그 말을 신봉했다. 팀 배팅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다. 한결같은 풀스윙과 당겨치기. 시프트를 야수들이 반응할 수 없는 더 빠르고 강한 타구로 뚫거나 넘기면 된다는 식의 타격을 해왔다.
문제는 필이 카이너보다 홈런 수는 많이 적고 삼진은 비교할 수 없이 많다는 것 정도다. 카이너와 비교는 당연히 안 되고 하위호환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통산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너는 홈런왕을 차지한 7시즌 중 3시즌 3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했고 출루율 4할 이상의 시즌도 네 시즌이나 있었다. 삼진도 아주 적었다. 정교함과 선구안을 갖춘 홈런타자였다. 볼넷은 많고 삼진은 아주 적은 이상적인 타격 스텟을 가졌다.
필은 타격이 정교하지도 않았고 선구안도 별로였다. 물론 힘은 아주 좋았다. 그에게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랬던 필이 밀어 쳤다. 상대 투수는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필의 10년에 가까운 빅리그 선수 생활 기간 동안 그런 데이터 자체가 없었으니···
‘이게 뭐야? 내가 모르는 사이에 천지가 개벽했나?’
나의 황당함과는 별개로 베그웰은 재빠른 주루로 홈까지 여유 있게 들어와 1점을 올렸다.
스코어는 2:3. 상당히 멀어 보였던 승리가 갑자기 박빙의 승부처럼 느껴진다.
‘뭐! 가끔 이런 일도 있는 거지 매일 야구하다 보면 별일이 다 생기잖아. 어쨌든 느낌 좋네.’
내 기분 탓인지 우리 덕아웃 분위기가 상당히 활기차 보인다. 선수들이 1점을 내고 들어온 베그웰에게 손을 맞대며 열렬한 환대를 하고 있었다.
베그웰이 활짝 웃으며 내 앞까지 왔다.
‘계속 좀 이렇게 해봐.’
“나이스. 브로. 오늘 좀 치는군.”
그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축하를 해줬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이것쯤이야 문제없다.
“하핫. 아직 모르겠어. 특별히 달라진 것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잘되네.”
기쁨에 넘쳐 있지만 신중한 어조였다. 시즌 초의 자신감 넘치던 말투와는 사뭇 다르다.
‘진짜 뭐가 되려는 거야? 왜 이렇게 말을 아끼지?’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지금은 순수하게 친구의 플레이를 축하해 주고 싶다.
필의 한 방으로 턱 끝까지 따라온 우리 팀의 선전에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필리스가 투수교체를 했다. 필의 일격이 상대 선발을 끌어내렸다.
‘쩝! 아쉽네. 놔뒀으면 어쩌면 한 방 더··· 에고, 바랄 걸 바라야지. 이 정도로도 충분히···’
2사 1루에서 쓸데없는 기대감이 들고 있다. 오늘 4번으로 나선 스테판이 뭔가 해낼 것 같은···
“스테판. 한 방 날려. 여기서 끝내 버리자구.”
덕아웃 난간에 엎드리듯 기댄 누군가 고함을 지른다.
좀 낯설다. 이런 분위기는··· 전에도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확실히 오늘은 무엇인가 다르다. 어딘지 모르게 모두들 흥이 올라있다. 진짜 여기서 스테판이 한 방 터트리면 춤이라도 출 기세인 선수들이 몇 보인다.
스테판은 투 스트라이크 이후 공을 커트해 내며 끈질김을 보여줬지만 결국 삼진으로 물러났다.
‘쩝! 실망하지 말아야지. 애초에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실망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 아!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프냐. 응? 그런데 왜 분위기가 죽지 않지? 이게···’
앞쪽에서 이상한 말이 들린다.
“괜찮아. 한 점 차이야. 어제도 이러다 뒤집었잖아. 아직 공격 세 번 남았어. 오늘은 대타로 안 쓰려나? 한 방 먹여줄 수 있는데···”
말하면서 힐끔힐끔 감독 쪽을 바라본다.
“나가면 내가 나가야지. 넌 어제 나갔잖아. 나도 기회 한번 받고 싶다고.”
‘쟤들이 알버트와 행크였었나?’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확장 로스터로 올라온 선수들이다. 나름 소리를 죽여 대화를 하는 것 같았지만 다 들린다. 콜업 후 경기에 출전한 선수도 있고 아직 출전기회를 얻지 못한 선수도 있었다.
‘이 친구들에게는 우리가 순위 경쟁을 포기해야 기회가 더 가는 거 아닌가? 말하는 게 꼭 이겨야 하는 것처럼 하네. 내 생각이 이상한 건가?’
팀은 아직 와일드카드에 대한 가느다란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 모험을 피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검증된 선수를 우선시하게 된다. 신인은 기회를 얻기가 어렵다.
‘어제 9회에 대타로 나와 2루타를 쳐낸 신참이 있다고 하더니 쟤였나 보네.’
우리 감독의 야구관은 올드 스쿨이다. 그런 감독이 어제는 웬일로 마지막 공격에서 모험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저 친구는 그동안 조용히 있더니 어제 한 방 때렸다고 완전히 기가 산 모습이다.
“나이스!”
“OK."
신참 둘이 일어서 기쁨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마운드에서는 드로이넨이 삼진을 잡고 환호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평소보다 리액션이 좀 더 커진 것 같다. 내가 아는 드로이넨은 마운드에서 감정표출을 자제하는 스타일이었다.
오늘 모든 것이 평소와 뭔가 미묘하게 다르다. 아마 어제 극적인 역전승이 오늘 선수들의 텐션에 영향을 끼친 것 같다.
‘그래. 이게 나쁜 건 아니야. 승리도 습관이고 1등도 해본 놈이 하는 거라던데 의욕이 있으면 좋은 거지.’
아마 이 스코어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이 신참들에게 오늘 또 기회가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게임이 흘러가는··· 어?’
흐름이니 기세니 하는 말은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다고 고 감독은 말했었다. 감정이 실린 단어라고. 그런 걸 믿으면 운에 의지하게 된다고. 그런데 지금 우리 팀의 이 모습은 전형적인 하위 팀이 기세를 탔을 때 나오는 모습인 것 같다.
‘아무려면 어때. 실력이 안 되면 운이라도 믿어 봐야지.’
나도 생각을 바꿔야 할 것 같다.
“마크. 나이스!”
일단 나부터 한 방.
“야! 니들 뭐 해. 마크가 스트라이크 잡았잖아.”
머리 두 개가 뒤를 획 돌아본다. 눈이 동그래져 있다. 내가 말 거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좀 오버한다.
“So. 우리에게 말한 거야?”
“그럼. 내가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그렇게 했겠어? 내가 그 정도로 미친놈은 아냐.”
“크크큭.”
“헉! 컥컥. 히히힛.”
어제 알았다. 베그웰에게 들었다. 내가 팀에서 크레이지 보이라고 불린다는 걸. 그 눈물 사건 이전부터 진지한 의미는 아니고 농담조로 그렇게 불렸다는데 그다지 감흥은 없다.
사람이 좀 빈 구석이 있어야 인망을 얻는다고 우리 엄마가 말씀하셨다. 똑똑하고 빈틈없는 사람이라고 불리는 건 피해야 한다 하셨다. 그건 싸가지 없다란 말이 뒤에 세트로 붙게 된다고.
“뭐 우스운 일이라고. 내가 웃기냐? 지금 마크가 잘 던졌잖아. 그럼 뭘 해야 하지?”
“나이스···”
“크게 좀 해봐. 안 들리잖아. 다시.”
대한민국 군대에서는 많은 걸 배우게 된다.
“나이스!”
“그래 잘했어. 이제 마크가 스트라이크 잡으면 뭘 해야지?”
“나이스!”
“OK. 내가 신인 때는··· 헉! 아니 이건 말이 헛나왔네. 신경 쓸 거 없어. 잊어도 돼.”
이건 고 감독이나 할 법한 말이다. 내가 벌써부터 이래서는 안 된다.
“나이스!”
7이닝 3실점으로 드로이넨은 잘 던졌다.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다. 7회까지 이 정도면 이 게임도 승리의 가능성이 있다. 우리 팀의 8회와 9회를 책임질 프라이머리 셋업맨과 클로저는 상당히 안정적이다.
‘체이스와 안드레라면··· 타자 놈들아 한 점만 더 내 보라고.’
열심히 응원했지만, 우리 팀의 8회 공격은 허무하게 끝났다.
‘아! 오늘은 안 되나?’
모두의 입이 다물어졌다. 생각대로 체이스와 안드레는 8, 9회를 잘 막아냈다. 그런데 9회말 1사까지 아직 그 1점을 못 내고 있다.
6번 자리에 대타가 나갔다. 감독 눈에 어제 기억이 아른거렸나 보다. 신참이 기회를 또 받았다.
“행크. 뭐 해?”
“나이스!”
“그거 말고 없어?”
“크크큭. So. 애 좀 그만 잡아.”
드로이넨이 아이싱을 끝내고 내 옆에 앉아 있었다.
“무슨 말 하는 거야. 마크. 내가 언제···”
7이닝 3실점 패전 위기가 눈앞에 있는데 드로이넨은 너무 한가한 말을 한다.
타악-
“헉!”
“저거··· 저거···”
크고 아름다운 포물선이 그대로 담장을 넘었다.
“Oh. YESSSS.”
“나이스! 알버트. 나이스!”
“저놈··· 하핫.”
동점이다.
‘하! 진작 좀 잘하지. 그래도 어떻게 하나 때려내긴 하네. 그런데 알버트 저놈은 이게 실력이야 운이야?’
이쯤 되면 운이라도 실력이다.
덕아웃은 이미 흥분의 도가니다. 광란의 춤사위가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들 미쳐 날뛴다.
‘크레이지 보이에게 딱 어울리는 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