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66화 (66/200)

66화. 이게 효과가 있을까?

“어! 왔어? 피곤하지는 않아?”

‘헉! 케빈 데스클레니? 이 사람이 왜?’

우리 3선발 아니, 3선발이었다가 부상으로 쉬고 있는 투수조 최고참이 날 찾아왔다. 기억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건 당연했다. 그와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훈련 시간 중 간단한 질문과 대답 그게 다였다.

“나도 왔어.”

‘로저스 이 녀석은 안 끼는 데가 없어.’

그의 주변으로 의자가 작아 보이는 덩치 큰 사람들이 주르륵 보인다. 선발 투수, 불펜 쪽 인원에 야수 몇 명까지 있다.

‘이 야밤에 무슨 일이지? 내일 선발로 나가야 하는 마크 드로이넨은 왜 온 거야?’

“아··· 무슨 일이신지···”

얼떨결에 케빈과 악수를 하면서 멍청한 말을 해버렸다.

‘에고고, 생각 좀 하고 말하자. 아무리 놀랐어도 그렇지. 내일 게임도 있는데 왜 왔겠어.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왔겠지. 일단 입 다물고 이야기나 들어보고··· 일단 몸은 좀 나아졌나 이런 걸로 인사를 텄어야 했는데···’

아직도 난 사회성이 많이 모자란다.

“일단 좀 앉지.”

케빈의 말에 선수들 사이에 대충 끼어 앉았다. 미리 호텔 측에 무슨 말을 해 놓은 건지 바에는 우리 일행 외의 다른 손님은 없었다.

“SO. 오늘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었어. 하지만 감명 받았네. 어쩌면 당연한 일을 한 건데 생각해보니 그 당연한 일을 그동안 우리가 못하고 있었지.”

케빈이 앞으로 나와 나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건 저···”

이런 이야기는 좀 민망하다.

“오늘 레블론이 쓰러졌을 때 아무도 바로 행동에 나선 사람이 없었어. 그냥 주변 눈치만 보다가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대충 넘어갔지. 필이 쓰러졌을 때야 겨우 몇 명이 나섰을 뿐이야. 다른 선수들은 웅성이며 주변을 채웠을 뿐이고 진짜 분노한 선수는 내 눈에 거의 안 보이더군.”

모두의 고개가 끄덕인다. 나도 장단을 맞춰야 하는 분위기인 것 같아서 덩달아···.

‘부상으로 쉬는 아저씨가 별걸 다 신경 쓰시네.’

“우린 팀 스포츠를 하고 있는데 그런 걸 정상적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않겠어?. 각자 사정이야 다 있겠지. 우리가 뛰는 그라운드는 프로의 세계이기도 하니까. 포지션 경쟁, 개인 성적, FA계약 다 외면할 수 없는 이유지. 어쩌면 그게 현명한 처신이라고 생각해. 그걸 탓할 생각은 없어.”

이건 하나 마나 한 말이다. 팀에서 선수 개개인의 사정을 다 챙겨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각자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감정과 현실의 균형을 잘 맞춰 컨트롤해야 한다.

“하지만 팬들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그들에게는 팀이 우선이야. 그들에게 팀의 가치는 우리 개개인보다 앞에 있어. 이걸 부인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네.”

“그렇긴 하죠.”

누구에게서 떨떠름하게 느껴지는 대답이 나왔다.

“오늘 관중들이 합창할 때 가슴이 찌릿찌릿하더라고. 우리가 하는 야구가 단순한 공놀이가 아닌 건 그들이 있기 때문이야. 그들은 우리에게 뭘 바랄까? 예전에는 승리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생각이 좀 바뀌었어.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것 같더군.”

그건 나도 그랬다.

“다시 생각을 해봤어. 오늘 레블론에게 일이 생겼을 때 미루지 말고 그때 확실한 대처를 해냈다면 필까지 일이 연결되었을까? 그랬다면 So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다.

“지금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더군, 그래서 모두에게 다 연락을 했지. 팀 플레이어로서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 모두가 다 모인 건 아니지만··· 각자의 사정은 다 다르니까 오지 않은 선수들을 비난하지는 말자구.”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지금 케빈의 말은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모인 선수들 대부분이 팜 출신이잖아. 케빈도 프랜차이즈 선수이고··· 지금 이런 게 파벌 아닌가? 그리고 케빈 본인부터 올 시즌이 계약 마지막 해잖아. 이제껏 무관심하다 웬 변덕이야?’

나는 지금의 우리 팀 분위기가 좋다. 특별히 누가 나서지도 않고 각자 알아서 자기 일만 하면 되는 좋은 환경이다. 텃세도 없고 특별히 누굴 배척하지도 않는다. 내 스타일에 최적화된 팀이라 생각하며 지금까지 아주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었지만 지금 그것을 표현할 수는 없다. 그건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아주 부적절한 행동이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팀의 최고참이 앞에서 저렇게 열정을 가지고 진지한 어조로 현실의 개선을 말하는데 거기에 대고 그게 맞다 틀리다를 이야기한다? 어렵다.

“여기 모인 선수들만이라도 앞장서 준다면 흐름을 만들 수 있어. 그렇게 된다면 모두들 자연스럽게 따를 것이라고 믿네. 좀 더 나은 팀이 되는 거야. 그리고 오늘 So의 행동은 바보짓이었지만 박수 받을 만했지. 나도 한 사람의 팀원으로서 감사하게 생각하네. 우리는 팀이야. 서로를 도와야 해.”

박수가 나온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 이 자리가 자이언츠의 가장 큰 파벌 탄생을 알리는 시작일지도 모르지만, 오늘 내 행동과 팬들의 반응이 이들에게 어떤 울림을 주긴 한 것 같다.

‘원인 제공자가 나인가? 어쨌든 나에게 호의적인데 굳이 나쁜 일은 아니지. 그냥 입 다물고 대세에 편승을··· 음.’

“몸빵은 자신 있었는데 오늘 아무도 안 나서길래 괜히 혼자서 어쩌구 하기도 그렇고 해서 가만있었더니 바로 내가 맞을 줄은 몰랐지. 이젠 그렇게 얕보이진 말아야 해.”

1루수 필이었다.

‘이젠 자아비판 시간인가?’

“당신은 가죽이 두꺼워서 별 타격도 없었잖아요.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었던 것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이제 그런 일은 다시 없을 테니까. 나도 이제부터는 거침없이···”

‘하! 로저스, 분위기 좀 살펴가면서··· 넌 좀 머리 박고 있으라구. 고참들 노는 데 끼지 마. 넌 아직 FA 되려면 한참 남았잖아. 괜히 나서서 프런트에 찍히지 말고··· 내 동생만 되었어도 한 대 쥐어박을 텐데 그럴 수도 없고···’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 베그웰은 여기 왜 없지?’

베그웰도 자이언츠 팜 출신이고 평소에 이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고 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이들과 불편한 게 있었나?’

“어! 좀 늦었네. 서두르긴 했는데···”

호랑이인 척하는 고양이 등장이다. 베그웰이 너스레를 떨며 바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왔어? 레블론은 좀 어때?”

케빈이 묻는 걸로 봐서는 레블론은 병원에 다녀온 것 같다.

“갈비뼈에 금 갔대. 전치 약 3주라는데··· 다 나아도 컨디션 올리려면 며칠 걸리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시즌은 끝났지. 본인은 괜찮다고 하는데 의지가 있다고 경기에 뛸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팀의 막판 와일드카드 경쟁에는 치명적이겠지만 몸은 그 정도면 괜찮은 편이야.”

“맨날 쉬고 싶다고 하더니 이번에 푹 쉬겠네. 그 자식 소원성취해서 너 보내고 기뻐서 혼자 웃었을지도 몰라. 아이삭 내일부터 너 주전이래. 단단히 마음먹어라.”

“정당한 경쟁으로 이기고 싶었는데 할 수 없죠. 이제 제 시대가 열리나 봅니다.”

필과 백업 역할을 하던 외야수 간에 가벼운 농담조의 말이 오갔다.

‘미친놈, 2할 2푼 치면서 어지간히 잘 밀어냈겠다. 그래도 기회가 생겼으니 잘해 봐.’

둘 다 말본새가 그리 곱지 못했지만 별다른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그 정도면 불행 중 다행이네. 나하고 복귀 시기가 비슷하겠는데···”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케빈이 뭔가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설마 플레이오프 가자는 뜻인 거야?’

수치상 충분히 가능하고 이 정도 성적에서 승률이 수직상승해 포스트 시즌에 나간 팀이 없진 않다. 그렇지만 지금부터 한 달간 최소 6할 6푼의 승률을 올려야 하는데 이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잘 단합해서 남은 시즌 잘 마무리하자는 말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거겠지.’

시즌 162 경기를 치르는 MLB의 현재 시스템에서 각 리그 1위를 하려면 보통 100승 내외를 하면 된다. 그게 승률 6할 1푼 7리다.

승률 6할 6푼은 우승팀 이상의 페이스를 보여야 한다. 단기간이라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연승이 필요한데 냉정하게 판단하면 현재 우리 팀 전력으로 긴 연승은 어렵다.

자이언츠의 연승 기록은 17승이다. 그건 무려 1916년에 생긴 일이다. 본즈가 있을 때도 그런 건 못했다.

‘아무리 야구가 멘탈 스포츠라지만 으쌰으쌰 한 번 했다고 그런 게 된다고? 케빈이 그냥 이대로 은퇴하는 게 아쉬워서 하는 얘기겠지.’

케빈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그거 준비됐지?”

“응. 들어오면서 이야기했어.”

암호 같은 말이 케빈과 베그웰 사이에 오갔다.

‘뭘 준비했다는 거야?’

궁금증은 곧 풀렸다. 맥주가 가득 실린 수레가 등장했다.

‘자! 건배 한번 하자고. 이제 집에 가야지. 내일 경기해야 하잖아. 오늘은 이걸로 끝내고 플레이오프 진출하면 내가 거창하게 한번 대접할게.’

맥주병이 나눠지는 것을 보면서도 지금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플레이오프라··· 내 생각이야 어떻든 분위기는 깨지 말아야지.’

“내일부터 달리자.”

케빈이 선창했다. 멘트가 정말 구리다.

‘달리긴 뭘 달려. 그동안 기어 다녔나?’

“내일부터 달리자.”

모두들 따라 외치더니 맥주를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켰다. 분위기에 휩싸여 나도···

‘이게 얼마 만의 맥주야. 은퇴하기 전까지는 안 마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정말 분위기 깨기 싫어 마신 거다. 맛은 있다.

‘야밤에 도깨비놀음 한번 잘하네. 이런 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쩝!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제 다들 그냥 집에 가면 되는데 바를 나가기 전 내 앞으로 모여들었다.

“So. 오늘 정말 아쉬웠어. 또 기회가 있을 거야.”

와락-

거센 포옹에 몸들 바를 모르겠다.

‘필. 에구구, 이런 건 좀···’

“Bro. 오늘 멋졌어. 존경하기로 했어.”

‘헐! 로저스 넌 그런 거 하지 마라.’

“So. 대화는 별로 못 해봤지만, 오늘 감명 깊었어.”

내일 당장 출전해야 하는 선발 투수까지 이러니 정말 민망하다.

“마크. 내일 선발인데 괜찮겠어?”

“힘껏 던지면 다른 선수들이 도와주겠지.”

모두들 한 마디씩 해주고 떠나는데 이제껏 야구하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묘한 감정이 올라와 몹시 당황스럽다.

“베그웰. 넌 자고 가라.”

“뭐? 난 그런 취향이···”

베그웰의 손이 가슴으로 올라와 있다.

“농담하지 말고··· 호텔에 말해서 니 방 하나 열어 줄게. 나 가고 나서 경기 이야기나 좀 해줘.”

사실 좀 궁금했다. 베그웰이 결승타를 쳤다는데 오늘 그 자리에 없어 너무 아쉽기도 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선수들을 다 돌아가니까 왠지 허전하기도 하고 누구라도 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그냥 이 기분 그대로 대화를 나눌 상대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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