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65화 (65/200)

65화. 나는 아무렇지 않다

레블론은 비틀거리면서 1루까지 간 뒤 바로 대주자로 교체되었다. 덕아웃으로 돌아오지 않고 바로 경기장 밖으로 나가는 걸로 봐서는 심상치 않은 부상인 것 같다.

“나 참! 우리 팀 주포가···”

경기의 일부라고 생각하기에는 걱정에 앞서 너무 짜증스럽다. 소란스러움이 한동안 지속되었지만 그래도 경기는 계속된다.

5번 타자 1루수 필이 타석에 섰다.

퍽-

작정하고 옆구리를 향해 던져진 공이었지만, 다행히 타자가 몸을 돌려 충격이 좀 덜한 등으로 맞았다.

공 두 개로 두 명을 맞혔다. 이건 빼박이다. 여기서 더 이상 무엇을 이해해야 할까?

“아 놔! 저것들이 진짜···”

뒤에서 누군가의 팔이 앞으로 나서려는 내 몸을 붙잡았다.

“야! 베그웰 단단히 잡고 있어. 이건 우리가 처리할 테니까 풀어주지 마.”

선수들이 다 달려나갔다.

필은 좋은 아저씨였다. 내 퍼펙트의 마지막 아웃 카운트도 멋진 플레이로 그가 잡아줬다.

‘좋아! 조금만 더 참아준다. 이것들 정말 안 되겠네. 어디 두고 보자.’

난장판은 상대 투수와 우리 팀 선수 두 명의 퇴장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아! 완전 손해 봤네. 우린 야수 셋이 빠졌는데 저쪽은 6회까지 던질 만큼 던진 선발 투수 하나 빠지고 그만이야?’

투수의 퇴장은 팀으로서 별 손해가 없다. 보통 빈볼로 인한 퇴장은 출장 정지 3일이고 길어봐야 5일이다. 어차피 저렇게 던진 선발 투수는 4일간 경기에 나올 일이 없다.

노 아웃에 주자 1, 2루가 되었지만 역시 우리 타선은 도저히 어떻게 표현하기가 어렵다. 이 상황에서도 시원한 한 방을 날리지 못하고 헛스윙으로 일관한다.

‘일단 공을 맞혀야 홈런이든 안타든 나오는 거지. 이건 뭐··· 하아! 공격이 이렇게 된 건 어수선한 분위기 탓이야. 흥분이 지나쳐서···’

공수교대 후 마운드로 향하는데 별생각이 다 든다. 억지다. 흥분은 필리스 선수들도 했다. 나도 안다. 이걸로 자기 합리화를 하기에는 설득력이 모자란다고 나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럴 땐 억지라도 부리고 싶다.

‘여기서 뭔가 보여줘야 해.’

이렇게 밀리면 팀도 문제고 길게 선수 생활을 해야 할 내 개인적으로도 좋지 못한 주홍글씨가 새겨질 수 있다.

‘빌어먹을··· 내 팔자에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지금으로도 충분하잖아. 최고의 리그에서 야구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돈도 먹고살 만큼은 받잖아. 한두 시즌만 더 지나면 연봉 조정도 할 수 있다고 까짓거 이런 상황이라고 쫄 필요 없어.’

타석에 선 타자를 째려봤다. 베그웰은 연신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내 기록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선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당분간 이사는 못하겠네.’

호텔도 살만하다. 이것저것 신경 쓸 거 없어 편하고···

퍽-

한순간 모두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엉덩이에 공을 맞은 타자마저 어이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엉덩이 쪽으로 던졌다. 머리나 옆구리는 차마···

‘왜? 이런 상황에서는 못 던질 줄 알았어? 하아! 왜 이렇게 슬프냐. 시원할 줄 알았는데··· 아쉬운 김에 노히트라도···’

“퇴장!”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다.

“뭐? 필리스는 한 번은 봐 줬잖아. 난 왜 바로 퇴장이야. 이건 아니지.”

심판이면 일관성 있게 판정을 해야 하는 건데 진짜 이건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 앞으로 달려나가며 주심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런 억울한 일은 참을 수가 없다.

“이런 미친놈···”

내 고함에 대한 답은 그때까지 멀뚱히 서 있던 타자에게서 나왔다.

“심판은 가만히 있는데 니가 왜 지랄이세요. 넌 빨리 1루로 안 가고 뭐 하냐?’

열 받는데 타자 놈이 성질을 건드린다.

“뭐? 허헛. 이거 완전히···”

내게 공 맞은 타자는 화를 내기보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쪽을 택했다.

“이놈이··· 이거 안 놔?”

베그웰이 뭔가 방향을 착각한 것 같다.

‘왜 자꾸 나를 붙잡냐고.’

주심은 나와 말 섞기가 싫은 것 같았다. 그냥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만 있다.

반응은 관중석에서 나왔다. 침묵하던 관중석에서 갑자기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잘했어.”

“미쳤다고 해서 가십인 줄 알았더니 진짜 맞나 보네.”

The loveliness of Paris

(파리의 아름다움은)

Seems somehow sadly gay

(어쩐지 슬프도록 화려하게 여겨지고)

The glory that was Rome

(로마의 영광은)

Is of another day

(지난날의 얘기일 뿐이죠.)

I’ve been terribly alone

(난 지독한 외로움을 느껴왔고)

And forgotten in Manhattan

(맨해튼에서 잊혀진 존재죠.)

I'm going home to my city by the bay

(나 바닷가 고향으로 돌아가요.)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난 내 마음을 샌프란시스코에 두고 왔어요.)

-토니 베넷-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느 순간부터 모든 관중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작았던 소리가 점점 커져 이제는 구장을 울리며 하늘로 퍼져나간다.

자이언츠가 승리를 거둘 때마다 구장에서 틀어주는 노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진다.

주심에게 소리 지르던 걸 멈추고 조용히 돌아섰다. 열이 식어버렸다.

“자네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군. 이건···”

어필을 위해 뛰쳐나왔던 라드 감독은 심판에게 뭐라고 할듯하다 그냥 고개를 돌렸다. 감독도 나도 더 이상은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감독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냥 내 할 일을 했다. 그뿐이다. 감독과 어깨를 맞대고 덕아웃으로 들어왔다.

‘So. 왜 그랬어. 이 장면에서··· 어우!’

로저스를 제외하고는 모두들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나 퇴장이야. 지금 바로 나가야 하니까. 짧게 말할게. 오늘 잘해라. 꼭 이기라고.”

모양새를 갖추고 덕아웃을 빠져나갔다.

우리 엄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네 믿음은 네 생각이 된다. 네 생각은 네 말이 된다. 네 말은 네 행동이 된다. 네 행동은 네 습관이 된다. 네 습관은 네 가치가 된다. 네 가치는 네 운명이 된다.’ 오늘 나는 새로운 운명과 마주 하고 싶었다.

‘거적때기 하나로 평생을 살았던 어떤 아저씨의 말이라는데 당연히 돈 하고는 거리가 먼 말이겠지. 제대로 시도해보지도 못하고 6천만 불이··· 아웃 카운트 6개 남았잖아. 제대로 했으면··· 아마 안 됐을지도 몰라.’

이렇게라도 위안을 해야 했다.

‘빈볼 하나에 6천만 불은 너무하잖아. 성질 좀 죽일 걸 그랬나?’

이제 그 순간은 지나갔고 다시는 오지 않는다. 분명히 그 포도는 시었을 것이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의 처지가 너무 공감이 된다.

락커에 들러서 소지품을 챙겼다. 전화기를 집으려다 보니 메시지가 하나 와 있다. 고 감독이었다. 미친놈···이라고 쓰여 있는 메시지의 앞부분이 보였다. 그가 내 등판 게임을 보긴 보는 모양이다.

‘어휴! 다들 왜 이래. 이 아저씨도 잔소리 깨나 했겠네.’

안 보려 했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여 메시지를 열었다.

‘응? 이럴 사람이 아닌데··· 그런데 이건 욕이야 칭찬이야?’

장문의 글일 거라 생각했는데 단 한 줄이었다.

『미친놈··· 잘했다.』

***

딴 따안 딴- 딴 따안 딴-.

빌어먹을 운명이다.

‘정말 벨소리를 바꾸든지 해야지. 누구야?’

무음으로 해 놓지 않았던 게 정말 후회된다. 눈 뜨기 싫어 뒤척이다 격렬한 운명의 심포니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떠 번호를 확인했다. 전화기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다.

아까 락커에서 아이싱만 간단히 받고 만사가 귀찮아져 택시 타고 그냥 숙소로 와서 잠들었었다. 와서도 머리가 지근지근해 그냥 앉아 있기가 어려웠다. 잠시 누웠는데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이런 날은 좀 내버려두라고. 왜 하필이면 오늘이어야 해.’

평소에도 내게 전화가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 때문에 스스로에게 주는 재충전의 시간을 방해받는 건 끔찍한 일이다.

“Hello.”

혹시 구단에서 온 전화일지 몰라 받았다.

“아! So. 계속 안 받아서 끊을까 했는데 지금 뭐 하냐?”

분명히 좀 들어본 목소리인데 그게 누구인지 모르겠다.

“뭐 하긴요. 그냥 호텔에서 빈둥거리고 있지요.”

“그래? 잘되었군. 우리도 지금 그 호텔로 가는 길이야. 괜찮다면 바에서 잠깐 보지. 이야기할 게 좀 있어.”

상당히 친숙하게 말하는데 여전히 누구인지 모르겠다.

‘우리? 팀원인가? 누구?’

몇몇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누구도 목소리와 얼굴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제까지 대화를 나누고선 지금 와서 누구냐고 물어보기가 상당히 거북하다.

“언제쯤 도착하시죠?”

“다 모이려면 30~40분 이상 걸릴 거야. 넉넉하게 한 시간쯤 뒤에 오면 될 거야.”

“예. 그럼. 그때 봐요.”

참 황당한 일이다. 이렇게 잘 모르는 사람과 약속을 잡다니··· 아무래도 아직 잠에서 덜 깬 것 같다.

‘만나보면 알겠지. 우리 팀 선수인 건 맞잖아. 맞나? 아! 게임은 어떻게 됐지?’

한 시간 뒤면 시간은 넉넉하다. 뉴스 검색에 들어갔다.

『충격적 퇴장. 사사구는 고의였나?』

『So는 왜 빈볼을 던졌을까?』

『감동의 관중 합창이 일깨운 승리 DNA』

스포츠 섹션 큰 제목만 봐도 내 이야기인 것 같다.

‘경기 결과는 안 나오고 왜 이런 것만··· 난 별로 안 궁금하다고.’

아래로 좀 더 내려와서야 내가 원하는 제목들이 보인다.

『자이언츠 인내의 역전 드라마.』

‘뭐? 역전? 정말 미치겠네. 7이닝 무피안타인데 승도 하나 못 챙기는 거야?’

이겼다니 다행이긴 한데 정말 이 팀은 날 미치게 만든다. 8회에 역전 투런을 맞았다. 내가 사사구로 내보낸 주자가 홈까지 들어왔다면 내 자책점이다.

‘진짜 맛이 가네. 크큿. 무피안타에 1자책이라 기록이 끝내주는데···’

되찾았던 평정에 금이 가는 것 같다. 화는 안 나는데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

‘그런데 어떻게 이긴 거야? 뭐 9회 동점. 연장 11회에 베그웰이 결승타를 쳤다고? 어휴! 참 어렵게도 이겼네.’

한두 시간쯤 잤을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나 있었다.

‘밤 10시에 이곳으로 온다고? 미국에서?’

이 호텔이 있는 샌프란시스코 번화가가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으로 그런 건 아니다.

‘누구야? 누군데 이 시간에···’

나갈 준비를 하면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라도 깔끔함은 필요하다. 메이저리그 선수가 대중에게 추레한 꼴을 보일 수는 없다.

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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