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참자. 참아
“세이프.”
주심에 판정 번복이 없음을 알렸다. 마이크를 통해 증폭된 소리가 오라클 파크에 메아리친다.
“Oh. Yesssss.”
구장이 떠나갈 듯한 관중의 함성이 터졌다.
정말 점수 한번 어렵게 난다. 섣부르게 기대감을 가졌다가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제 우리 팀 수위 타자까지 연결되었다. 이젠 최소한 이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다.
여전히 만루고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인 투수는 정말 드물다.
‘크리스 헌터 저놈은 당연히 아니지.’
관중의 환호 속에서 레블론이 천천히 타석에 들어서고 있다.
‘레블론. 아저씨 믿어요.’
“헉!”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헛스윙 세 번에 이은 삼진으로 간단하게 이닝 종료. 상대 투수는 위기를 극복했지만 내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하아! 한 방 날려서 점수 내준다며··· 믿긴 개뿔···”
안 쓰던 한국어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믿은 놈이 잘못이다. 레블론은 투수보다 더 흥분해 있었다.
이게 우리 팀 공격의 일반적 패턴이다.
‘그래도 1점은 냈잖아. 내가 잘 던지면 돼. 오늘 좀 편하게 가나 싶더니··· 어째 좀 편한 날이 없네.’
기분 탓인지 다시 올라야 할 마운드가 너무 높아 보인다.
피칭 관련 메트릭스 중 승리, ERA, RA(평균실점), 세이브, 홀드 등의 summary stats는 게임의 종합적인 결과이다. 투수의 기본 능력과는 별개로 팀의 수비력, 행운과 불운 같은 우발적 변수, 득점 지원 등의 영향을 받게 된다.
내 생각에는 여기에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빠졌다.
어떤 스포츠나 체력과 기술의 육체적 숙련도 중요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멘탈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멘탈이 굳건하면 어떤 변화라도 헤쳐나갈 힘이 생긴다.
“스트라익.”
여전히 아웃코스엔 굉장히 후한 판정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건 오늘 내게는 도깨비방망이다. 상대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이제껏 당해왔다.
빠직-
오늘 몇 개째인지 모르겠다. 스트라이크 판정에 대한 불만을 저런 식으로 내보이고 있다.
배트의 손잡이 쪽 얇은 부분이라도 강도는 상당하다. 게다가 휘어지는 탄성까지 있는데 그것을 허벅지에 내리쳐 단번에 부러트리는 것은 엄청난 근력을 필요로 한다.
‘배트만 부러지는 건 아닌 거지. 쓸데없이 힘자랑은 왜 하냐? 감독이고 선수들이고 소심해 가지고··· 할 얘기 있으면 시원하게 하고 그러는 거지. 왜 괜히 기물 파손을 해. 퇴장 그런 것 겁내서 야구 하겠어?’
이쯤 되면 퇴장 한둘은 나와 줘야 하는데 필리스는 너무 얌전하다. 필리건이란 유명한 극성팬을 가진 팀답지 않다.
발을 풀고 글러브로 얼굴을 가리는 척하며 슬쩍 웃어 보였다. 가리는 척만 했다. 타자에게 얼굴이 잘 보여야 하니까.
다시 투구 자세로 돌아가며 타자를 살폈다. 눈빛이 좀 살벌해진 것 같긴 한데 애매하다.
‘못 봤나? 좀 더 긁어볼까?’
다시 아웃코스.
틱-
통상적인 스트라이크 존에서 공 두 개 정도 빠진 코스였는데 커트해냈다.
‘준비하고 있었네. 니들도 오늘 고생한다. 하는 김에 조금만 더 해라.’
곧이어 투심성의 패스트볼을 인코스 타자 무릎 쪽으로 던져 버렸다. 공 끝의 휘는 방향이 타자 몸쪽이라 마치 맞을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우타자의 타격자세가 아웃코스를 의식해 홈플레이트 방향으로 반 족장 정도 당겨져 있었다.
타자가 놀랐는지 황급히 피하려다 발이 꼬여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오호! 찬스네. 아! 약한 척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그거 웬만한 심판이었으면 스트라이크라고. 그런 꼴이 난 건 앞으로 너무 붙은 니 잘못이 90%야.’
돌아서려다가 멈춰서 실실 웃었다.
‘우스운 꼴을 봤으면 웃어줘야지. 그게 자연스러운 거야.’
손까지 흔들어 주려다 참았다. 타자의 시선이 내 얼굴에 한참 머물다 사라졌다. 뛰쳐나오면 어떻게 대처하겠다고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는데 상대 멘탈이 너무 좋다. 감탄스럽긴 한데 여기는 상대를 부러트려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동네다.
타자가 당겨 선 타석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맞추려면 맞춰보라는 듯 더 바싹 붙었다.
‘야! 성질 죽여. 거 참! 그렇게 붙어 가지고 니 팔 길이로 인코스 공을 어떻게 치겠니?’
다시 인코스 패스트볼.
“스트라익. 배터 아웃.”
타자가 드디어 폭발했다. 심판을 돌아보며 거센소리를 내뱉는 게 여기까지 들린다. 비슷한 코스로 간 그전 공은 볼이었다. 지금은···
‘스트라이크 인정이 안 돼? 내가 존에 반 개 더 붙였단다. 니가 그걸 알아차릴 수 있으면 못해도 3할은 쳤겠지.’
나에 대한 분노보다 볼 판정에 대한 불만이 더 컸던 것 같다. 나에 대한 원망의 시선까지 방향을 바꿔 심판에게 향하고 있다.
‘멘탈이 그래 가지고 대타자가 되긴 좀 어렵겠네.’
상대의 도발은 참아도 볼 판정에 저렇게 민감하다니 저놈 성격도 특이하다.
SO(삼진), BB(볼넷), HBP(몸에 맞는 볼), HR(홈런) 같은 것들을 elemental stats이라고 한다. 이 대부분은 투수의 기본능력 외의 요인에 적게 영향받기 때문에 투수 능력을 평가하는 지표의 밑자료가 된다. 하지만 거기에 이런 미묘한 신경전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제 필리스 감독도 나와 주심과 코끝을 대고 열렬한 의사소통이 주고받고 있다. 아직까지는···
‘심판이 점잖네. 이 정도면 다 퇴장시켜야지. 저걸 봐주고 있다니··· 거! 권위도 좀 세우고 그래 봐요.’
벤치 클리어링을 유도해 볼 생각이었지만 생각대로 잘 안 됐다. 아쉬운 김에 퇴장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팀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려면 그게 최고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데··· 아! 고 감독이 했던 말이었던가?’
나름 머리를 짜내어 실행한 일이었지만 상대의 호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시즌 막판인데 뭐라도 해 봐야 할 거 아냐. 이대로 탈락할 순 없잖아.’
어떤 조그만 계기만 있으면 지긋지긋한 오할 승률을 깨고 비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저질렀는데 상대가 반응하지 않았다.
과격해질 것 같던 장면은 그냥 입씨름이 좀 오고 가다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필리스도 왕년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 같다.
‘한 번 더 해 볼까? 쩝! 아쉽지만 참아야겠지?’
사방에 카메라가 득실거린다. 같은 짓을 계속하다간 고의성이 있다고 스포츠맨십 운운하며 인터넷에서 조리돌림 당할 위험이 있다.
필리스의 3번 타자 로메로가 어느새 나와 타석 바닥을 고르고 있었다. 스코어는 7회 현재 1:0. 아직 마음 놓을 때가 아니다.
“스트라익.”
“응?”
꿈쩍이지도 않는다.
‘이거 뭐야? 앞 타자는 커트라도 하더니···’
당연히 오늘 프리패스인 예의 그 아웃코스 존을 공략한 공이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그쪽은 아예 버리기로 한 건가? 앞 타석은 어떻게 잡았었지?’
두 번 다 초구 2구에 범타 처리했었다. 어떤 공에 배트를 휘둘렀는지 그런 자세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로메로는 시즌 타율 3할을 넘기는 정교한 타자이다. 평소 같으면 상당히 껄끄러운 유형인데 지금 생각이 맞다면 오늘 같은 날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존 밖의 공은 안 치시겠다?’
가끔 그런 타자가 있다. 배드볼 히터의 정반대 유형이다. 자기 존을 설정해 놓고 그 안에 들어오는 공만 타격한다. 그 밖으로 벗어나면 커트도 안 한다. 괜히 그런 공을 쫓아다니다 자신의 타격 밸런스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유형이다.
‘야! 그건 제대로 컨트롤이 안 되는 애들한테나 통하는 방법이지. 그런 게 나한테 되겠냐?’
다시 보니 타석에 선 자세도 특별히 아웃코스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런 유형은 실투를 노린다. 모든 투수는 던지는 모든 공을 완벽히 제어할 수 없다는 이론의 신봉자다.
‘확실히 맞는 말이지. 나도 던지는 모든 공이 의도대로 가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내가 바로 가는 확률이 좀 높아. 실투를 기다리는 거라면 좀 오래 기다려야 할 거야.’
베그웰도 눈치를 챘는지 똑같은 코스를 요구한다. 이런 식의 볼 배합은 굉장히 오랜만이다. 같은 코스를 던져야 한다면 구질을 다르게 하든지 구속을 바꾼다. 하지만 이번에 그냥 똑같이 넣으라는 사인이다.
“스트라익.”
이번에도 꼼짝하지 않는다. 고집이 있다.
‘진짜 똑같이 못 넣을 거라고 생각해? 하긴 오늘이 특별한 날이지. 보통 때 같으면 이런 코스가 스트라이크가 되지 않을 테니까. 그만 끝내자.’
투수가 긴장해서 자꾸 던지다 보면 실투가 나온다, 이건 일반적 상식이지만 내게는 해당 사항 없음이다. 난 지금 너무 편안하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너무 쉽다. 로메로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타석에서 순순히 물러났다. 정말 이 동네는 별난 놈 천지다. 덕분에 아주 쉽게 이닝을 끝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면 된다. 다음에 만나면 틀림없이 또 다른 방법이 생길 거다.
‘이제 2 이닝만··· 응? 7회에 3번을 잡았는데··· 공수교대? 이거···’
혼자서 너무 신나 있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었다.
‘일단 들어가자고··· 오호! 이것 참!’
덕아웃 분위기가 썰렁하다. 얼굴을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슬금슬금 피하거나 마주 보며 바보 웃음을 지어 보인다. 쑥스럽고 무안하다. 조용히 구석 자리로 가서 앉았다. 기분은 날 듯하지만, 아직 설쳐대기엔 너무 이르다. 아직 아웃 카운트가 6개 더 남았다.
‘뭐 내가 안 해본 거도 아니고 굳이 안 이래도 되는데···’
오늘 운이 좋았을 뿐이다. 나의 행운이 상대에게는 불운으로 작용했고. 이렇게라도 생각해야 마음이 좀 가라앉을 것 같았다.
“아앗.”
“뭐야. 저거···”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웅웅거리는 울림이 급격히 커진다.
‘관중까지? 왜 그래?’
벌떡 일어섰다.
‘헉!’
레블론의 등이 보인다. 타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상체는 앞으로 기울어져 손이 바닥을 짚고 있다.
“무슨 일이야? 빈 볼에 맞은 거야?”
베그웰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옆구리에 정통으로 맞혔어. 저것들이··· 아! 나가게 되면 넌 빠져. 로저스 너도 나가면 안 돼. 야수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나도 굳이 앞장설 마음은 없었지만 이런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좀 많이 별로다. 아마 상대 팀은 전회에 내가 위협구을 던졌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이 사달이 일어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 그건 그렇고 고의적인 게 확실한데 심판은 왜 퇴장을 안 시키는 거야.’
심판은 상대 투수의 실투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우리 벤치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아직 레블론이 일어나지 않아서 자제 중일 뿐이다.
“그래도···”
레블론이 일어났다. 덕아웃을 향해 손짓으로 나오지 말라는 신호를 연신 보낸다. 코칭 스탭도 나서 선수들을 진정시켰다.
“오늘만 날이 아니야. 지금은 좀 참자.”
연신 눈짓이 오고 간다.
‘이거···’
마음이 착잡하다. 별생각이 다 든다.
“어휴! 저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