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무엇이 중하냐?
“음. 좋구나.”
덕아웃에서 괜히 히죽거리게 된다.
“너 왜 그래? 오늘도 갑자기 막 울고 싶고 그런 건 아니지?”
‘아! 이 아저씨가···’
레블론이 또 놀리기 시작했다.
‘정말 웃지도 말라는 거야. 뭐야? 나는 항상 무표정으로 있어야 해? 아이고, 다 내 탓이지. 그때 어떻게든 참았어야 했는데···’
“저 꼴을 보고 있으니까 웃기냐?”
“우리나라 속담에··· 음.”
한국식을 그대로 옮겨서는 뜻이 안 통할 것 같다.
“미국식으로는 People ruin themselves by trying to ape their betters.(사람들은 내기꾼을 따라 하다가 패가망신한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돼요.”
대니얼 초이가 도와주었다. 새로 온 구단 홍보 직원인데 한국계다. 통상적으로 게임 중에는 구단 직원 한 명이 덕아웃에 머무른다.
“아! 고마워요.”
“이런 것쯤이야 언제나 괜찮습니다.”
그동안 특별한 통역 없이 지내왔는데 이런 세밀한 부분에서 가끔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이것 때문에 한국계를 뽑은 건 아니겠지?’
아무튼 다른 사람 눈에도 이 상황이 나와 똑같이 보이나 보다.
상대 투수의 하는 짓이 가관이다.
주심의 아웃코스 존이 넓어진 것을 알고 나처럼 해보려고 계속 시도를 하다가 영점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존에 가끔 들어가긴 하는데 안 들어가는 것이 훨씬 더 많다. 타자들이 이제 아웃코스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3분의 2가 볼인데 그걸 누가 건드리겠어. 이래서 뱁새가 황새 따라 하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거야. 그게 아무나 되는 건 줄 알아? 나쯤 되니까 그 짓이 가능한 거라구.’
지금까지 어찌어찌 버텨왔는데 점점 배트의 중심에 맞는 타구가 늘어나고 있었다.
‘곧 한계가 오겠네.’
“다음 타석에서는 나도 한 방 날려야지. 저렇게 맛 간 놈쯤이야. 다음 회에는 어떻게 해서라도 점수 좀 내줄 테니까 힘내서 던져.”
‘말은 잘하시는데 어디 두고 봅시다.’
3회 현재 스코어는 0:0이다. 응원의 말이라는 건 알지만 기분이 그냥 그렇다.
정말 비극이다. 3할 타자가 하나도 없는 팀에서 투수 노릇 한다는 건 생각보다 몹시 어렵다. 지금 우리 팀에서 가장 잘 치는 타자는 레블론이다. 0.289의 타율에 홈런 27개. 그나마 소총소대에 하나씩 있는 박격포쯤은 된다.
현재 리그의 평균 팀타율은 2할 4푼 정도. 우리 팀은 거의 평균에 수렴한다. 문제는 장타가 적어서 득점 생산력이 처참한 수준이다. 어쩌면 승률이 지금까지 이런 건 여기에 가장 큰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아쉬운 타선이지만 이 아저씨라도 있어서···’
타악-
깨끗하게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가 나왔다.
베그웰이 오랜만에 하나 쳤다. 그는 올 시즌 2할 3푼대를 치고 있다. 홈런은 없다. 긍정적인 측면은 타율에 비해 출루율이 높다는 거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아직 주전이 되기에는 좀 모자란다.
‘타격 좋은 팀에 가면 타자 하나 없는 셈 치면 되니까 어찌어찌 주전을 차지할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우리 같은 팀에서는 타자 한 명이 아쉬워서···’
주전 포수 프레디는 2할 4푼에 홈런 10개를 쳐냈다
단타 하나 쳐 놓고 1루에서 저렇게 좋아하는 베그웰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하다.
‘그래도 작년에 비해서는 타율이라도 많이 올랐으니 발전하고···’
타악-
연속 안타가 터졌다. 다시 좌전 안타.
‘어? 또 쳤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투 아웃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 같네. 투수가 병신 짓 하더니 생각보다 일찍 맛이 가는 것 같아.”
레블론이 타격 준비를 한다면서 자기 배트를 챙겨 나갔다.
‘어휴! 이러다 마는 게 한두 번이라야 믿지. 우리 타선이 어지간히···’
생각은 그렇게 돌아가지만, 가슴 한편에선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가 갔고 타선은 상위 타선으로 연결되었다.
‘편하게 보자고··· 우리 타자들이 이럴 때 삼진당하고 끝내는 거 시즌 내내 지겹게 봤잖아.’
2번 윌슨 에두아르도가 나섰다. 교타자라고 불리기엔 타율이 모자라고 중거리 타자치고는 장타가 적다. 외야수로는 훌륭한데 타자로서는 조금 아쉽다. 그래도 2할 7푼을 때리고 있으니 이럴 땐···
투수의 볼질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런 컨트롤 난조다.
‘왜 저래? 여기서 주자를 모아서 어쩌자는 거야? 맞더라도 여기서 승부를 봐야지. 10승 7패 ERA 3.65면 기록은 괜찮은데 왜 갑자기?’
투수의 능력을 측정하는 고전적 방법은 ERA(9이닝당 평균자책)이다. 아주 직관적이고 이해가 쉽다. 그러나 투수의 실점(자책과 비자책점 포함)은 각 투수의 능력 이외 요인(수비력, 행운 등)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투수의 능력치를 보여주는 수많은 스탯이 개발되었다.
ERA 뒤를 이어 A/9(평균실점)이 나왔다. 이건 ERA에서 비자책점을 더해 계산하는 방식이다. 모든 실점에 대해 투수의 책임을 따져본다
ERC라는 것도 있다. 이것은 실제의 자책점이 아니라 투수가 허용한 안타, 볼넷, 홈런 등을 수치화해서 가상의 허용자책점을 계산한다.
‘보통 이 지표는 투수의 미래 성적을 예측하기 위해 사용하지. 아무튼 머리 좋은 인간들이 야구판에 들어오면서 별짓을 다 했다니까.’
요즘 가장 일반화된 지표는 FIP(Fielding Independent Pitching Stats, 수비무관자책점)이다. 2006년 톰 탱고라는 사람이 ERA의 대체 스탯으로 만들어냈다. 피안타로는 투수의 능력을 온전히 나타내지 못한다. 피안타를 제외한 삼진, 볼넷, 홈런으로 투수의 능력을 측정하는 방식이다.
‘만들어내면 뭐 하냐구. 다 귀에 걸면 귀걸이 목에 걸면 목걸이인데···’
나에게는 그렇게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공부가 부족해 이해력이 떨어지는 탓일지도 모르지만, 각 스텟마다 예외사항이 꽤 많다는 걸 해석할 방법이 없다. 항상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적당한 지표를 이제껏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글래빈은 삼진이 적었다.(통산 K/9 5.32) 제구력에 비하면 볼넷도 많았다.(통산 BB/9 3.06) 피홈런이 적다는 장점(통산 HR/9 0.73)은 있었지만 이를 근거로 계산한 그의 통산 FIP은 3.95이다. 레전드 투수라고 하기엔 지표가 그저 그렇다.
그런데 이걸 ERA로 계산하면 훨씬 괜찮은 수치가 나온다. 그의 통산 ERA는 3.54로 FIP와 0.4 점 정도의 차이가 있다. 문제는 동시대 특급 투수들의 경우 두 지표가 이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투수가 없다. 대개의 경우 ERA와 FIP는 비슷한 수치가 나온다.
‘존 스몰츠, 그렉 매덕스, 페드로 마르티네즈. 랜디 존슨. 커트 실링 등 다 그렇다고. 그래서 이런 스탯들을 100% 신용하기가 어려워.’
그때그때 달라요 식으로 그 원인에 대한 해석이 사람마다 극과 극을 달린다.
‘어? 왜 다 일어서 있지? 응? 볼넷을 얻었어. 이거 2사 후에 만루가··· 나 참! 이거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에이, 여기까지 왔으면 한 방 쳐. 저 자식 내려오게 만들어야지.’
잠깐 다른 생각을 했더니, 그사이 경기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었다.
3, 4번 타자 앞에 만루가 만들어졌다. 감독이 마운드로 올라가서 필리스 벤치의 움직임이 바쁘게 이어진다.
‘아직 바꾸진 않겠지. 이제 3회인데···’
다시 플레이 볼.
3번 우익수 스테판의 타석이다. 우리 팀의 딱 표준적인 타자다. 올 시즌 2할 5푼에 홈런 12개.
별안간 벌어진 일에 덕아웃의 선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관중이 다 일어서 있다.
“볼이야.”
“지금 연속 다섯 개 맞지?”
“크리스 헌터 같으면 컨트롤이 괜찮은 투순데 갑자기 왜 저래?”
4선발 로저스와 불펜의 체이스가 나란히 난간에 매달리듯 기대어 싱글거리며 소곤거리고 있었다. 우리 팜에서 길러낸 투수들 중 가장 어린 두 명이다.
“너도 가끔 있는 경우잖아. 갑자기 이상하게 컨트롤이 안 될 때. 아웃코스에 좀 정교하게 넣어보려다 핀트가 살짝 나갔겠지. 한가운데 보고 던질 수도 없고 참 갑갑하겠네.”
“나 같으면 이럴 때 제구고 뭐고 그냥 한가운데 보고 힘껏 던지지.”
그거야 100마일을 던질 수 있는 체이스나 할 법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상대 투수의 최고 구속은 94마일쯤 된다.
‘점수는 낼 때 내야 하는데···’
크리스 헌터가 지금 흔들리는 거 같아도 이 위기를 극복하고 한 회 쉬고 나오면 또 달라질지도 모른다.
“또, 볼이야. 완전히 갔네. 이러면 밀어내기를 기대해 봐도 괜찮은 건가?”
“일반적 타자라면 한가운데 스트레이트 아니면 아마 그냥 보고 있겠지. 그런데 스테판은 배드볼 히터 기질이 있어서···”
‘저것들이··· 야! 불길한 얘기 하지 마.’
투수가 이렇게 마음이 흔들릴 때는 던지고 싶다고 스트라이크가 던져지는 게 아니다. 무조건 기다려야 한다. 상대가 스스로 무너지려 하면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는 게 상책이다.
‘아! 헛스윙. 미친···’
턱도 없이 낮은 볼에 방망이가 나갔다. 정말 돌 것 같다. 쓰리볼이 2볼 1스트라이크가 되어 버렸다.
상대 투수에게 안도의 기운이 살짝 나타났다 사라졌다. 우리 같은 투수에게는 다 보인다.
‘진짜 이번에 참아라. 아직 완전히 회복이 안 되었다고. 볼일 확률이 90%야. 쟤는 지금 안 던지는 게 아니라 못 던지는 거라고.’
“으으음.”
신음이 저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또 헛스윙이다. 이번에 높은 곳으로 빠지는 하이 패스트볼이었는데 정말 어이가 없다.
어떨 땐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더 좋은 상황을 만든다. 볼넷으로 출루할 장면이 2볼 2스트라이크로 바뀌어 버렸다.
스테판이 스스로 쓰고 있던 헬멧을 툭툭 치며 자책을 하는 듯 보이지만, 이제 와 그런 걸 해봐야 마이너스다.
‘믿은 내가 잘못이지. 우리 팀이 뭐 그렇지. 물빠따가 어디 가겠어? 괜찮아. 편하게 해. 원래 그랬는데 새삼스럽게··· 기대 안 해.’
상대 투수의 신중한 와인드업. 공이 투수 손을 떠났다.
‘하아! 또 헛스윙. 내가 저럴 줄··· 아! 뛰어. 공 빠졌어. 낫아웃이야.’
관중의 탄식이 환호로 순식간에 바뀌어 울려 퍼지고 있다. 타자가 미친 듯 질주한다.
“뛰어! 아아악. 세이프!”
포수가 재빨리 뒤로 흐른 공을 쫓아 1루로 송구했지만 내 눈에는 타자 주자가 빨랐던 것 같다. 그사이 3루 주자 베그웰이 홈으로 들어왔다.
최초 판정은 세이프였지만, 필리스의 요청으로 비디오 판독에 들어갔다.
“저거 와일드 피치(폭투)일까? 포수 포일 어느 쪽이지?”
“바운드 볼이긴 했지만, 포수가 저 정도는 잡아줘야 하는 것 아닌가? 최소 블로킹이라도 했어야지.”
‘어휴! 포일이면 어떻고 와일드 피치면 어때. 지금 그게 중요하냐? 아! 세이프여야 하는데···’
정말 피가 마르는 것 같다. 1점 내기가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