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외계인이라 불러 줘
경기 내외적인 문제로 복잡했던 7월과 마지막 순위 다툼이 치열했던 8월이었다. 8월의 마지막 날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따스한 햇살이 기분 좋은 날이다. 바다 냄새를 머금은 바람도 좋고···
‘섭씨 20도에 습도 70%. 괜찮네.’
홈경기에 등판하기는 오랜만이다.
128게임을 치른 현재 작년 와일드카드 커트라인이었던 88승까지는 21승이 모자란다. 67승 61패. 좀처럼 승률 6할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팀이 귀신같이 승률 5할은 맞추는데 그 이상이 안 되네.’
남은 게임은 33게임 여기서 21승을 하려면 앞으로 6할 6푼의 승률을 올려야 한다.
‘어제 졌는데 연패는 안 돼. 다시 시작하려면 여기서 끊어야 돼.’
파드리스 원정 3연전 중 마지막 게임을 패하고 말았다. 1선발 소르카를 내고 패한 경기라 1패의 무게가 다르다.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시즌 내내 승률 5할에 못 박혔던 팀이 마지막 한 달을 질주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어떤 계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오늘은 필리스와의 3연전 중 첫 게임이다.
이 경기 등판 전 감독과 면담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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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타임 첫 시즌이고 이래저래 힘들었을 텐데 부탁을 하나 해야 할 것 같아.”
“뭐든 편하게 말씀하세요.”
“등판 후 휴식일을 4일로 고정하겠네. 중간에 휴식일이 있어도 그냥 그 간격대로 남은 한 달을 던져줬으면 하네. 이건 자네와 소르카 두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거야. 소르카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더군.”
이번 시즌 동안 배려를 받은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기본 4일 휴식 이외에도 중간에 휴식일이 생기면 팀은 하루의 휴식일은 더 챙겨주었었다.
“이 상황에 그렇게라도 해봐야죠. 어쩌겠습니까?”
프런트도 그렇고 코칭 스탭도 많이 답답한 것 같았다. 윈나우를 선언하고 세 시즌째인데 아직 포스트 시즌 냄새도 못 맡아봤다. 이번 시즌마저 힘없이 주저앉으면 프런트 책임론이 나올지도 모른다. 프런트의 책임 문제가 거론된다면 코칭 스탭도 당연히 세트로 묶이게 된다.
난 현재 자이언츠의 시스템이 싫지 않다,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은 사절이다.
소르카와 나를 그런 식으로 로테이션하면 남은 기간 동안 기존 등판 계획에 비해 각각 1~2번 정도는 더 등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대 4승을 더 할 수 있는 확률이 생기는 건가? 그거야 우리가 그렇게 해도 정상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을 때 그런 계산이 통하는 거지.’
이런 결정이 어떤 식으로 작용할지 애매한 일이지만 내가 반대한다고 철회되지는 않는다. 이건 부탁의 형식을 빌렸지만 통고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무심한 듯 말했지만, 감독이 내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감독 얼굴은 시즌이 막판으로 다가갈수록 푸석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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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시작해 볼까?’
“스트라익.”
초구 스트라이크 콜은 언제나 기분 좋다.
‘나 같은 피네스 피처는 유리한 볼 카운트를 잡고 타자를 휘둘러야 승부가 수월하지.’
4월과 5월 내가 연속해서 내셔널 리그의 이달의 투수로 선정되자 여러 곳에서 나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갑론을박했었다. 그때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톰 글래빈의 재림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레전드와 비교해줘서 고맙긴 한데 그다지 비슷하지 않은 것 같아서···’
일단 톰 글래빈은 좌완이었다. 좌완의 똥볼 투수라고 불러도 그리 틀리지 않다. 구위 자체는 정말 별거 없는 투수였다.
“스트라익.”
‘나는 다르다고.’
그의 패스트볼 최고 구속은 90마일 남짓했고 무브먼트가 특별하지도 않았다. 뛰어난 브레이킹 볼을 구사하지도 못했고 다양한 구종을 가지지도 못했다.
‘그에 비하면 난 우완이지만 언더스로우라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지. 언더치고는 패스트볼의 구속이 빠른 편이지. 오버드로우의 90마일과 언더의 90마일은 같은 구속이지만 많이 다르다고.’
톰 글래빈이 위대한 점은 그런 똥볼을 구속 변화 및 탁월한 커맨드와 조합시켜 장기간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지 공 자체는 정말 별거 없었다.
‘인코스 높게’
휙-
‘오호! 땡큐,’
아웃코스로 향할 다음 공을 위한 목적구였는데 타자의 배트가 따라 나왔다. 무엇인가 조짐이 좋다. 타자가 고개를 흔들며 타석에서 물러났다. 원 아웃이다.
‘바깥쪽 낮은 곳을 노려라. 그러면 타자들이 잘 치지 못할 거야.’ 이런 말은 웬만한 코치는 다 한다. 문제는 그것을 실제로 실행할만한 능력을 투수가 가지고 있냐는 점이다.
아무리 커맨드가 좋아도 경기 내내 꾸준하게 목표한 위치에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는 정말 극소수다. 모든 공을 빈틈없이 제구할 수 없기 때문에 투수들은 주로 구속을 변화시킨다. 그것으로 투수가 근본적으로 가진 그런 약점을 덮는 것이다.
이런 부분 때문에 글래빈은 1회가 아주 약했다. 그의 통산 평균자책이 3.54인데 1회만 보면 평균자책은 4.58이다. 그랬다가 2회에는 평균자책 2.83으로 전혀 다른 투수가 되었다.
그는 구위가 떨어지는 공으로 타자를 잡아내기 위해서 극단적인 바깥쪽 승부를 가져갔다. 우타 좌타를 가리지 않았다. 때문에 1회는 존 바깥쪽에 볼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심판의 존을 테스트했다. 그게 끝난 다음 이닝부터 그 존을 넘나들며 속구와 체인지업의 구속 차를 이용해서 70~80%의 공을 바깥쪽에 집중시켰다.
그가 주로 던지는 변화구는 체인지업이었는데 체인지업이 위력을 발휘하려면 타자가 투수의 속구에 익숙해져 있어야 한다. 체인지업은 타이밍을 흩트리는 공, 즉 오프스피드 피치다. 페드로 같은 예외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다. 특히나 글래빈은 그랬다.
그런 볼은 의외성이 생명이다. 그런데 1회는 타자에게 미처 익숙함이 생기기 전이라 체인지업은 그냥 똥볼이었다.
“스트라익.”
던질 때부터 감이 좋았다. 싱커가 손에 착 감겼다 날아갔다.
글래빈에 비하면 나의 구위는 훌륭하다. 생소한 궤적에서 나오는 무브먼트 자체가 초반에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나는 초반 실점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글래빈과는 많이 다르지. 그와 비슷한 건 구속 변화에 능하고 제구력이 좋다는 것 정도인데 그건 특급투수는 웬만하면 다 그래. 왜 그와 비교되는지 잘 모르겠어. 내 공이 좀··· 페드로 마르티네스외 비교하면 모를까. 흠. 뭐 그렇다구.’
글래빈은 통산 볼넷도 1500개로 꽤 많았다. 그는 최고의 제구력을 가졌지만 경우에 따라 볼넷 허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루가 비어있는 상황에서 그의 피출루율은 4할을 넘긴다. 구위가 떨어지는 투수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난 그 짓은 못한다. 내게 볼넷은 안타나 마찬가지다. 난 투구 스타일상 도루 억제에도 약점이 있다. 세이버메트릭스상 볼넷 억제력이 뛰어난 투수의 볼넷은 실점에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래도 내게는 많이 찝찝한 일이다.
‘그런 볼에도 글래빈의 피홈런은 리그 평균보다 낮아. 참 불가사의한 일이야. 난 홈런이 겁나. 그냥 한 방 맞으면 1점이지만 주자가 있으면··· 아무튼 그와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구. 이렇게···’
“스트라익.”
‘이거 뭐야? 왜 안 쳐? 만만해 보이지 않아?’
초구를 존에서 살짝 빠지게 던졌는데 심판에게 스트라이크 콜을 받았다. 그것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흔들리지 않고 내 주제에 맞게 인코스로 비슷한 궤적의 더 느린 싱커를 던졌다. 웬만한 타자는 여기 다 방망이가 나온다. 물론 대개 범타로 끝나겠지만;
‘이것 참!’
베그웰이 인코스 하이 패스트볼을 요구한다. 그것도 스트라이크로.
‘아! 몰라. 때린다고 다 홈런이겠어?’
찝찝했지만 초반부터 포수의 리드를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아!”
타자가 또 안 휘둘렀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오늘 내 공 구위가 손도 못 댈 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
기분이 묘하다. 초반부터 심판의 존도 내게 딱 들어맞고 타자들의 배트도 얼어있다.
글래빈이 각 시즌 성적은 굴곡이 있었다. 그래프가 하향이었을 때는 대개 리그 차원의 스트라이크 존 변화가 이루어졌던 해다. 1998년 시즌 그는 20승 6패 ERA 2.47로 사이영상을 탔다. 그러나 존 변화가 이루어졌던 1999년 시즌에는 14승 11패 ERA 4.12에 그쳤다.
그는 또 적응해 냈다. 2000년 시즌 21승 9패 ERA 3.40으로 반등한다.
‘오늘 주심의 존이 타자에게 이상하게 느껴지나? 초반이라서 항의는 안 했지만, 타자들이 괴리를 느끼는 건가?’
필리스의 타자들은 앞선 브레이브스와의 3연전에서 총 40점을 내며 브레이브스의 투수진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타격감이 한창 좋을 때라 나도 등판 준비를 하면서 조금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초반부터 너무 흐물흐물하다.
‘어쨌든 내게는 좋은 일이잖아. 베그웰이 알아서 하겠지. 열심히 사인 따라 던지기만 되겠네.’
“스트라익.”
앞 타자의 초구와 같은 코스였다. 대개 이 코스는 어떤 심판이고 간에 볼 판정을 받는다. 하지만 이 심판은···
‘하아! 일관성 있는 판정. 존경하고 싶네. 모름지기 심판이란 이래야···’
타자에게 외부에서 느낄만한 첫 반응이 나타났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슬쩍 뒤를 한 번 돌아본다.
‘오호! 한 번 더?’
“스트라익.”
타자는 배트를 내는 대신 다시 뒤를 돌아봤다. 아마 이번에 한두 마디쯤 오고 간 것 같다.
‘미천한 타자 놈이 어디 하늘 같은 심판분께 따지긴 따져. 그 입 다물라.’
이런 추세면 조금 더 빼도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궁금하면 해봐야 한다.
글래빈은 집요하게 아웃코스를 공략하면서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을 슬쩍 넓힐 수 있는 제구력을 가진 투수였다. 일반적으로 볼이 될 공에 스트라이크 콜을 하면 타자는 자신의 타격존 밖의 공이라도 어떻게든 컨택해내야 한다. 그게 반복되면 타격감은···
“스트라익. 배터 아웃.”
‘헐! 이걸 잡아줘?’
공 두 개까진 아닌데 한 개 반은 빠진 거 같다. 타자는 배트를 집어 던졌고 필리스의 감독이 달려 나왔다.
웃음보가 터질 것 같다.
‘아이고, 안 돼. 이러다 또···’
고개를 숙인 채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서둘러 덕아웃으로 뛰듯이 돌아왔다.
“So. 축하해. 1회부터 조짐이 좋구만.”
리우드 투수 코치가 박수를 치며 환영한다.
“네? 삼진 잡아서 기분이 좋긴 한데···”
아무리 분위기를 띄워야 할 때라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겨우 한 회 막은 거고 내가 이 정도로 축하받을 사이즈는 아니다. 이건 내게 당연한 일이다.
“이런 몰랐나 보군. 자네 9구 3삼진(Immaculate Inning)을 했잖아. 이건 100번 정도밖에 없는 진기록이라고.”
“그런 건 저렇게 아무 생각 없이 던져야 할 수 있는가 봐요. 나도 머리 비우면 가능하려나?”
‘로저스 이 싸가지 없는 놈이···’
“아! 그랬나요? 그냥 집중하다 보니 의식을 못했네요. 하핫.”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내 커리어에 한 줄 더 쓸 것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