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61화 (61/200)

61화. 늘 잘 잊는다

마크 드라이넨.

결국 구단에서 투수를 하나 데려왔다. 후반기에 승부를 걸어볼 생각이었던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빠져서 황당했었겠네.’

좀 보던 투수다. 작년에 같은 지구인 가디언스에 있었다. 그는 서비스 타임 마지막 해였다.

‘잔여 연봉을 부담하고 유망주 하나를 줬다구? 혹시 그와 FA 계약 생각이 있는 건가? 아니면 하반기만···’

그는 올 상반기에 6승을 했다. 그는 지나온 대부분의 커리어 동안 그랬었다. 특별한 스터프를 가지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처지는 부분도 없는 고른 능력치의 투수다. 큰 부상도 없고 매년 180이닝은 먹어주는 투수.

‘꾸준한 투수지. 매년 10승 내외 3점대 중후반의 ERA. 4, 5선발급으로는 최고야.’

내가 없는 사이에도 팀은 귀신같이 5할 승률을 맞추고 있었다.

이런 선발진 운용에 내가 다시 합류하면 수치상으로는 6할 승률을 맞출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야구가 항상 그렇게 딱 계산이 잘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어쨌든 희망적이라는 거네.’

오늘도 드라이넨은 무난하게 잘 던졌다. 6이닝 3실점. 아니, 쿠어스 필드에서 저 정도면 아주 훌륭하다. 높은 확률로 승리의 기뢰를 팀에 가져다줄 수 있는 투수다.

TV를 껐다.

원정 3연전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서 베그웰과 다음 등판 준비를 했다. 26인 로스터에 들어있는 백업 포수를 남겨준 팀의 배려 덕분인지 컨디션은 빨리 돌아왔다.

내일은 내 복귀일이자 등판일이다. 가벼운 불펜 피칭을 마치고 잠깐 쉬면서 팀 경기를 보고 있자니 빨리 저곳에 서고 싶은 의욕이 부글부글 끓어 넘치고 있다.

“베그웰. 러닝을 좀 할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일 등판이라고. 마무리 운동하고 쉬어야지. 뛰긴 뭘 뛰어?”

“마음이 답답해서 그래. 땀을 좀 흘리면 괜찮을 거 같은데···”

“그냥 쉬라고. 지금 네 공은 아무 이상 없어. 아주 좋아. 이 컨디션 그대로 내일 가져가자고. 쓸데없는 생각 말고 가볍게 필라테스나 좀 하고 쉬어. 푹 쉬라고.”

정말 내일이 기다려진다.

***

[오늘도 화창한 날씨입니다.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팀이 콜로라도 원정에서 홈으로 돌아와 치르는 다저스와의 4연전 중 첫 경기입니다. 오늘 So의 복귀가 있습니다. 많은 응원 부탁합니다. 오늘도 캐스터 그래엄과 해설자 데이빗이 함께합니다.]

캐스터의 방송 오프닝에 이어 데이빗이 말을 이어받았다.

[기대되는 날이군요. 갑작스러운 부상 소식으로 많은 분들이 놀라셨겠지만 제 개인적인 소식통에 의하면 가벼운 근육 경련 증상이 있었는데 큰 부상으로 번지는 걸 막기 위한 예방 차원의 부상자 명단 등재였다고 합니다. 그 기간 동안의 검진 결과는 깨끗했다고 하니 청취자 여러분께서는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So는 예전과 다름없이 나와 천천히 연습구를 던지고 있습니다. 팀으로서도 그렇고 선수 본인에게도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플레이 볼. 다저스의 1번 타자 비지오가 좌타석에 들어섰습니다. 현재 타율 0.295 홈런은 12개를 때려내고 있습니다.]

[스위치 히터로서 우투수를 상대로 좌타석 선택은 당연해 보이지만 So가 상대라면 좀 더 생각해볼 일이었을 텐데··· 제 생각에는 신중치 못한 판단입니다. 기록상으로 So는 일반적인 경우와 반대로 나타납니다. 좌타 상대 피안타율이 1할 2푼밖에 안 돼요. 그···].

[비지오 쳤습니다. 타구는 유격수 앞으로 굴러갑니다. 대쉬 후 1루 송구. So 첫 타자를 범타로 처리합니다.]

[싱커가 역시 날카롭게 떨어지네요. 무브먼트도 그렇지만 그 휘는 각을 의도적으로 조절한다는 게 놀라운 점이지요. 저 싱커의 움직임이 좌타자에게는 좌투수의 빠른 커브처럼 느껴질 겁니다. 그것도 계속 휘는 각이 바뀌는···]

[그렇군요. 2번은 캐빈 럭스 선수입니다. 다저스 공포의 우타라인의 시발점이 되는 선수입니다.]

[럭스, 레오날드, 프랑코로 이어지는 이 타선은 평균 타율 3할이 넘는 정교함을 갖추고 올 시즌 지금까지 총 100개가 넘는 홈런을 때려냈죠. 그야말로 투수들의 악몽과 같은 타선이죠.]

[데이빗. 좀 전에 So가 우타자에게 약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So가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허헛. 그런 말은 안 했어요. 상대적으로 우타자보다 좌타자에게 강하다는 말이었지. 우타자에게 특별히 약하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So의 올 시즌 우타자 상대 타율은 2할 1푼입니다.]

[그런 말씀이셨습니까? 제가 오해를 했군요. 초구 스트라이크에 이어 2구는 빠졌습니다. 럭스 참아냈습니다. 볼 카운트 원 볼 원 스트라이크가 되었습니다. 3구··· 아! 2루 쪽으로 빠져나가는 중전 안타입니다. 왜 시프트를 걸지 않았을까요? 기본적으로 레오날드는 당겨치는 성향의 타자인데··· 2루수가 2루 베이스 쪽으로 좀 붙어 있었다면 잡을 수 있는 공 아니었을까요?]

[So의 등판 시에 자이언츠는 대개 시프트를 걸지 않습니다. 시프트라는 것이 확률을 기반으로 타구의 방향을 예측하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아시다시피 So는 땅볼 비율이 극단적으로 높은 투수입니다. 그리고 대개 빗맞는 타구가 많죠. 그래서 기존의 확률이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자세하게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4번 프랑코의 등장입니다. 1회부터 위기 상황입니다. 발 빠른 주자와 거포의 조합을 만났습니다.]

[초구 헛스윙. 스트라이크입니다. So는 초구 스트라이크 비율이 높은 선수인데 이번엔 아웃 코스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로 헛스윙을 유도했습니다. 1루 주자는 타자에게 해결을 맡기려는 듯 리드 폭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2구 쳤습니다. 2루수 잡고 유격수에게··· 유격수 2루 베이스를 밟으며 1루로 송구. 아웃입니다. 깨끗한 4-6-3으로 이어지는 더블플레이가 나왔습니다. 나이스! 자이언츠!]

[이런 경우 때문에 자이언츠가 So의 등판 때는 시프트를 자제하는 거죠. 프랑코 역시 리그에서 대표적인 당겨 치는 타자죠. So의 경우 우타자가 당겨 친다고 해도 빗맞은 타구가 유격수 방면으로 가는 확률이 그렇게 높지 않아요. 아무튼 So는 이모저모로 이레귤러(irregular)한 투수입니다.]

[그렇군요. 자이언츠는 범타로 원 아웃을 잡고 안타를 하나 맞았지만, 이어지는 땅볼 타구로 더블 플레이. 간단하게 1회 초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광고 후 다시 오겠습니다.]

캐스터 그래엄이 마이크 스위치를 내렸다.

“이상한 소문이 돌더니 그냥 소문일 뿐이었나요? 오늘 멀쩡해 보이는데요.”

“그거야 그 자리에 있었던 선수들 이외에는 정확한 건 아무도 모르지. 프런트 최고위층이야 알겠지만,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더라도 그들이 그걸 인정할 리가 있겠나? 뭐가 되었던 이렇게 빨리 돌아와서 팀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야.”

“만약 육체적 문제가 아닌 심리적인 문제였다면 마음만 안정되면 되니까 복귀야 쉬웠겠죠. 하지만 차라리 몸 아픈 게 낫지 마음은 완치가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언제든지 재발이 가능하다는 건데··· 아무리 팀 사정이 급해도 오늘 등판은 프런트에서 좀 무리한 것 같습니다만. 어느 쪽의 부상이든 간에 So에게 시간을 좀 더 줬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네요.”

그래엄은 야구판이 프로의 이름을 달았다고 해서 너무 상업적인 논리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싫었다.

“프런트에서 잘 알아서 처리했겠지. 어쨌거나 So의 복귀가 이렇게 빨리 이루어지면 후반기 우리 팀 기대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데이빗은 이 상황을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었다. 보이는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야구에 이성을 잃으면 상식적 판단이 잘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엄은 쓴웃음을 삼켰다.

***

‘그동안 너무 조급하게 굴었지 뭐야.’

돈 얼마에 눈이 뒤집혀 가지고 투구 패턴을 너무 단순하게 가져갔었다. 간파당하기 전에 멈출 수 있어 다행이다. 이번에 본의는 아니었지만 좀 쉬게 되면서 점점 머리가 맑아졌다.

전반기 마지막 3게임의 부진과 후반기 시작하면서 던진 게임들의 내용을 냉정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그 다섯 게임은 연결되어 있더라고. 체력 부족이나 투구 패턴의 단순화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던 거야.’

난 기네스 피처(기교파 투수)다. 그런데 퍼펙트 이후 파워 피처처럼 던지고 있었다. 정면 승부란 것도 내 특질에 맞춰 해야 하는 거지 빠르지도 않은 볼로 윽박지른다고 통하는 게 아니다.

무브먼트와 의외성으로 타자의 틈을 노려야 하는 거지 내가 100마일을 던지는 파워 피처처럼 던져서는 답이 없다.

기본적으로 빠른 볼보다 느린 공은 컨택이 쉽다.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퍼펙트에 해까닥 돌아버려서 하나도 안 맞겠다는 식으로 공을 던졌었다. 그건 가능하지도 가능할 수도 없다.

‘그 때문에 점점 소화 이닝은 줄어들고 타선이 돌 때마다 점점 더 맞아 나갔던 거지.’

일반적으로 노히트 노런을 하려면 기본적인 구위가 엄청나거나 타자들에게 분석이 덜 된 비교적 생소한 신인급 투수(이 범주에는 리그를 갓 옮긴 투수도 포함된다)가 유리하다고 한다. 거기에 강력한 수비진과 특별한 제구력 혹은 노련함이 있다면 퍼펙트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난 이 리그의 타자들에게 생소한 신인급 투수였고 이전 시즌에 다른 리그의 불펜 투수로 뛰었기 때문에 주요 분석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 팀은 본즈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수비력의 팀이었다. 지금도 내외야 수비는 리그 최상위급이다. 그리고 난 특별한 무브먼트에서 비롯된 특별한 구위를 가지고 있었고 제구력이 아주 좋았다.

나의 퍼펙트는 우연히 그냥 이런저런 조건이 맞아서 일어난 일이었던 거다.

그런데 그거 한 번에 이성을 잃어버리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으니 그 정도로 버텨낸 게 행운이었다. 한두 이닝이야 어떻게 넘긴다고 해도 선발로 길게 이닝을 먹으려면 하나도 안 맞겠다는 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스트라익.”

아웃 코스를 빠져나가는 공에 배트가 헛돌았다.

내 공은 살랑거려야 한다. 타자들에게 경각심보다는 이 정도 공은 언제든 자신 있게 칠 수 있다라는 방심을 유도해야 하고 타자들이 함정에 빠지면 패턴을 깨뜨린 하이 패스트볼 승부를 가져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

“스트라익. 배터 아웃.”

하이 패스트볼에 타자가 얼어붙었다. 이건 주력이 아니다. 타자가 아닌 타선을 상대하면서 나온 개별적인 결과물일 뿐이다.

“수고했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이닝을 마치고 내려가자 투수 코치가 이 게임에서 내 역할이 다했음을 알린다.

92구 8이닝 5안타 무실점. 다저스를 셧아웃시켰다.

‘내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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