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60화 (60/200)

60화. 나 멀쩡해요.

“어서 오세요. 제인 와그너입니다. Dr. 와그너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정중한 인사를 받았지만, 몹시 불쾌했다.

“지금 이 자리에 제가 왜 나와 있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네요.”

진짜로 모르진 않는다.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와 구단 사장인 폴 해리스를 만나 아무 이상 없다 단순한 착오였다고 강변했지만. 그는 완고하게 정신과의 심리 상담 후 괜찮다는 결과가 나오기 전엔 팀에 합류할 수 없음을 통고했다. 그래서 여기 왔다.

‘정말 짜증스럽네.’

“왜? 저 같은 미인이랑 같은 자리에 있는 게 싫으신가요?”

처음 본 여자가 너무 뻔뻔스럽게 말한다. 첫인사의 정중함은 가면이었던 것 같다.

의식하지도 못했고 확실히 그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억지를 쓰면 조금 매력적인 부분이 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내 머릿속의 미인형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난 고전적인 미인이 좋다고 올리비아 핫세 알아? 뭐 그런 거 있잖아. 음. 아무튼 이런 말라비틀어진 모던한 스타일은 전혀··· 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처음 본 여자가 실실거리며 농담하는 바람에 무심결에 넘어갈 뻔했다.

“난 미치지 않았는데 왜 정신과 의사를 만나야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멀쩡하다구요.”

“누가 당신을 미쳤다고 한 사람이 있었나요?”

그런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샌디에이고에서도 그렇고 만나는 의사마다 별다른 검사를 하지도 않고 질문만 이렇게 해대면 ‘아! 정신과에 왔구나.’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좀 이상한 일을 벌인 건 사실이죠.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건 그날 이상한 놈이 이상한 걸로 웃기는 바람에 웃다 눈물이 난 아주 단순한 실수였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이런 상담은 필요 없어요. 누구나 그런 실수는 살다 보면 한 번씩 다 하지 않나요?”

“보통은 그걸 4만 명 앞에서 하지는 않죠.”

그건 그렇긴 하다. 그건 그렇고 이 여자의 말투가 몹시 거슬린다.

‘의사면 의사답게 음. 비교 대상이 좀 애매하네. 정신과에 와 본 적이 없어서··· 정신과 의사는 이렇게 하는 게 정상일지도···’

아무튼 그건 모르겠고 또박또박 대꾸하는 게 너무 싫다.

‘부드럽게 말해도 되잖아. 내가 지금 심리적으로··· 악! 나는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아무래도 정신과에 좀 들락거렸더니 세뇌가 되어버린 것 같다.

“시상식 같은 데서 상 받은 사람이 감정이 북받쳐 울기도 하잖아요. 그런 게 비정상은 아니지요. 나도 그런 거였다구요.”

거슬린다고 성질내면 나만 손해다. 팀 훈련에 참여하려면 이 의사가 OK 해야 한다고 들었다. 열 내지 말고 차근차근 설득해야 한다.

‘논리적으로 이야기해야 해. 버럭하면 안 돼. 이걸 그냥··· 어휴! 참아야지.’

“차 한잔하시겠어요? 여기 분위기 좋지 않아요? 저는 그린 티를 한 잔 마실 겁니다. 뭘 드실 건가요?”

반박이 나오면 재반박을 하려고 단단히 준비했는데 갑자기 엉뚱한 말이 나왔다. 힘이 쭉 빠진다.

‘분위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빨리 끝내 달라고. 집에 가고 싶다구.’

병원 같은 이미지를 안 풍기려고 아무리 카페 풍의 인테리어로 치장했어도 사무실은 사무실이고 진료실은 진료실이다. 티가 역력하게 난다. 이런 공간에서 저 여자는 의사고 나는 환자···

‘하아! 환자 아니라고.’

이런 낮 시간에 운동장에 있어야 할 내가 감정 조절을 한 번 잘못했다고 이런 꼴이 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여길 확 뒤집어엎어? 아이고, 안 되지. 성질 뻗친다고 그랬다간 분노조절장애니 뭐니 또 그럴지도 몰라.’

“뭐 마실래요? 어차피 2시간은 있어야 하잖아요. 3일간 매일 2시간씩 상담하는 걸로 꽤 많이 받았다구요. 비용을 받았으면 내가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툴툴거리는 환자는 나도 반갑지 않다구요.”

너무 노골적인 말이었지만 처음 의견이 일치되었다. 나도 당신이 보기 싫다.

“당신은 싫어도 3일간은 이 시간에 여기 나와야 해요. 내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계속 이런 식이라면 혹시 알아요? 난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소견서 쓸 때 무의식중에 사적 감정이 들어갈지도 모르잖아요. 서로 우호적으로 3일을 보내자구요. OK?

이 여자 이젠 협박까지 한다. 하지만 굳이 얼굴을 붉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아무 거나 줘요. 그런 거 안 가려요.”

일단은 숙여줬다. 이 의사 말대로 혹시라도 앙심 품고 진단서에 맘대로 써 갈기면 아주 곤란하다. 사실은 안 가리는 게 아니라 물밖에 안 마신다. 다시 운동을 시작하고 나서는 음료수란 걸 마셔본 일이 없다. 탄산음료를 먹어봤던 것도 군에서가 마지막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마셔도 괜찮겠지? 아! 몰라. 대충 먹자고. 어쨌든 시간은 때워야 하고 이 여자 말대로 서로 기분 나쁜 게 티 나면 안 좋으니까.’

“그럼 이거 마셔요. 카모마일 티예요. 오천 년 전부터 쓰였던 약용 식물이죠. 긴장 완화, 두통 등에 효과가 있고 항산화 물질이 풍부해서 장복하면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돼요. 카페인 성분도 없고···”

편안한 소파에 반쯤 누워서 차향을 음미한다. 빈티지 느낌의 목제 테이블 위 찻잔도 얼핏 보기에 굉장히 고급스럽다. 우아한 자세로 오묘한 빛깔의 따뜻한 차 한 잔. 그런데 너무 불편하다.

‘불친절한 의사와 같은 배경만 빠지면 딱 좋겠는데···’

***

악몽 같은 3일이었다. 2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진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서로 좋게좋게 시간 보내자더니···’

그 의사는 처음엔 부드럽게 대하더니 조금 얼굴이 익자 시시때때로 시비를 걸었다. 정말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건 그쪽인 것 같았다.

‘내가 이런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미친 사람을 주로 상대하더니 본인이 미쳐 버린 것 같더라구. 에이, 미친 X.'

나의 인내심에 경의를 표한다. 수모와 압박의 3일을 인상 찌푸리지 않고 견뎌냈다. 그 결과로 일주일 만에 이렇게 팀에 합류했다. 팀에서 10일짜리 IL(Injured List, 부상자 명단)로 처리해 놓아서 문제없이 바로 합류했다.

“야! So.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예전에 그레인키는 1년 만에 돌아왔다고 하던데 넌 좀 덜 미쳤나 보지?”

역시 투수들이 점잖다. 오전에 합류했을 때 투수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같이 대해줬다. 이 레블론 아저씨는 좀 친하다고 너무 막말한다. 세상엔 미친놈들 천지다.

‘이런 놈을 잡아가야 하는 건데 나 같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을···’

“멀쩡하니까 온 거 아니겠어? 잠시 착오가 있었던 것뿐이야.”

이럴 때 열 내면 더 좋은 먹잇감이 된다. 군대에서 다 겪어 봤다. 태연하게 태연하게··· 아! 열 받는다.

“흐흣. 내가 의사에게 상담받으면서 알게 되었는데 그녀가 그러더라구.”

“그녀? 의사가 여자였어? 오호! 그거 괜찮았겠네. 우리가 매일 흙바닥에서 구를 때 넌 미인 의사랑 다정히 이야기를··· 그것도 매일 했다는 말이지. 오호! 그렇다면 이번엔 나도···”

추천한다. 몹시 좋은 시간이었다.

“거기서 들은 얘기인데 정신병은 유전도 되고 전염도 된다네. 심리적 공감대가 형성되는 사람에게 은연중에 증상이 옮겨 간다고 하더라구. 좀 생각해보니까 내가 팀에서 제일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게 베그웰이잖아. 그다음은 레브론이고.”

“그래서?”

“베그웰은 트윈스에 있을 때부터 함께였는데 그때는 별일 없었지. 그렇다면 이 팀에 와서 문제가 생겼다는 건데 그럼 원인은··· 난 아니라고 믿고 정말 아니겠지만, 예방 차원이라고 생각하고 검진 한번 받아보면 어떨까? 그건 잠재되어 있다가 한 번에 터지는 거래.”

레브론은 보기보다 순진하다.

“어? 그래?”

‘흙바닥 같은 소리 하네. 잔디밭 외야에서 놀면서 흙바닥이라니··· 거긴 먼지도 안 날리잖아.’

“의사도 친절하더라. 참하게 생긴 아가씨야. 말도 조근조근하고··· 너 돈 많잖아. 상담료가 좀 비싸긴 한 거 같던데 웬만하면 구단에 알리지 말고 개인적으로 방문해보는 걸 추천해. 이런 일 주변에서 알아서 좋을 건 없잖아.”

“그건 그렇지. 그럼···”

“그렇긴 뭐가 그래? So가 빠지는 바람에 내가 얼마나 머리 썩였는지 너도 봤잖아. 이젠 주력 타자가 빠지겠다고? 그 꼴은 못 봐. 죽어도 못 보내. 가려면 나 잘리고 나서 가. 내가 보기엔 자넨 멀쩡해. 미칠 것 같은 건 나라고.”

감독이 지나가다 들었나 보다. 버럭 화를 낸다.

“에이, 뭘 그렇게 열을 내세요. 선수들 점심 먹다 체하겠어요. 농담인 거 아시잖아요. 겨우 로테이션에서 두 번 빠졌을 뿐이잖아요. 이제 제가 돌아왔어요.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에잉, 뭐라고 말도 못하겠고.”

감독이 투덜거리면서 돌아섰다.

“So. 농담이었어?”

“농담은 무슨··· 감독 앞에서 계속 말하기가 그래서 둘러댄 거지. 병은 묵히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내가···”

***

“정말 놀라겠군. So가 저렇게 활달한 사람이었나?”

감독은 진짜 놀라고 있었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베그웰하고는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었지요. 그리고 그전에도 특별하게 과묵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 않습니까?”

투수 코치로서는 지금 다행스럽다 이 마음뿐이었다.

“눈이 다르잖아. 전에는 농담을 해도 건성으로 했었다구. 속으로는 딴 생각하면서 대충 맞춰 준다는 식이었지. 그런데 지금은 진짜로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그거야 좀 쉬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어쩌면 저는 이번에 열흘 빠진 게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풀타임 첫해나 마찬가지인데 보직 변경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몸도 일찍 끌어올렸고 상반기 끝나고 쉬지도 못했지요. 알게 모르게 많이 피곤했을 겁니다.”

“다음 등판 괜찮을까?”

감독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로테이션 순서 변경해서 IL 끝나자마자 바로 출전시킨다고 하신 건 감독님이셨잖아요. 이제 와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람이 며칠 사이에 저렇게 바뀌면···”

리우드의 생각으로는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 같은데 걱정하는 감독이 너무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며칠 쉬고 오랜만에 훈련에 참가해 불안했던 마음도 풀어지고 그래서 그럴 겁니다.”

코치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감독의 머리에는 어제 본 So의 검진 리포터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환자에게는 만성적인 우울증, 분리불안 장애, 공황 증상, 대인 기피 등이 종합적으로 나타납니다. 사소한 자극에도 움츠러 들고 자신만의 영역으로 달아나는 경향을··· 환자의 성장 배경과 최근 3년간 처했던 제반 사회적 환경을 연관해 유추해보면 유전적 형질이 발현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이며, 급격한 상황 변화에 따른 방어 기제의 자연스러운··· 약물과 상담에 의존하기보다는 사회적 접촉을 늘려 스트레스 흡수에 유연성을 가지게··· 운동 능력의 손실은 없을 것으로 판단되며 잠재되었던 기제의 발현은 증세가 악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호전되는 과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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