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각성한 이레귤러의 커브가 드러남-59화 (59/200)

59화.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에구구.”

조심조심 던졌는데 4회에 안타를 맞고 말았다. 확실히 타선이 한 바퀴 돌면 타자들이 어느 정도 적응을 한다.

중견수 레브론의 기민한 대처로 단타 처리가 되어서 다행이다.

‘이것 참! 의식적으로 하려니까 겁나게 힘드네. 에잇, 오늘도 글렀어. 작전 변경이야.’

마운드에서 두 발을 모아 가볍게 총총 뛰었다. 이러고 나면 왠지 근육의 긴장이 풀어지는 느낌이 난다.

‘저번 게임은 6회 오늘은 4회야? 어째 안타를 맞는 게 점점 더 빨라지는데···’

꼭 해야 한다는 마음 자체가 비정상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의식이 안 될 수가 없다. 수백억짜리라는데···

반쯤은 진심이고 나머지 반은 혹시나 하는 마음이다.

2반 터틀 그렉이 나왔다. 1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문득 이름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루율이 좀 높은 걸 제외하면 기록은 그냥 평범한 타자였다. 1회에도 범타로 잡았다,

‘설마 본명은 아니겠지? 본명이면 너도 인생 초창기 피곤하게 살았겠구나.’

등록명이 본명이 아닌 경우는 꽤 많다. 캣피쉬 헌터가 대표적으로 유명한 이름이다.

‘캣피쉬(Catfish, 메기)도 있었는데 터틀(turtle, 거북) 정도야 메이저리그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

‘아! 캣피쉬 헌터도 퍼펙트게임을 했었구나.’

요즘은 자존감이 상승해서 비교 대상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후반기 스타트는 좋았다. 화이트 삭스와의 홈 3연전을 위닝 시리즈로 열었다. 2연승 후 1패. 우리 1~3 선발은 수준급이다. 1패도 팽팽한 접전이었다. 이어진 백스와의 원정 3연전은 1승 2패로 루징 시리즈였다. 좀 나아지려나 싶다가 다시 승률 5할로 돌아갔다.

‘4선발 로저스는 나름 제 몫을 했지 경기를 지긴 했지만 6이닝 3실점이면 할 만큼 한 거라고. 1선발 소르카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 5선발이···’

시리즈 두 번째 경기에 나선 5선발 존슨은 화려하게 폭발해 버렸다. 3회까지 무실점으로 잘 막더니 4회에 갑자기 난조에 빠졌다. 3연속 볼넷 그리고 연속 안타 그 뒤는 더 말하기도 싫다.

‘어쨌든 늘 하던 대로라서 일관성 있는 모습이 돋보였지.’

거기서 구단 프론트의 인내심이 다했는지 다음 날 마이너에서 콜업이 있었다. 존슨은 사정없이 마이너로 샌드다운(강등)되어 버렸다. 마이너 리그 거부권을 가지려면 풀타임 5년을 채워야 한다. 어쩌면 그런 부담감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왼팔을 쓰는 끝내주는 존슨도 있었는데 우리 팀 존스는 왜 이렇게 다른지··· 하긴 랜디 존슨도 20대에는 별로였어. 존슨이라는 성이 혹시 대기만성하는···’

랜디 존슨 같은 레전드에 비교하는 게 무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요즘 내가 웬만한 투수는 눈에 차지 않는다. 랜디의 20대를 생각하면 데이빗도 마이너에서 재정비해서 다시 올라올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감만 잡으면.

‘그놈의 감이 뭔지···’

왠지 씁쓸하지만 여긴 그런 세계다. 그래서 사람으로는 별거 아닌 내가 나름 대접받고 있다.

파드리스와의 원정 4연전의 첫 게임이다. 꼭 이겨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싶다. 현재 위치를 지키는 것에 안주하지 않고 한 발 더 나가야 한다.

‘거북이든 자라든 상관없다고 내 분노의 일격을··· 아니지 맞춰 주고 더블 플레이 유도를···’

느리고 휘는 각이 큰 싱커로 시작했다. 코스는 언제나 그렇듯 아웃코스.

틱-

파울이지만 배트 끝이 꽤 날카롭게 돌았다. 역시 첫 타석 때 스윙과는 다르다. 그동안 내 타구를 보면서 나름 타이밍을 잡아 가지고 나온 것 같다.

더 느리고 각은 좀 더 크게. 코스는 역시 아웃 코스.

휙-

다시 날카롭게 배트가 돌았지만 헛스윙. 거의 같은 궤적으로 날아오는 이 공을 참을 수 있는 타자는 아주 소수다. 첫 구는 존에 들어가는 공이었지만 비슷한 궤적에서 각을 좀 더 키우면 존과 공 한 개 이상의 차이가 나는 낮은 볼이 된다.

타자가 자책하듯 한 손으로 헬멧을 쓴 머리를 두어 번 두드렸다. 꽤 세게 때린다. 본인이 때리면서도 힘 조절이 안 되는지 맞을 때마다 목이 움츠러들어 거북목이 된다.

‘풋. 저래서 이름이···’

남의 신체 특징을 비하하려는 건 아니다. 그리고 속으로만 생각한 거다. 도저히 공을 못 던지겠다.

일단 한 템포 죽였다. 뒤로 돌아 2루를 바라보고 섰다. 경기 시간 촉진 룰에 의하면 투구 시 간격은 기본 15초. 주자가 있을 때는 20초다. 하지만 사람이 항상 법대로 사는 건 아니다.

주심도 사람이고 경기 운영에 대한 재량권이 있다. 그래서 주자가 있을 때는 꼭 20초를 고집하지 않는다. 고의적으로 경기를 지연시키려는 행위가 노골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대충 넘어간다.

‘하! 보고 있자니 웃겨서··· 크크큿.’

돌아섰다고 나를 보고 있는 눈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리 팀 유격수와 2루수가 눈이 동그래져 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한 눈이 보인다.

살짝 웃으며 별일 아니란 신호를 보내고 싶은데 그랬다간 마운드에서 웃음보가 터져버릴 것 같다. 인상을 좀 썼더니 무엇인가 아랫배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 미치겠네. 이상한데 꽂혀 가지고···’

글러브로 얼굴을 가리고 다시 돌아서 포수를 불렀다.

‘후후훅. 시간이 필요해. 지랄 같은 촉진 룰이··· 으으흑.’

어금니를 너무 꽉 깨물었더니 눈물이 나올 것 같다.

포수를 불렀더니 벤치에서 타임을 부르고 감독이 올라오고 있었다. 관중도 웅성이기 시작했다.

“나이스! So에 문제가 생긴 것 같은데···”

“빨리 내려라. 저놈 내려가면 좀 치겠네.”

정신없는 와중에도 관중들의 입 모양이 눈에 뚜렷이 들어온다. 그것만 보고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다 알 것 같다.

걱정 가득한 감독 얼굴을 대하니까 비로소 이 상황이 상당히 미안하기도 하고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구설수에 올라서는 안 돼. 안 된다고.’

감독을 와락 껴안았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를 죽여 가며 웃었다.

너무 웃다 보니까 눈물이 난다. 갑자기 내 신세가 서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젠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다행히 좀 울다가 진정이 되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감정 주체를 못하다니··· 4만 명이 보는 앞에서 이 꼴을···’

고개를 못 들겠다.

“자네 병원에 가야 하지 않겠나? 교체를···”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공개적인 장소에서 웃다가 울다가 이 난리를 쳤으니 제정신을 가진 놈으로 보이진 않았을 것 같다. 나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아래쪽으로 수많은 발들이 보였다. 그사이에 우리 팀 선수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누구도 말 한마디 꺼내지 않고 있다.

이대로 내려가는 건 말이 안 되는 일 같았지만, 이 분위기에서 감독 말을 대놓고 거부할 수는 없다. 나도 뭔가 이상한 것 같긴 하다.

수건을 덮어쓰고 선수들에 둘러싸여 덕아웃으로 향했다.

‘이거 뭐야? 나 미친 건가?’

어디 아픈 곳도 없는데 구급차에 실려 곧바로 어딘지 모를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저기··· 제가 불편한 곳이 없거든요.”

구급차에 같이 탄 의사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호소했지만 들은 척도 안 한다. 웃음 참다가 일이 너무 커졌다. 이 상황이 엄청나게 우습고도 무섭다.

‘아! 정말 미치겠네.’

***

“사장님.”

윌리스 단장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검사 결과가 나왔나요?”

“정확한 건 아직 아닙니다만, 일단 샌디에이고 병원에서의 검진 소견은··· 아마도 잭 그레인키와 같은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사장도 아까 중계를 보고 있었다. 이런 대답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새어 나오는 신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으음! 이런···”

잭 그레인키는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등 사회불안장애를 오랫동안 앓았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격렬한 투쟁심을 폭력으로 폭발시키기도 했었다. 경기 중 고의로 빈볼을 던져 일어난 벤치 클리어링 중 쇄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증세가 심했을 땐 눈물을 흘리며 방망이를 껴안고 잠들기도 했었다고 한다. 야구를 그만두겠다고 캠프에서 짐을 싸 뛰쳐나간 일도 있었다.

“휴우!”

이런저런 일을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왔다.

“의료진의 말로는 잠재되어 있던 기제가 투구 중의 어떤 사소한 사건이 트리거가 되어 폭발한 것 같답니다. 지금은 안정되었다고 합니다.”

“후우! 정말 뜻대로 되는 일이 없네요.”

사장의 한숨에 윌리스도 동조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이 상황에서 그건 안 될 일이었다.

“그레인키도 극복하지 않았습니까? 돌아와서 사이영상도 타고 대약진을 했지요. So도 지금까지 난관을 헤치고 온 걸 보면 충분히 강한 의지의 소유자입니다. 그도 극복해 낼 겁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So의 요사이 2~3년간 행적을 생각해보면 이런 일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미리 대비하지 못했는지 정말 후회스럽네요.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윌리스도 그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꼈다. 단장이지만 사장의 보좌역과 같은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위치였다. 사전에 조언했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So가 워낙 긍정적이고 쾌활하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이런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너무 자책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So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송 중입니다. 메모리얼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놓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네요.”

늘 활력이 넘치던 사장에게서 피곤함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충분히 쉬고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한다면 괜찮아 질 겁니다. 그레인키도···”

“그것만으로 될까요? 그레인키에게는 고교 동창이며 연인이었던 에밀리 쿠차가 있었죠. 그녀가 없었다면 그레인키의 회복은 어려웠을 겁니다. So에게는 지금 그런 존재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 가까운 사람으로 Go가 있지만, 쿠차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이것 참··· 휴우!”

윌리스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그렇게 해버린다면 절망감만 더 깊어질 뿐이다..

“그래도 트레이드가 마무리된 후에 일이 터져서 다행스럽네요. 만약 이 사건이 트레이드 전에 터졌다면 그 정도 조건으로는 성사가 안 되었을 겁니다.”

“그러게요. 후반기 대반격의 시점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이런 일이···”

말 돌리기는 실패해 버렸다.

“우리 사정이 어렵다고 리그 일정이 바뀌는 건 아니지는 않지 않습니까? 일단은 되는 대로 꾸려나가야겠지요. 수습하고 그러다 보면 반드시 치고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올 겁니다.”

단장 아니, 보좌역으로서 할 수 있는 건 이제 위로밖에 없었다.

“그렇겠죠? 예상 못한 불운이 있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약한 꼴 보여 미안합니다. 일단 투수진 결원 메꿀 궁리부터 해봐야겠네요. 허헛. So의 자리를 채우려면 누굴 데려와야 할까요? 윌. 추천 좀 해보시죠.”

사장의 눈이 다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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