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또 다른 세계
[5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6천.]
[6천5백.]
[7천입니다.]
입찰가는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하핫. 이거 뭐야? 겨우 이거에 그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거야?’
“좀 놀랍네요.”
“전 그렇게 놀라지 않았어요. 어느 정도 예상한 결과예요.”
오늘 에이전트 대표로 마일리가 참석했다. 고 감독은 사람 많은 곳이 싫다고 안 왔다.
그녀야 말로 오늘 이 자리의 숨은 공로자다. 그동안 뒤에서 생색도 별로 나지 않는 일을 열심히 해주었다.
‘늙다리 아저씨가 복 받았지. 어휴!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만.]
[만 5천.]
‘헐!’
경매가가 급기야 만 단위가 나온다. 지금 경매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 100명쯤 된다. 마일리 말로는 어중이떠중이를 배제하기 위해서 입찰 보증금을 1만 불씩 받았다고 하는데 이 정도다. 보증금의 10%는 기부하는 조건이라고 한다.
‘나 참! 이게 뭐야.’
솔직히 한 만 불 이상은 나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입찰액을 불러대는 기세들이 장난이 아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내가 무엇인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3만.]
[4만 나왔습니다.]
[5만]
4만에서 응찰자가 우수수 떨어져 나가고 이제 세 명만 남았다. 거의 결정된 것 같다. 5만 이게 마지막일 것 같다. 2천 8백 불짜리 시계 문자판에 다른 무늬와 글자 좀 들어갔다고 5만 불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된다.
“이제 시작이네요.”
기부금을 수령할 소아암 전문 세인드버드 어린이 병원 관계자다. 버나드 뭐라고 하던데 그냥 흘려들어 확실치 않다.
“예?”
어제 경기를 마치고 피곤해 정신이 흐릿한 가운데 올스타전 MVP 등을 시상하는 식후 행사까지 참석하고 겨우겨우 호텔로 돌아와 잠들었다. 오늘 눈 뜨자마자 의상, 헤어, 메이크업에 끌려다니다 오후에 시계 런칭 행사에 참석해 베그웰에게 멋있게 시계를 주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리고 이어서 이 난리통을 구경 중이다.
“제가 이런 기부 행사는 좀 많이 다녔거든요. 경험이 조금 있죠. 이제 본진이 나선 겁니다. 특히나 1번 시계라는 상징적 가치가 있거든요. 아마 그것과 99번 시계 낙찰가가 제일 높을 겁니다.”
깔끔한 신사 양반이 별걸 다 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마일리마저 동조한다. 참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세계가 많다 싶다.
[10만 나왔습니다.]
‘아이고, 이거 뭐!’
내가 생각한 가격에 0이 하나 더 붙었다.
[12만.]
‘······’
급박한 줄다리기가 계속되다 결국 1번 시계는 22만 5천 불에 낙찰되었다. 이럴 수가 있나 싶다.
낙찰받은 사람이 환한 웃음을 띤 채로 연신 어퍼컷 세리머니 중이다.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다.
“축하합니다. 최초 기부액이 22만 5천 불이 되셨네요. 경매 대행사에게 10%는 떼 줘야 하겠지만.”
병원 관계자로부터 치하를 들었지만 어리벙벙하기만 하다.
“이건 제가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말하기가 어렵네요,”
“너무 놀랄 것 없어요. 수집가들의 세계는 좀 독특한 구석이 있지요.”
그의 말에 따르면 경매에 나와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낙찰된 스포츠 관련 용품은 베이브 루스가 1920년대에 입었던 유니폼이란다. 2012년에 441만 달러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그래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었나요?”
“많지는 않지만 아주 적은 건 아니에요. 야구 쪽은 베이브 루스의 물건들이 고가로 거래되었는데 그가 양키스타디움에서 처음 홈런을 쳤을 때 사용한 배트는 2004년 126만 달러에 낙찰되었고. 루스가 레드삭스에서 양키스로 트레이드될 때 계약서는 2005년 99만 9000달러, 1932년 월드시리즈에서 예고 홈런을 날릴 때 입었던 유니폼이 94만 달러에 거래됐었죠.”.
“다른 선수도 그런 예가 있나요?”
“마크 맥과이어의 시즌 70호 홈런공이 300만 달러에 낙찰된 일이 있었고 종류는 좀 다르지만 호너스 와그너의 야구카드가 280만 달러에···”
줄줄줄 막히지 않고 대답이 나온다. 엄청나게 숫자에 강한 사람이다.
“저기 혹시 원래 뭐 하시는 분이신가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병원 관계자분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자세히 아시는지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아! 저요? 변호사입니다. 세인트버드 병원의 사외이사이기도 하죠. 이런 일은 글쎄 뭐라고 해야 되나? 그냥 재능기부 같은 거죠. 돈이 오가면 언제나 문제의 소지가 생길 수가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다른 스포츠도 그런 예가 있나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마일리가 갑자기 물었다.
“물론이죠. 농구의 창시자로 알려진 제임스 네이스미스가 쓴 농구 규칙이 2010년에 소더비 경매에서 433만 달러에 낙찰된 일도 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팀인 영국 셰필드FC에서 만든 축구규칙집이 88만 파운드, 캐나다 아이스하키 선수 폴 헨더슨이 1972년 구소련 대표팀과의 서밋시리즈 때 입었던 유니폼이 127만 달러, 무하마드 알리가 플로이드 패터슨과의 헤비급 타이틀전에서 사용한 글러브가 110만 달러 이런 사례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렇게 박식한 사람은··· 응?’
대개 본업이 아닌데도 이런 특정한 분야의 지식을 가진 사람은 본인이 그 일에 대해 취미 이상의 관심을 가진 경우가 많다.
“버나드 씨. 맞죠? 혹시 본인도 그런 종류를 수집하기도 하시나요?”
“흠. 가끔 기분이 내키면 그럴 때가 있긴 하죠.”
그가 좀 쑥스러워하면서 말했다.
“어떤 종류인가요? 언제 소장품을 한번 보여주실 수 있나요? 오늘 이 경매를 보면서 이런 부분에 흥미가 생기네요.”
흥미를 가지게 만든 건 물건이 아니라 사람 쪽이었지만 장수를 잡으려면 말부터 해치워야 한다. 자신의 관심 분야에 대해 공감해주는 사람과의 만남은 매니아에게 큰 만족을 준다.
‘내가 그런 거 보러 언제 가보겠어? 그럴 시간도 없고 별로 보고 싶지도 않다고.’
립 서비스에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음. 보여줄 만한 건 조던이 불스 소속으로 마지막 시즌에 입었던 유니폼 상의가 있어요. 제가 2015년에 17만 3,240달러에 낙찰받았죠. 2013년에 1997년 조던이 유타재즈와의 NBA 챔피언 결정전 5차 원정 경기에서 신었던 운동화를 10만4,654달러에 구했는데 이제 세트가···”
말로만 들었는데도 땀 냄새가 흥건하게 풍기는 것 같다.
“아! 그렇군요. 마이클 조던은 저도 참 좋아했었죠. 조던의 빅 팬이셨나 봐요.”
“아뇨. 전 별로 농구 안 좋아해요. 조던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다지··· 전 야구 좋아해요.”
무슨 이런 말이 다 있나 싶다. 대화의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예? 그럼 왜 그걸 사셨어요?”
“투자죠. 유한한 것은 가격이 떨어질 수가 없답니다. 물론 수집품 투자가 얼마나 성공을 거두냐는 수요와 공급, 유행과 인지도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희귀하고 히스토리가 있는 물품이라면 언젠가는 대박을 터트릴 수 있죠.”
이 사람도 많이 색다른 유형의 사람이다.
“성공 사례가 있으신가요?”
“그럼요. 2014년 버건디 와인을 조금 구매를 해서 보관을 했었죠. 그걸 2019년에 처분했는데 5년 사이에 가격이 105% 상승했죠. 연간으로 따져도 20%가 넘죠. 같은 기간에 와인 1,000종의 평균 가격 상승률은 42%였어요. 그 해에 맥켈란 60년산도 경매로 처분했는데 110만 달러를 받았죠. 그건 제 부친께서 1986년에 2만 7천 달러에 구입한 것이었죠.”
“저기 맥켈란이 뭐죠?”
우리 엄마 가르침에 의하면 모르는 건 물어봐야 한다고 하셨다. 괜히 부끄럽다고 우물쭈물하면 그게 패가망신하는 길이라고.
“스코틀랜드산 싱글 몰트 위스키죠. 술을 잘 모르시나 보군요.”
‘헐! 술 한 병을 13억을 넘게 주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야?’
“그럼 저 시계를 사는 사람들은 단순 수집품 용도로 구입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네요.”
“단순히 좋아서 소유욕으로 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소수겠죠. 보통은 투자 용도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그림이나 골동품을 사는 이유와 같은 겁니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현금을 은행에 넣는 것보다 이 편이 낫죠.”
내 생각이 너무 얕았다. 세상을 너무 몰랐다. 이 경매를 나름대로 굿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건 그냥 단순한 나만의 망상이었다. 조금 전까지 밝은색이던 경매 광경이 무채색으로 느껴진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모은다는 생각은 다시 검토해봐야 할 것 같다.
“제가 오늘 많이 배우네요.”
“뭘요. 이런 자선 행사에서 저와의 대화는 공짜예요. 혹시 문제가 생기면 절 찾으세요. 제가 보기보다 유능하답니다. 물론 그때는 상담료를 주셔야 합니다. 하핫. 비싸게 안 받을게요.”
“저도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베그웰이다. 싱글거리며 자기 손목에 찬 시계만 보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특별한 경기에서 쓰인 볼 같은 것도 비싸질 가능성이 있는 건가요?”
“그럼요. 맥과이어의 시즌 70호 홈런공이 그 전례죠. 어떤 공을 가지고 계시죠?”
그렇게 물어볼 공이라면 그 공이 있었다. 내 24호 퍼펙트에 쓰인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은 공. 그때 그걸 베그웰에게 줬었다.
경매는 계속 진행 중이었지만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한참 됐다.
“So. 공을 돌려줘야 할 것 같네. 난 그게 그렇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니가 그거 어디다가 팔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너야 망하지는 않겠지만 네 손자쯤 되는 누군가에게 재기의 발판이 될지도 모르잖아. 난 선수 생활을 하는 한 또 생기지 않겠어? 은퇴하기 전까지 몇 번 더 하겠지.”
이 정도면 훌륭한 답변이라고 생각된다.
“그 공을 베그웰 씨가 가지고 있었던 겁니까? 음. 갑자기 탐이 막 나네요. 아! 그 공 말구요.”
버나드 씨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했다.
“그럼 뭐가 탐이 나신다는 거예요?”
“다음 퍼펙트 공이요. 그거 아시죠? 퍼펙트를 두 번 한 사람은 없다는 거. 그 정도 스토리를 가진 물건이라면··· 거래를 하나 하시죠. 만약 다음 퍼펙트 공을 저에게 준다고 약속하신다면 오늘부터 평생 법률 상담은 무료로 해드리죠. 어떻습니까? 저 상담료 비싸게 받는 사람이에요. 한 시간만 이야기해도 몇천 달러는 받는다구요.”
“푸하하. 제가 앞으로 퍼펙트 못하면 어쩌려고 그런 말씀을 하세요. 역사상 그랬던 사람이 없는 일인데···”
“그래서 이런 제안을 드리는 거죠.”
참 말도 안 된다 싶다. 또 한다는 이야기는 그냥 베그웰에게 부담 가지지 말라고 한 이야기였다. 그게 원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뭘 믿고 이렇게···
“하하.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죠. 운동만 하신 분이라 그런지 투자를 잘 모르시네. 그런 건 제가 전문가라니까요.”
덕담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또 퍼펙트라니··· 하핫. 웃고 말아야지.’
“좋습니다. 후회하지 마세요.”